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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3대 전국비구니회장 광용 스님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선택 출가! ‘무한 자긍심’ 품고 전법 하라

동생들과의 사별 아픔
‘생사 원천’ 사유·사색

“평생 끝나지 않을 공부”
한 마디에 ‘출가 단행’

불영사 용소서 익사 위기
관음보살 가피로 벗어나

‘만법귀일’ 화두 들고 정진
“생사는 멀리 있지 않아”

이 땅에 불음 전파·실현
숭고한 이상 늘 새겨야

현대는 위로·인정의 시대
아픈 사람의 말 경청해야

파키스탄 순례 때의 한 컷. 전국비구니회장 광용 스님은 “스님이라면 어디에서든 늘 당당해야 한다”며 “승복 입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라는 자긍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추위와 더위, 굶주림, 갈증, 바람, 그리고 뜨거운 햇볕과 쇠파리와 뱀, 이러한 모든 것을 이겨내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숫타니파타’ 법정 스님 옮김)

겨울이면 늘 아팠다. 살 깊숙이 숨어 있다가 차디찬 바람이 새어 들어가면 어느 틈엔가 ‘그놈’이 튀어나와서는 손가락, 발가락, 귀, 코, 뺨 등의 연조직을 얼어붙게 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른다. ‘나’라는 의식을 명료하게 갖기 시작했을 때부터 동상(凍傷) 통증을 느꼈으니 아주 어렸을 적부터 아팠더랬다. 여름에는 학질을 달고 살아 몸은 늘 뜨거웠고 연신 땀을 흘려야 했다. 

고통도 누군가와 대화를 통해 나누면 덜어진다는 선생님 말씀은 거짓말 같았다. 친구들과 걷던 길도 어느새 홀로 걸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우정, 활기, 즐거움이라는 단어는 점차 사라지고 그 자리에 이별, 우울, 괴로움이 들어앉았다. 

어머니가 그렇게 슬퍼 보인 적은 없었다. 세 딸에 이어 태어난 귀한 남동생들이 연이어 생을 달리했을 때였다. 어린 동생들과의 사별은 우울감이나 동상 통증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 쓰라림을 꾹꾹 삭이다가 생사의 원천을 스스로에 물었다. 긴 사유의 끝자락에서도 그 자문은 풀지 못했다. 
 

광용 스님이 창건한 서울 마포 성림사. 
광용 스님이 창건한 서울 마포 성림사. 

어느 날 외가의 먼 친척 되는 분이 찾아왔다. 스님이었는데 산중 생활을 맛깔스럽게 풀어갔다. 불현듯 물었다.

“저도 스님 될 수 있나요?”
“그럼, 할 수 있지.”
“스님이 되면 무엇을 하나요?”
“선업을 지을 수 있고 공부도 할 수 있지. 평생 해도 끝나지 않을 공부.”

‘끝나지 않을 공부!’ 그게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몰랐으나 켜켜이 얼어붙은 마음을 산산조각 냈다. 그길로 스님을 따라 울진 불영사 산문을 열고 삭발염의했다. 행자 생활을 마친 후 부천 소림사에서 지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했다.(1972) 제13대 전국비구니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광용(廣鎔) 스님이다.

법당에 올려진 찻물이 얼 정도로 불영사의 새벽은 차가웠다. 새벽예불을 올리고 전각을 참배하는 내내 시린 냉기가 옷섶을 파고들었고, 장갑도 마땅치 않아 맨손으로 차가운 물에 설거지했다. 동상이 두려웠을 터인데 어찌 이겨냈을까?

“행자에게 주어진 일이 좀 많은 가요. 동상이 생겼는지 안 생겼는지 챙겨볼 틈도 없이 일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몸을 찬찬히 살펴보니 멀쩡해요. ‘와. 동상이 똑 떨어졌네!’ 참 신기했지요. 그 이후로 동상은 안 걸려요.”

처음 뵈는 스님들이었으나 낯설지 않았다. 산에 가 나무를 해오고, 하루 종일 풀밭을 매어도 고역으로 느낀 적은 없다. 생일이 초파일 전날이니 ‘일복’은 타고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제 생일은 초파일입니다. 성현과 생일이 같으면 팔자가 사나울 수 있다고 우려한 어머니가 하루 앞당긴 겁니다. 산사는 그저 오래전부터 살아온 내 집 같았어요. 출가 전에는 유행가 가사 하나 제대로 못 외웠는데 염불은 금방 외울 뿐 아니라 다섯시간을 염송해도 즐거웠습니다.” 

평소 주력한 염불이 ‘관세음보살’이었는데 가피도 입었다.
 

미얀마 쉐다곤 탑전을 순례하고 있다.
미얀마 쉐다곤 탑전을 순례하고 있다.

