무명실에 둥둥 감긴 북어 한 마리
눈 뜨고 말라가네
고수레 소리에 뻗친 희망 배 속에 꽉 채웠을 텐데
마른 장작처럼 좀버섯 하나 피우지 못하고
새벽이슬 한 방울 호흡 못 하고
눈뜨고 말라가네
빛이란 무엇인가
토막 날 몸뚱이 오랜 세월 말려
끝내 추억 뒤로하고 흠뻑 두들긴 채 갈기갈기 찢겨
다시 짠물 속에 빠질 생이여
저 북어 보면
눈뜨고 말라가신 할머니 그립고
꽁꽁 얼어붙었던 동태 같던 내 지난 세월도
줄줄 흐를 것 같아
한적한 읍내 식당 푸른 벽에 걸린 북어 한 마리
눈 뜨고 조금은 입도 벌리고
(조인선 시집, ‘노래’, 문학과지성사, 2010)
어느 날 시인은 읍내의 한 식당에 갔다. 음식을 시켜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벽에 걸려 있는 북어의 툭 튀어나온 눈망울과 마주쳤다. 북어의 눈망울은 죽어서도 또렷한 형체를 띠고 있어서 마치 시인에게 할 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명태는 알이 많아서 자손 번창의 상징이요, 살이 두툼한 데다가 생것이나 얼린 것이나 말린 것이나 반만 말린 것이나 모두 쓸모가 있어 사업 번창의 상징이기도 하다. 오래 걸어두어도 괜찮은 바싹 말린 명태인 북어가 영업집 벽에 상징적으로 걸려 있었던 이유다.
시인이 본 북어의 특징은 ‘눈을 뜨고 있다’는 것이었다. 북어뿐만 아니라 모든 물고기가 항상 눈을 뜨고 있는데, 사찰에서는 부지런히 정진하라는 의미에서 물고기 모양의 목어와 목탁을 사용한다. 시인에게는 ‘눈 뜨고 말라가는’ 북어가 정진할 것을 촉구한다기보다는 “마른 장작처럼 좀버섯 하나 피우지 못하고/ 새벽이슬 한 방울” 호흡하지 못하는 불우한 처지로만 보인다. 시인은 북어를 보고 문득 질문한다.
“빛이란 무엇인가?”
항상 뜨고 있는 북어의 눈은 ‘빛’의 상징이다. 잡귀(雜鬼)들이 무서워하는 것이 빛이자 밝음이니, 사람들은 항상 눈을 뜨고 있는 북어 근처에는 잡귀들이 접근하지 않을 것이라 상상했다. 그렇다면 눈 뜨고 말라가다가 눈 뜨고 돌아가신 시인의 할머니도 빛의 상징일까? 시인은 말라가는 북어의 눈 속에서 할머니를 보지만, 눈 뜨고 떠나신 할머니가 빛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시인 스스로의 지난 생애를 돌아보니 자신의 지난날은 북어보다는 꽁꽁 얼어붙은 ‘동태’를 닮았다. 시인에게는 북어나 동태나 “눈 뜨고 조금은 입도 벌리고” 있는 것이 한가지로 보인다.
물고기 중에서 명태처럼 다양하게 활용되는 것이 또 있을까. 생것은 생것대로, 얼린 것은 얼린 것대로, 어린 것은 어린 것대로, 완전히 말린 것은 완전히 말린 것대로, 반만 말린 것은 반만 말린 것대로, 얼렸다가 말렸다가를 반복한 것은 또 그것대로, 알은 알대로 창자는 창자대로, 자신의 한 생애가 이처럼 온통 다른 생명체를 위하여 다양하게 활용되는 사례가 또 어디 있는가? 게다가 명태는 식용으로뿐 아니라 주술용으로도 쓰고 있으니, 물고기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를 통틀어서 이만큼 쓸모 있는 것은 없을 것 같다.
북어는 엄청난 해독작용이 있어서 사약을 먹은 사람도 북어를 먹으면 해독되어 죽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는 그렇게 유익한 명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한 번이라도 가져본 적이 있었던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명태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명태야말로 보살이란 상이 전혀 없이 보살의 삶을 철저하게 실천하는 물고기다.
할머니는 자신의 생애를 뼈까지 발라서 자식들을 위해 바쳤다. “빛이란 무엇인가?” 보살의 삶이다. 보살의 삶을 살았으면서도 자신이 보살의 삶을 살았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는 할머니나 북어의 삶이다. 북어가 항상 눈을 뜨고 있어서 빛이 아니라 그의 전 생애가 보살의 삶이어서 빛이다. 북어를 영업집에 매달아 놓는 것은 미신이 아니다. 그것은 훌륭한 기도다. 다만 북어를 보살님이라 생각하고 예배하는 마음이어야 그 기도는 효험이 있다.
동명 스님 시인 dongmyong@hanmail.net
[1717호 / 2024년 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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