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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종로 원각사지-상

기자명 임석규

세조 10년, 도성 한가운데 ‘원각사’ 창건되다

조선, 성리학 이념삼아 건국했지만 100년 간 도성 내 사찰 존재
회암사서 효령대군 상서로운 일 경험 계기로 원각사 창건 첫 삽 
대종·백옥 불상·10층 석탑 등 조선 초 전국 최고 사찰로 자리해

1968년 원각사지 전경사진. 
1968년 원각사지 전경사진. 

조선은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아 건국되었기 때문에 불교계는 초기부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전대에 비해 국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는 사찰이 크게 줄었고, 국가에서 실시하던 의례에서 불교의 역할도 축소되었다. 출가 승려의 자격을 국가가 인정해 주는 도첩제를 강화하여 전국 공인사찰 및 승려 수를 제한하였다. 그리고 태종 대에 11종에서 7종으로 강제폐합하였던 불교 종파를 세종 6년(1424)에는 다시 선종과 교종으로 합병하였다. 이러한 억제책으로 인해 당연히 불교계는 위축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앞선 왕조 고려의 보편적 사상이었던 불교를 이단으로 배격하고 성리학 위주의 사회를 건설하기까지는 꽤 오랜 세월이 걸렸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물론 정종, 세종, 세조 등 국왕들은 직접 자신은 호불(好佛)이라고 언급했을 정도로 건국 초 불교에 대한 믿음은 쉽사리 사그라들지 않았다.

태조는 조선 건국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한양천도를 결정하였다. 새로운 국가 조선의 조직과 관직 제도는 유교 경전 ‘주례’의 원칙에 따라 다시 구축되었다. 한양에는 성리학자들의 구상대로 궁궐, 종묘, 도로, 관청, 가옥, 시장 등이 구획·건설되었다. 이렇게 유교국가의 건설은 차질없이 진행되는 듯 보였으나 한편에서는 그들이 전혀 생각지도 않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바로 사찰이 태조 이성계의 뜻에 따라 건립되고 있었다. 태조는 건국 세력이 갖고 있는 성리학에 대한 신념을 존중했고, 현실 정치에서 유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데에도 입장을 같이했다. 그러나 불교를 배척하는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조는 천도 후 한양 도성 내에 흥천사, 지천사, 흥복사 등 사찰을 새로 건립했다. 재천도 후 1407년(태종 7)에는 태상왕으로서 흥덕사도 창건했다. 이후 지천사 외 3개의 사찰은 성쇠를 거듭하지만 연산군 때까지 존속했다. 즉, 조선이 건국됐지만 약 100년 간 도성 안에 사찰이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흥복사의 위치에 대해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에는 “원각사(圓覺寺)는 중부 경행방(慶幸坊)에 있는데, 예전 이름은 흥복(興福)이다. 태조 때에 조계종 본사가 되었으며, 후에 절을 폐지하여 관청을 삼았다. 세조 10년에 고쳐 짓고 원각사라 이름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곳에는 현재 1919년 3·1 독립항쟁의 서막을 열었던 사적 서울 종로 탑골공원이 들어서 있다. 

이 흥복사는 흥천사, 흥덕사와 함께 태조·태종조에 걸쳐 기우제를 올리던 곳이다. 세종 4년(1422)에는 흉년과 기근이 심하게 들자 흥복사에 진제소(賑濟所)를 설치하여 걸식하는 백성들을 구휼하기도 했다. 세종 11년(1429)에는 흥복사의 터가 광활하고 지세도 고르니 여기에다 외국사신을 맞는 태평관을 옮겨 짓자는 논의 등이 있는 것으로 봐서 이미 세종 때에는 폐사되고 용도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세조실록’에는 빈집이 된지 40년이 넘은 흥복사 재건의 배경으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근일에 효령대군(1396-1486)이 회암사에서 원각법회를 베푸니 여래가 그 모습을 드러내고 감로가 내렸다. 황색가사를 입은 승려 3인이 탑을 둘러싸고 정근하는데 그 빛이 번개와 같고, 또 빛이 대낮처럼 환하였으며 여러 색의 안개가 공중에 가득하였다. 사리분신이 수백 개였는데 곧 그 사리를 함원전에 공양하니 또 분신이 수십 매였다. 이와 같은 기이한 상서는 실로 만나기 어려운 일이므로 다시 흥복사를 세워서 원각사로 삼고자 한다”고 되어 있다. 
 

