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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자은사-기러기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

기자명 오동환

중생 구제와 애민의 마음 깃든 대안탑

현장법사 인도서 가져온 경전·불상 봉안…역경·중국불교 중심
‘기러기로 변한 보살’ 상징탑으로 대승의 중생 구제 원력 대변
탑 중수 후 장안 대표 명물로…시인 두보도 탑에 올라 시 읊어

대안탑에서 바라본 장안 전경(2009년). 아직 도시 정비가 진행중인 시기라 시야를 가리는 고층빌딩이 덜 보인다. 두보가 바라본 그날의 장안도 안개로 경계가 불분명 했을까.
대안탑에서 바라본 장안 전경(2009년). 아직 도시 정비가 진행중인 시기라 시야를 가리는 고층빌딩이 덜 보인다. 두보가 바라본 그날의 장안도 안개로 경계가 불분명 했을까.

당나라 정관 22년(648)에 태자 이치(李治, 훗날 고종)는 돌아가신 어머니 문덕황후를 추념하며 옛 절터 위에 13개 원(院)에 1897칸의 방을 갖춘 대사찰을 세웠다. 이곳이 현재에도 시안시 남부에 남아있는 대자은사이다. 사찰명을 “대자은사(大慈恩寺)”고 하였으니, 곧 자애로운 어머님의 은혜를 생각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정작 자은사의 주인공은 따로 있었다. 정관 19년(645)에 현장(玄奘) 법사가 17년간의 서역 구법을 마치고 장안에 돌아왔다. 떠날 때는 노쇠한 말 한 필에 의지한 채 혈혈단신으로 몰래 국경을 넘는 신세였지만, 돌아올 때는 20필의 말에 경전과 불상을 가득 실은 채 황제와 만백성의 환대를 받았다. 처음 홍복사에 머물던 법사는 자은사가 완공되자 곧바로 자은사의 수좌(首座)로 모셔졌다. 현장의 이동은 단순한 개인의 이동이 아니었다. 현장이 자은사로 부임할 때, 그가 가져온 범본 경전들과 사리와 불상이 화려하게 장엄되어 주작대로를 따라 함께 자은사로 옮겨졌다. 그뿐인가? 이에 따라 역경 작업에 동참하기 위해 전국에서 모여든 고승대덕들 역시 자은사로 다시 집결하였다. 당시 자은사는 명실공히 역경의 중심이자 중국불교의 중심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현장법사는 그가 번역한 총 75부의 경전 중 33부의 경전을 자은사에서 역출하였다. 이때 그가 역경에 임하는 자세에는 한 치의 어긋남이 없었다. 

“법사는 자은사에서 역경에만 전념하며 잠시의 시간도 헛되이 버리지 않았다. 매일 그날의 과제를 정해 놓고, 만약 낮에 일이 있어서 정해진 양을 다하지 못하면, 늦은 밤에라도 반드시 그 몫을 끝냈다. 그날의 번역 분량을 마치면 부처님께 예배하고 행도(行道)) 하였다. 법사는 3경(11시-1시) 무렵이 되면 잠깐 잠자리에 들었다가 5경(3시-5시)이면 다시 일어나서, 범본을 독송하고 그날 번역할 부분을 표시하였다.”(‘대자은사삼장법사전’) 

그 와중에도 현장은 매일같이 전국에서 찾아온 대덕들과 담론을 나누고, 수시로 황제를 알현하며, 저녁이면 어김없이 2시간씩 신역 경전을 강의하였다. 그뿐 아니라 각종 불사를 설계하고 감독하였다. 그중 하나가 바로 대안탑의 건설이다.

대안탑은 현장이 직접 황제에게 주청하여 세워졌다. 인도에서 어렵게 구해온 부처님 진신사리와 경전을 석탑에 영구히 봉안하길 원했던 것이다. 현장은 ‘석가의 고적(故迹)’ 그대로 석조탑을 짓고자 하였는데, 당시 부다가야의 마하보디 대탑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다만 중원의 자연환경상 대리석이나 화강암처럼 석조에 적합한 돌을 구하기 어려웠으므로, 석조 대신 벽돌로 탑을 쌓아 올렸다. 