“수영을 좀 배우고는 겁도 없이 불영계곡의 용소(龍沼)에 뛰어들었어요. 소용돌이치는 물길이 금세 저를 빨아들였습니다. 두어 번 올랐다 가라앉았다가를 반복하던 중 정말 익사할 것 같아 비명을 지르듯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을 불렀습니다. 그 순간 제 발바닥이 물속 바위에 자석처럼 ‘착’ 달라붙는 겁니다. 이때다 싶어 그 바위를 힘차게 차고는 필사적으로 팔을 휘저어 빠져나왔습니다. 물 밖 큰 바위에 앉아 합장한 채 한없이 하늘을 올려보았습니다.” 

‘관세음보살’ 정근에 매진했던 스님은 봉녕사 승가대학 수학 때부터 화두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를 들었다.

“동국대 이사장을 역임하신 영암(전 조계종 총무원장) 큰스님이 오셔서 열 바로 아래는 무엇이냐 물으셔서 아홉이라 답했고, 둘 바로 아래는 무엇이냐 물으셔서 하나라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만법은 하나로 돌아가는데 그 하나는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부터 화두를 들었습니다.”

화두를 들면서 신체에 변화가 생겼다.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고, 잠자지 않아도 피곤한 줄 몰랐다. 포행이라도 나서면 축지법이라도 한 것처럼 순식간에 공간을 이동한 듯했다. 묘엄(妙嚴·1931∼2011. 전 봉녕사 승가대학장) 큰스님을 친견해 전후 상황을 고했다.

“고귀한 말씀을 전해 주셨습니다. ‘발심한 건 알겠다. 지금은 무거운 경전을 배우지만 10년, 100년을 공부하는 건 아니다. 교육 과정을 모두 마치고 가벼운 경전을 공부하여라.’” 

무거운 경전이란 교학이요, 가벼운 경전이란 선일 터다. 일정한 교리연구를 마치고 선에 매진하라는 사교입선(捨敎入禪) 지침을 내려주었음이다.
 

전국비구니회관·법룡사 전경.
전국비구니회관·법룡사 전경.

젊은 혈기에 정진을 서두르다 마(魔)를 부르고 말았다. 체중이 가벼워지고 머리가 더 맑아지면 공부 진전도 빠를 것이라 여기고 채식 위주의 생식을 시작했고 단식까지 단행했다. 몸에 무리가 오더니 허리를 다치고 말았다. 

“부처님 당시에 소나라는 비구가 있었습니다. 밤에도 잠들지 않고 열심히 정진했지만 깨치지 못했습니다. ‘환속해 재가자로 살면서 복이라도 짓는 게 나을 것’이라 생각했지요. 부처님께서 소나를 불러 물었습니다. ‘거문고를 타본 일이 있느냐?’ ‘네, 그렇습니다.’ ‘그 줄을 너무 죄면 소리가 어떻더냐?’ ‘소리가 끊어집니다.’ ‘너무 늦추면 소리가 어떻더냐?’ ‘소리가 나지 않습니다. 줄을 적당히 조화롭게 죄고 풀어야 좋은 소리가 나옵니다.’ ‘그렇다. 정진도 그리 해야 한다.’ 수행도 서두르면 들떠서 병이 나기 쉽고, 느슨하면 게을러진다는 걸 그때 절감했습니다.” 

몸을 추스른 후 불영사와 내원사 선원에 입방해 본격적으로 참선 수행에 매진했다.(1982) 
서울 마포에 세운 성림사를 상좌에게 물려준 광용 스님은 이례적으로 창건주 권한까지 넘겨주었다. 상좌는 “아직 이르다”라며 한사코사양했으나 은사의 깊은 뜻을 꺾을 수는 없었다.
“더 큰 자유를 누리고 싶었습니다.” 

화계사와 안국선원에서의 철야 정진은 지금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수승했다. 위빠사나 명상센터 호두마을에 작은 ‘꾸띠’를 마련해 정진할 정도로 간화선 외의 수행에도 관심이 깊다.

“미얀마의 아신 빤딧짜 스님이 호두마을에서 전한 법문이 생생합니다. 부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결제 중에 어떻게 수행했는가?’ ‘저는 가까운 마을만 다니며 걸식하고 그 외에는 두문불출 사원에만 머무르며 정진했습니다.’ ‘저는 사원 밖을 나간 적이 없습니다. 도반들이 공양하고 남긴 음식을 먹으며 정진했습니다.’ 다음 대답이 참 일품입니다. ‘저는 제 몸 밖을 나간 적이 없습니다.’”