원각사지 대원각사비(1940년대 추정)(좌) [서울역사아카이브]. 원각사지 현재 전경(우). 

원각사의 창건은 효령대군이 경험한 기이하고 상서로운 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세조는 왕세자와 효령대군 그리고 여러 대군 및 조정 대신들과 원각사 창건에 관해 의논했고, 효령대군이 사찰 조성도감의 도제조가 되었다. 그리고 세조 10년(1464) 5월에 흥복사 재건 아니 원각사 창건의 첫 삽을 뜨게 된다. 조선왕조에서 유일하게 불교를 적극 후원한  세조의 원찰 원각사는 이렇게 등장한다.

원각사 가람의 전체 규모나 자세한 구조는 알 수 없지만 공사 초기부터 군사 2100여 명이 동원되었고, 주변의 민가도 2백 채나 철거하였다. 연못도 팠으며, 법당을 덮는 청기와는 8만 장이 소요되었다. 이듬해 세조11년(1465) 4월에는 총 11개월의 공사 끝에 함원전, 광명전, 해장전, 운뢰각 등의 전각으로 구성된 원각사가 완공되었다. 

세조는 4월 7일에 낙성을 축하하는 경찬회를 열었다. 이 경찬회에는 128인의 승려가 초대되어 한글로 번역된 ‘원각수다라료의경(圓覺修多羅了義經)’을 열람했으며 이들 외에도 2만 여명의 승려가 모여 외호승 역할을 했다. 경찬회 이틀째인 4월 초파일은 연등회가 있는 날이었으니 그 축제의 열기는 요즘 부처님오신날 종로 일대에서 봉행하는 연등회 열기만큼 뜨거웠을 것이다. 세조 때에는 국가에서 연등회 참여를 적극 독려했는데 등을 달지 않는 자는 처벌을 할 정도였다. 행사는 5일 동안 치러졌고 마지막 날인 4월 11일에 참여자들에게 세조가 지은 계문(契文)을 나눠줬다. 이 계문은 원각사 경찬회에 참여한 이들에게 나눠준 동참원문 같은 문서다. 내용은 원각경 내용처럼 누구나 성불할수 있으니 망상과 미혹을 일으키지 말라는 경계의 내용이다. 

이 경찬회에 초대된 128인의 승려들이 다같이 읽은 언해본 ‘원각경’은 세조가 꾸준히 진행한 불경 한글화 사업의 대표적인 성과물이었다. 세조는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한문불서를 지속적으로 한글화하였는데 1462년의 ‘능엄경’ , 1463년 ‘법화경’, 1464년 ‘금강경’과 ‘아미타경’, ‘반야심경’에 이어 1465년 ‘원각경’까지 언해를 완결하였다. 원각사라는 명칭도 원각경에서 비롯된 것이며, 세조는 원각경을 최상의 법문으로 보았다. 

낙성식이 열린 1년 뒤인 12년(1466) 7월 15일에 백옥 불상을 완성하고 함원전에 맞아들여 점안 법회를 거행하였다. 10층 석탑은 세조 13년(1467) 4월 8일에 완성하고 연등회로 낙성행사를 거행하였다. 이렇게 원각사는 세조 10년(1464) 5월에서 13년(1467) 4월까지 만3년에 걸쳐 대종(大鐘), 백옥 불상, 10층 석탑을 구비한 조선초 국중(國中) 최고의 사찰로 탄생하였다. ‘원각사비(圓覺寺碑)’의 비명(碑銘)은 세조 때 명문장가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지었다.  

그런데 세조는 왜 굳이 도성 한가운데,  민가 200여 채를 철거하면서까지 원각사를 건립한 것일까? 세조의 원각사 창건은 효령대군이 회암사에서 경험한 상서로운 이적을 증명하는 것 말고 또 다른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수석연구관 noalin@daum.net

[1718호 / 2024년 2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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