탑을 쌓을 때, 현장이 몸소 삼태기를 지고 벽돌을 나른 이야기는 잘 알려졌다. 현장법사는 왜 그렇게까지 했을까? 물론 무거운 경협(經篋)을 짊어진 채 서역의 곳곳을 누비던 이력으로 현장에서 솔선수범을 보이기 위함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대안탑이라는 이름은 현장이 이 탑에 그 이상의 의미를 부여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안탑(雁塔), 즉 기러기탑이라는 명칭은 인도의 기러기탑에서 착안하였다(‘대당서역기’ 제9권). 3정육을 시행하던 소승비구가 농담으로 보살에게 고기를 구하자, 보살이 기러기로 변신하여 그 몸을 보시하였다는 탑의 유래는 중생구제를 향한 대승의 보살도를 단적으로 대변한다. 현장에게 있어 대안탑은 불보이자 법보이고, 대승보살도의 담체였던 것이다.
 

인도 파트나 근교에서 출토된 점토부조상을 근거로 복원한 현장 당시의 5층대안탑(사진 좌·by 양홍쉰). 현재의 7층대안탑. 명나라 때 중수를 거친 모습이다(사진 우).
인도 파트나 근교에서 출토된 점토부조상을 근거로 복원한 현장 당시의 5층대안탑(사진 좌·by 양홍쉰). 현재의 7층대안탑. 명나라 때 중수를 거친 모습이다(사진 우).

2년의 공사를 거쳐 마침내 높이 180척(약 53미터)의 5층탑이 세워졌다(‘대자은사삼장법사전’). 애초에 이 탑은 각각의 층마다 사리를 봉안한 스투파였으므로 당연히 이곳에 오르는 것은 금지되었다. 현장이 입적하고 측천무후가 황제로 군림하던 시절(701), 훼손된 상층부를 보수하면서 대대적인 중수작업이 진행되었다. 탑을 10층으로 확장하고, 외형을 중국의 전통적 목조건축 양식에 따라 개조하였으며, 내부에 계단을 만들어 사람들이 탑에 오를 수 있도록 한 것이다(현재의 7층탑은 다시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친 모습이다). 이때부터 대안탑은 또 다른 의미에서 장안을 대표하는 명물로 자리 잡았다. 탑에 올라 장안의 천지를 둘러본 후, 돌에 비문을 새기거나 시를 남기는 것은 당시 명사들의 ‘버킷리스트’가 되었다.

중국을 대표하는 시인 두보 역시 이 탑에 올라 시상을 떠올렸다(‘벗들과 함께 자은사탑에 올라同諸公登慈恩寺塔’, 752년). 그러나 그의 소회는 여느 문인과 같은 호방함의 발산이 아니었다. 그는 “이 몸은 마음이 넓지 못하여, 이곳에 오르니 되려 온갖 근심에 젖는다”고 털어놓는다. 무엇에 대한 근심일까?

“애석하도다 요지(瑤池)의 술잔치/ 곤륜언덕에 해가 저무네.”

주나라 목왕은 요지라는 연못에서 서왕모(西王母)를 만나 함께 술을 마시고, 옛 황제(黃帝)의 도읍인 곤륜언덕을 내려다보았다고 한다. 이 싯구에는 당시의 참담한 정치 상황이 반영된 은유가 담겨있다. 이른바 ‘개원의 치[開元之治]’라는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현종(玄宗)은 노년에 도교에 빠져 실정을 거듭하고, 급기야 며느리였던 양귀비까지 취한다. ‘요지의 술잔치’란 곧 현종이 백성을 외면한 채 화청지에서 양귀비와 노닐며 주색에 빠진 상황을 빗댄 것이다. 이때 두보는 당의 국운이 저물어감을 직감한 모양이다. 과연 3년 후에 안사의 난이 일어나고, 이를 기점으로 당은 급격히 쇠락의 길로 접어든다. 이러한 현실에서 두보는 기러기를 보고 “햇볕을 쫓아 남북을 오가는” 철새이자 “이익만 도모하는[稻粱謀]” 무리를 떠올렸다. 
이렇듯 현장과 두보는 같은 기러기를 다른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 시선에 담긴 중생과 백성을 애민하는 마음에는 다름이 없다. 두보가 탑에 올라, “이제야 불교의 힘을 깨닫고 은근히 그 뜻을 궁구하게 된다”고 읊은 뜻이 그러하리라.

오동환 중국 섬서사범대 박사과정 duggy11@naver.com

[1717호 / 2024년 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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