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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찰령과 근대 불교의 탄생

총독부 ‘정신 식민화’에 조선불교 동원

최초 종교관련 법규 ‘사찰령’
총독부 불교 부흥 내세웠지만
실상은 식민화와 통제 의도
태고사 31본산 지도감독 역할

한일병합 후 1911년 6월 3일에 사찰령(寺刹令)이 공포되어 9월 1일부터 시행된다. 사찰령은 1915년 포교규칙보다 먼저 등장한 최초의 종교 관련 법규다. 사찰령 시행으로 종교 가운데 가장 먼저 불교의 식민화가 추진되었고, 덤으로 불교의 근대화가 이루어졌다.

사찰령에 따르면 사찰을 병합, 이전, 폐지하거나 사찰의 위치나 명칭을 변경할 때는 조선총독의 허가가 필요했다. 지방장관의 허가 없이는 전법, 포교, 법요 집행, 승려 거주를 제외하고 다른 목적으로 사찰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사찰을 종교적 목적이 아닌 정치적 집회, 유흥, 요식업 등에 사용할 수 없게 하여 불교 공간을 철저히 다른 영역과 분리시킨 것이다. 이렇듯 사찰령은 불교의 초월마저 강제했다.

또한 각 본사는 사찰의 본말 관계, 승규, 법식 등을 정한 후 조선총독의 인가를 받아야 했고, 사찰의 대표자로 주지를 두어 사찰에 속한 재산을 관리하고 사무와 법요 집행을 맡겨야 했다. 사찰에 속한 토지, 삼림, 건물, 불상, 석물, 고문서, 고서화 등 귀중품도 조선총독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처분할 수 없었다.

1911년 7월 8일에는 사찰령 시행규칙이 공포되어 사찰령과 함께 시행된다. 시행규칙에 의해 30개 본산이 지정되었고, 본사 주지는 조선총독의 임명을 받고, 말사 주지는 지방장관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이처럼 1911년에 본사와 말사로 체계화된 일본 사원의 본말 제도를 모방하여 조선 불교의 30본산이 구성된다. 1924년 11월 20일에는 화엄사가 추가되어 총 31본산이 설정된다.

사찰령이 시행된 후 1911년 9월 18일에 조선총독부 정무총감은 각도 장관에게 사찰령의 취지와 관련하여 통첩을 보낸다. 이에 따르면 사찰령은 조선 사찰의 퇴폐를 막고, 사찰을 유지 존속시켜 보호하고, 지방을 배회하며 무설(誣說)을 유포하는 승려를 박멸하고, 조선 승려의 위기감을 조장하여 조선 사찰과 일본 사찰이 본사와 말사의 관계를 맺도록 유도하고, 주지 임명의 문서를 교부하고 주지에게 재산 관리를 위탁하여 정치·경제적 권력으로 주지를 유혹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시작부터 사찰령은 조선 불교의 식민화를 염두에 둔 것이었고, 권력에 영합하는 주지를 두어 사찰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이 퇴락한 조선 불교를 부흥시키고 사찰 재산과 고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실상은 조금 달랐다. 사찰령에 의해 주지가 절대 권력을 행사하면서 각처에서 주지의 횡령배임 사건이 빈발했다. 특히 사찰 재산과 주지 재산의 경제적인 경계선이 불분명하여 사찰을 담보로 주지가 개인적인 자금을 차입하는 일도 잦았다. 1911년 사찰령은 사찰의 부동산과 동산을 총독의 인가 없이 마음대로 처분하지 못하게 했지만, 차금(借金)은 총독의 인가가 필요 없었던 것이다. 결국 1927년에 총독부 종교과는 사찰령의 일부 개정에 착수했고, 1929년 6월 10일에 개정안이 공포되어 7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개정된 사찰령에 따라 차금의 경우에도 총독 인가를 받게 되고, 주지가 허가 없이 사찰 재산을 양도하거나 담보로 제공하거나 사찰 재산으로 부채를 갚지 못하게 된다.

마침내 1941년 4월 23일에는 사찰령 시행규칙이 개정되면서 경성부 수송정(壽松町)의 태고사(太古寺)가 31본산을 지도 감독하는 조선불교 총본산으로 설정된다. 현 조계사의 전신인 태고사가 조선의 총 1326개 사찰과 6600여 명의 승려를 총괄 관리하는 통제 기관이 된 것이다. 사실 조선총독부는 조선 불교를 심전개발(心田開發)이라는 정신적 식민화에 동원하기 위해 일본 불교 제도를 차용하여 총본산을 설정한 것이었다. 1941년 6월 6일에는 오대산 월정사의 방한암(方漢岩) 스님이 총본산의 초대 종정(宗正)으로 선출된다. 

이미 1938년 이전부터 권상로(權相老) 같은 인물은 총본산 제도를 신설하여 조선불교를 일본 불교에 편입시키고 일본 불교 13종(宗)을 14종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불교의 식민화는 불교 앞에 놓여 있던 어떤 다른 근대적 가능성을 억압했던 것일까?

이창익 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연구교수 changyick@gmail.com

[1717호 / 2024년 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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