2019년 마포구청 대강당에서 열린 ‘혜민 스님과 함께하는 마음치유 콘서트’에서 광용 스님은 “때로는 백 마디 법문보다 10분간의 경청이 상대에게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불교상담심리사 1급 자격을 취득한 스님의 일언이기에 인상 깊다.

“자신감은 높으나 자존감 낮은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스펙(SPEC)이 좋을수록 심리적 불안에 고통받는 사람도 많습니다. 치열한 경쟁 사회가 낳은 부작용 중의 하나입니다. 그 사람의 말을 따듯하게 들어줘야 합니다. 그 사람 자체가 우주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임을 인정해 줘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람 곁에 우리가 함께 있음을 일깨워줘야 합니다. 이전의 시대가 ‘감정의 시대’라고 한다면 지금은 ‘위로·인정의 시대’라고 봅니다.” 

대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고 해도 시절 인연이 닿으면 사판의 일도 챙겨야 하는 법이다. 제12대 전국비구니회장 선거에 나선 본각(本覺·제12대 전국비구니회장. 중앙승가대 명예교수) 스님을 도우며 부회장을 맡았고, 2023년 9월 제13대 전국비구니회장에 당선됐다. 취임 직후 첫 일성으로 화합과 신뢰, 도약을 천명했다.

“본각 스님 집행부가 고민해 세운 원력과 불사를 이어가려 합니다. 아울러 승가나 사회가 우리를 필요로 한다면 적극적으로 참여할 겁니다. 일례로 역사·종교편향을 바로 잡는 일에는 망설임 없이 뛰어들 겁니다. 다문화 가정과 이주민 지원 등에도 좀 더 힘쓰려 합니다. 물론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벽돌 하나하나가 제대로 앉아 흔들리지 않으면 벽이 되고 집이 됩니다. 저를 비롯한 6000여 비구니스님 한 분 한 분이 주어진 일에 온 정성을 쏟으면 비구니 위상은 자연스레 한 단계 더 격상할 것이라 믿습니다.”

비구니스님의 복지 차원에서 ‘돌봄 사업’에도 역점을 두겠다고 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사회와 마찬가지로 사원도 의식주 해결에 급급했습니다. 포교를 위해 절 짓는 일에도 엄청난 공을 들여야 했습니다. 걸망 하나 편히 놓고 쉴 수 없던 시대를 걸어오신 분들이 이제 노장 스님이 되셨습니다. 수행자로서 원적에 드시는 그날까지 우리가 지켜드려야 합니다.”
 

티베트 수미산을 오르고 있다.
티베트 수미산을 오르고 있다.

젊은 날의 아린 가슴에 들어앉았던 이별과 우울, 죽음은 법랍 52년의 노정을 통해 걷어 냈을까?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역한 냄새에 코를 막기도 하지요. 손 씻고 법당에 들어서면 부처님 전에 피어오른 향 내음에 코는 물론이고 마음마저 맑아집니다. 때로는 악취를 맡아야 하는 게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현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향기로운 부처님 말씀을 이 땅에 실현 시키려는 숭고한 이상을 품고 있습니다. 그 이상을 향해 걸어가는 동안 깨우칩니다. 만남과 이별은 한순간입니다. 즐거움과 괴로움도 백지 한 장 차이입니다. 그리고 삶과 죽음은 서로  멀리 있지 않습니다.”

봉사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는 스님이지만 바람이 하나 있다고 했다.

“전국비구니회관에서 티베트 스님 초청 법회를 열면 한국 불자 100여 명이 운집합니다. 우리 스님들도 더 많이 해외로 나가 한국불교를 전했으면 좋겠습니다. 인연만 닿는다면 인재 불사에 더욱더 정성을 쏟아붓고 싶습니다. 그리고 스님이라면 늘 당당해야 합니다. 출가한 일이 인생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고, 승복 입은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라는 무한 자긍심을 품고 전법에 매진해 주었으면 합니다.”

‘여러 생에 걸친 원력의 막중함과 일찍이 심어 둔 지혜의 종자가 성숙 되어야 법의(法衣)를 입을 수 있다’고 하지 않던가. 스님이라면 지상 최고의 자부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penshoot@beopbo.com

광용 스님은
지원 스님을 은사로 득도.(1972) 봉녕사 승가대학 졸업.(1979) 동국대 불교학과 석사 수료.(2007) 성림사 창건 및 주지.(1999∼2016) 불교상담개발원 이사.(2013∼2015) 현재 성림사 회주, 봉녕사 묘엄불교문화재단 이사, 제13대 전국비구니회장이다. 조계종 포교원 불교상담개발원 공로상과 마포구청장 문화예술부문 표창장, 마포경찰서 감사장을 수상했다.

[1718호 / 2024년 2월 28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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