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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법계통화분(法界通化分 - 법계의 중생을 두루 제도함)

기자명 진우 스님

고락업 멸하고 중도심으로 살아간다면 연기는 현상일 뿐이다

중생은 고락의 분별업이라는 독화살을 맞아 고통 끝없이 반복
독화살 뽑지않고 독화살 쏜 사람과 재료를 찾다가는 결국 죽음
삼십이상팔심종호는 무위 마음 증득한 결과일 뿐 집착 말아야

일어나는 현상은 현상이고 좋고 싫은 감정은 순전히 나의 몫이며 나의 업이니 마음을 놓치지 않고 그저 관하는 습을 길러야 한다.
일어나는 현상은 현상이고 좋고 싫은 감정은 순전히 나의 몫이며 나의 업이니 마음을 놓치지 않고 그저 관하는 습을 길러야 한다.

수보리 어의운하 약유인 만삼천대천세계칠보 이용보시 시인 이시인연 득복다부(須菩提 於意云何 若有人 滿三千大千世界七寶 以用布施 是人 以是因緣 得福多不) 여시 세존 차인 이시인연 득복심다(如是 世尊 此人 以是因緣 得福甚多) “수보리야 네 뜻은 무엇이냐? 만약 어떤 사람이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서 보시한다면 이 사람은 이러한 인연으로 받는 복이 많지 않겠느냐?”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이러한 인연으로 받는 복이 대단히 많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애초에 마음은 없다고 하시고, 마음이라고 하면 이미 마음이 아닌  것이라고 하시었는데, 어떠한 마음이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를 지었으며, 어떠한 마음으로 무주상복덕을 얻을 것인가? 대중들이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음을 아시고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다시 물으셨다. 마음이 본래 없다고 설명을 하였음에도 혹시나 무주상, 보시, 복덕이라는 이름에 다시 또 마음이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수보리에게 물으신 것이다.

본래 마음은 무이다. 만약 내가 스스로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 마음이 생기므로 저 마음이 생기게 되니, 이를테면 1더하기 1은 2가 되는데, 이를 고락, 인과, 업이라 하고, 1빼기 1은 0이 되는데 이를 중도, 공, 적멸이라 한다. 따라서 마음이라고 하는 고락감정이라는 인과업이 없다면, 어떤 것을 보거나, 어떤 일들이 벌어져도, 혹은 무슨 말을 듣거나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게된다. 그러므로 이를 일러서 무량한 복덕이라 해도 좋고, 한량없는 보시라 해도 좋은 것이다. 

말룬키아풋타 즉 만동자라는 제자가 부처님께 묻는다. 이 세상은 누가 만들었는가? 영혼과 육체는 별개인가 하나인가? 다음 세상은 있는가 없는가? 여기에 답을 하지 못하면 떠나겠다고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되묻는다. 만약 어떤 사람이 독화살에 맞았다고 하자. 그런데 독화살을 맞은 몸을 치료하지 않고, 이 독화살을 누가 쏘았으며, 독성분은 무엇이며, 화살의 재질은 무엇인가 등등의 문제를 풀지 못하면 독화살을 치료하지 않겠다 라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독이 몸에 퍼져서 죽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 비유하자면 우리는 독화살에 맞아서 이미 독이 퍼지고 있는 형국이다. 늙고 병들고 죽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좋고 싫은 고락의 분별업이라는 독이 퍼져서 고통과 고통이 아닌 것이 반복되고 있다. 그러나 독을 제거하려는 생각보다는 어디에서 독화살이 날아왔으며 누가 쏘았으며 등등의 노력에만 몰두하고 있다. 이렇게 사람들은 욕심을 채우려고 많은 생각과 연구와 노력을 경주한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영원히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바로 본인이 원하는 것과 반대되는, 즉 원하지 않는 것이 생긴다는 사실이다. 이는 원하는 것은 그대로 놔두고 원하는 것의 그림자인 원하지 않는 것을 없애려고만 한다. 원하는 것을 없애지 않는 한, 그의 그림자는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소치다.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인연 연기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내가 간섭할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나의 고락, 업에 따라 좋다 싫다 분별하게 되니, 나의 분별심인 고락업을 멸하고 중도심으로 바꾸기만 한다면 연기의 현상만 있을 뿐이다. 좋고 싫은 고락, 분별의 감정이 있는 한, 현실의 모든 현상들은 좋고 싫은 고락 감정으로 항상 갈려질 것이다. 그러니 현상과 나의 고락 감정을 분리하는 테크닉을 배워서 현상에 끄달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고락 감정의 분별 인과업을 멸하는 것만이 독화살을 제거하고, 현실과 현상에 끄달리지 않는 중도, 적멸의 편안하고 안락한 마음을 이루게 될 것이다.
 

