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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진(아율·46) 위빠사나수행 - 하

기자명 법보

수행공동체 1년간 정진하며
버리고 떠나는 삶 온몸 실감
가르침 번역하며 은혜 보답
수많은 존재 자비 수혜 받길

태국 아잔 차 스님 전통의 아잔 브람 스님의 제자이면서 테라와다의 비구니를 부활하는 데 큰 관심을 갖고 있던 반테 수자토 스님을 집 근처 커뮤니티 센터에서 만났다. 스님은 자애명상을 가르쳐 주셨고 일상적이거나 심리적인 다양한 질문들을 환영하며 초기불교적 관점으로 답해 주셨다. 내게는 너무나 큰 환희심으로 다가왔다.

당시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다가 점심시간이 되면 밥도 대충 먹고 아이들을 피해 식탁 밑에 들어가 명상을 할 정도였다. 한 번은 너무 강렬한 환희심 때문에 잠도 못자고 몸 주변이 커다란 타이어 같은 것에 둘러쌓인 것 같은 황홀경에 며칠간 빠져 있기도 했다. 자연스럽게 반테 수자토 스님의 절에 8계 수행자(아나가리카)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1년 간 초기불교의 경전과 율장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 숲 속에 위치한 절이었는데, 전기나 물도 없는 꾸띠에서 자연을 화장실 삼아 지냈다. 보시된 음식들로 식사를 하고 직접 길을 내고 장작을 팼다. 동굴 안에서 법문을 듣고 철야정진도 하고 개인 안거 때에는 돌아가며 공양을 챙겨주는 환경이었다. 아잔 브람 스님의 아나빠나사띠 수행을 중심으로 사마타를 닦았다. 경전에서 ‘버리고 떠나는 삶’이 마음을 해방시키는 데 왜 중요한지 실감하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사마타 수행을 하면서도 한 켠에 가지고 있던 쉐우민의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에 대한 궁금증이나 필요성은 더 커져만 갔다. 아마 공동체 생활이 준 도전들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마음의 번뇌들이 직접 대상이 되는 수행과 그 가르침에 대한 갈증으로 미얀마로 옮겨가 그 쪽 전통의 수행들을 하기 시작했다. 주로 쉐우민과 빤디따라마 센터들의 위빠사나 수행처에서 수행을 했는데, 사마타를 계발하고 싶을 때는 파욱 전통의 레와따 반테께 수행을 배우기도 했다. 수행 경험을 통해 경전이나 주석의 개념들이 알아지는 너무나 감사하고 소중한 시간들이었다. 

희한하게 불교의 스승과 법들은 우연히 다가왔다. 2018년 호주 이민생활을 접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잠시 심리치료 교육이 있어 몇 주간 호주를 방문해야 했다. 아날라요 스님에 대해서는 이전에 논문을 쓰던 시기에 우연히 사띠파타나에 관한 책을 보고 가르침을 받고 싶다는 생각 정도만 했었는데, 그 심리치료 교육 때문에 잠시 들른 도서관에서 아날라요 스님이 안거수행을 지도하신다는 말을 얼핏 엿들었다. 한국 일정이 바빠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한시간 좌선을 하고 나왔는데 갑자기 일정과 장소를 확인해봐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놀랍게도 아날라요 스님은 내 심리치료 교육이 있는 지방에서 기차로 두 정거장 거리에 계셨다. 게다가 심리치료가 끝난 바로 다음날이었다. 그렇게 아날라요 스님을 만나 가르침을 받는 일주일 간, 나는 매일같이 질문들을 쏟아냈고 그 간에 가졌던 의문과 의심들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었다.

나는 주석서의 통찰 지혜 16단계의 체험이나 수다원이 되는 수행 체험에 대해서는 수행을 할수록 의문점들이 생겼다. 수행체험에 대한 설명은 그저 신비주의처럼 느껴졌다. 어떤 체험이 실존한다고 믿는 마음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의 변형’이라는 심리학적 기대치 때문이었을까. 심리치료를 업으로 하고 있는 사람으로서 마음의 번뇌가 관계성을 통해 드러나는 방식들에 대해서는 나름 어느 정도 눈썰미가 있었다. 그리고 이건 나에게 불교 수행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였기 때문에 매우 중요했다.

이러한 의문에 대해 아날라요 스님은 아주 상식적인 답을 주셨다. 그리고 마음의 혼란들을 순식간에 조용하게 만들어주셨다. 수행의 척도는 명상적 체험이 아니라 ‘그 사람의 화가 얼마나 줄었는가’ ‘타인들과 관계성에서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자비로운가’ ‘애착이 없는가’ 등으로 볼 수 있다고. 쉐우민 사야도의 법문도 그랬듯, 이 수행은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아날라요 스님은 그 길을 매우 섬세하고 구체적으로 펼치셨다. 나는 이제 아날라요 스님의 안거수행 지도를 번역하며 그간의 스승들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고 있다. 삶에서 나를 고집하지 않을 수 있기를 발원하며, 나 자신과 많은 존재들이 그 자비의 진정한 수혜자가 되기를 기원한다. 

[1717호 / 2024년 2월 21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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