수보리 약복덕 유실 여래불설 득복덕다 이복덕 무고 여래설득복덕다(須菩提 若福德 有實 如來不說 得福德多 以福德 無故 如來說得福德多) 수보리야! 만일 참으로 복덕이 있는 것이라면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하지 않으시겠지만, 복덕이 없는 것이기 때문에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고 말씀하심이다.”

부처님께서 수보리로부터 대답이 나오게 하신 다음에 정면으로 그 뜻을 깨뜨리시기 위해 나온 말씀이다. 복덕이 참으로 있는 것이라면 여래께서 복덕이 많다는 말씀을 결코 하지 않았으리라. 그러나 실제로 복덕이 허망하고 없는 것이므로 많다는 말씀을 하게 된 것이다. 많다는 말은 본래 사량 할 수 있는 숫자나 수에 쓰는 말이다. 상상할 수 없거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라면 많다고 할 수 없음이니, 그래서 실제로 많다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이름하여 많다고 하심이다. 

언젠가 조그마한 사건(?)이 하나 있었다. 한 은사스님께서 계시는 대학병원을 찾아갔다. 코로나19의 방역차원에서 입구에서 절차를 거치는데 지금까지는 몇 가지 체크와 서명만 하고 들어갔으나, 오늘따라 보호자 신분증이 없으면 못 들어간다고 했다.

그럼 보호자 카드를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했더니, 업무과에 가서 작성하라고 한다. 그래서 로비에 있는 업무과를 갈려면 통과를 시켜줘야 하는데 마지막에 서있는 경비가 보호자카드가 있어야 들어간다고 기어코 제지를 한다. 헛웃음이 나왔다. 무슨 이런 경우가 있냐며 몇 마디 오고 가다가 작정을 하고 모두가 들을 만큼 큰소리를 질렀다. 이 대목에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경각을 일으키게 하는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결국 간병인에게 전화를 해서 보호자 신분증을 교환하고 들어갔으나, 경비 용역을 준 사람이 전후 절차는 잘 모르고 신분증만이 있어야 한다는 지침만으로 수행하다 보니 그렇게 됐다는 병원 관계자의 설명을 듣고 그냥 돌아오는 해프닝이 있었다.

왜 이런 장황한 얘기를 하냐 하면, 어떤 사안이 벌어졌을 때의 감정을 말하고자 함이다. 이미 설명했듯이 그냥 조용히 넘어갈 수도 있었으나 의도적으로 화를 내는 척 소리를 왜 질렀을까? 이는 선택의 대목이다. 그렇게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문제는 정말 화가 났느냐 또는 마음은 평화로운데 액션만 취했느냐이다. 이런 일들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다반사들이다. 여기서 충분히 잘잘못을 따질 수는 있으나, 절대로 평정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화를 내거나 속상해할 필요도 없다. 좋고 싫은 고락의 감정은 어디까지나 나의 몫이고 나의 업이다.

어느 대목에서 발단이 되었는지 그 원인을 짐작할 수는 있겠으나, 넓게 보면 원인의 원인이 또 있을 것이므로, 굳이 눈에 보이는 원인에만 집착하여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다면 근본 문제는 영영 풀어지지 않는다. 근본 문제는 내가 화를 내고 있는가? 그래서 속이 상한가? 감정이 흔들리는가? 그렇다면 나의 괴로운 고업이 나타날 인과의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일어나는 현상들은 연기에 따라 이렇게도 저렇게도 나타날 수 있다.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내가 없거나 삼라만상이 없어야 한다. 말이 안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현상에 끄달리는 나의 고락업이 원인 중의 원인이므로, 나의 고락 감정을 다스리는 것만이 근본 문제를 풀 수가 있다는 말이다. 어쨌든 일어나는 현상은 현상이고, 이를 대하는 나의 좋고 싫은 고락의 감정은 순전히 나의 몫, 나의 업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이든 현상에 끄달리지 말고 연기하는 모습인 줄만 알아서, 절대로 절대로 감정을 일으키지 말며, 마음을 항상 놓치지 말고 관하는 습을 길러야, 인과업이 사라지고 괴로운 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이색이상분(離色離相分 - 색과 상을 여읨)

수보리 어의운하 불가이구족색신견부 불야 세존 여래 불응이구족색신견(須菩提 於意云何 佛可以具足色身見不 不也 世尊 如來 不應以具足色身見) “수보리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님을 완전한 형상의 몸으로 볼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를 완전히 갖추어진 형상의 몸으로 볼 수 없습니다.

대중은 다시 의심이 생기었다. 부처님께서는 중생과 불국토가 모두 공하여 오직 마음이라 하셨고, 보시와 공덕이 공하여 이 또한 마음이라 하셨으며, 그 마음마저도 없다고 하셨다. 그러니 중생과 불국토와 보시와 공덕을 모두 멸도하심에 이 모든 것을 깨친 공덕까지도 실제에는 없음이니, 그러나 이는 곧 중생심으로 보기에는 여래의 복덕으로 나타나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중생의 마음으로 보기에는, 부처님께서 가지신 색신이 구족하시고, 이는 곧 복의 과보이며, 다함이 없는 마음을 증득하셨으니 이러한 법신이 삼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로 나타나 보임이다. 또 삼십이상은 무로서 유를 얻으심이고, 무위심으로 증득하신지라, 부처님의 몸도 필경 무위여야 할 것이거늘, 구족한 모든 상호가 여래의 말씀과 어긋나지 않는다면, 실지의 복보는 따로 있는 모양이라 하여 대중은 여래의 복보에 대하여 의심이 생긴 것이다. 이를 아신 여래께서 수보리에게 물으시니, 구족한 색신이 색신과 구족이 아닌 줄을 잊었느냐? 하시는 암시를 보이신 것임이다. 

수보리는 여래의 뜻을 알고 응당 볼 수 없다고 답을 하였다. 결국 중생의 입장에서 여래를 볼 때, 삼십이상 팔십종호의 완전한 색신의 몸으로 보는 것은 착각이라는 말씀이다. 이러한 환희심은 무한한 감동을 느낄 수는 있으나, 이는 완전한 색신의 몸이 아닌 것을 바탕으로 보는 상대적인 견해이므로, 이는 좋고 싫은 고락의 인과에 걸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그냥 여여하고 여시하게 보는 중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깨우치게 하심이다. 어떤 현상을 보더라도, 그 어떤 일을 만나더라도, 마음이 흔들리면 안 될 것이다. 즐거운 낙업이나, 괴로운 고업은 어디까지나 나의 분별업이므로, 이를 반복하게 되면, 늘 좋고 싫은 고락의 인과가 계속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좋고 싫은 고락 분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힘이 들면 기도와 보시로서 정진하라.

진우 스님 조계종 총무원장 sansng@hanmail.net

[1717호 / 2024년 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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