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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부처님의 ‘한끼줍쇼’ : 발우의 경영학 

발우로 구현한 종교 역사상 최고의 가격 정책

지식·축복 독점하던 브라만, 왕·귀족의 비싼 공양만 받아
‘공덕 쌓을 기회 없다’ 가난한 이들 박탈감 헤아린 부처님
누구든 공양 올릴 수 있지만 발우에 담길 만큼으로 제도화

제자들과 함께 공양을 받으시는 부처님. 유명인이 보통 사람들의 집에 방문하여 식사한다는 컨셉에서 보자면 ‘한끼줍쇼’ 예능의 원조인 셈이다. 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
제자들과 함께 공양을 받으시는 부처님. 유명인이 보통 사람들의 집에 방문하여 식사한다는 컨셉에서 보자면 ‘한끼줍쇼’ 예능의 원조인 셈이다. 파키스탄 페샤와르 박물관 소장.

경영에 있어 가장 중요한 주제 중의 하나는 회사가 파는 물건의 가격을 얼마로 책정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 있어서는 종교도 예외는 아니다. 부처님 말씀이나 복음을 전파하고 그에 대해 일종의 보상을 받는 것인데 그 기준은 차이가 크다. 예를 들어 교회는 수익의 10%를 헌금으로 내는 십일조를 권장하고 있다. 불교도 보시를 권장하지만 그 금액이 엄격하게 정해져 있지는 않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들이 지식을 파는 자들이라며 비판했다는 점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마르셀 에나프의 ‘진리의 가격’(눌민, 2018)에 의하면 그는 지식은 사고팔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파는 자는 마치 대동강 물을 팔겠다고 했던 봉이 김선달 같은 사기꾼으로 본 것이다. 또한 지식은 아예 가격을 매길 수도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지식을 가르침에 있어 돈을 받지 않았다. 물론 그도 자신의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로부터 무엇인가를 받기는 했다. 다만 스승의 날에 선물을 주고받는 것처럼 가격이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지금이야 수업료가 있고 그 외에 또 선물도 받는 것이니 이중으로 받는 셈이지만, 소크라테스는 정식 수업료가 없었다. 그러므로 지식을 팔고 그 대가를 받은 것이 아니라 그저 성의만 받은 셈이다. 그래서 그는 선물의 양이 많건 적건 개의치 않고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똑같이 가르쳤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소크라테스의 입장에서 보면 공양을 받고 지식을 파는 소피스트였을까? 그렇지 않다. 부처님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의 상황에서 소피스트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브라만 사제들이었다. 원래는 브라만 사제들이 카스트의 낮은 계층에 속한 사람들의 공양도 받았었지만, 부처님 당시에는 점차 귀족화되면서 크샤트리아 같은 왕족·귀족이나 부유한 사람들의 공양만 받는 것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차라리 공양해야할 부담이 없어져서 좋아하지 않았을까 싶겠지만, 그 대신 가난한 사람들은 브라만 사제들의 축복이나 설법을 들을 기회도 함께 사라지게 된 셈이었다. 노예들은 그저 열심히 일하고, 그래서 그들의 주인인 평민들이 소득을 높여 세금을 성실하게 내면, 그 세금을 크샤트리아 귀족들이 잘 거둬서 최상위 브라만에게 공양하면 되므로, 노예나 평민은 굳이 공양할 생각을 하지 말고 그저 직분에 맞게 생산과 세금 납부에만 충실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종교 사제에 대한 공양이 큰 공덕을 가져다준다는 전통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던 인도 사람들에게 이러한 제한은 공덕을 쌓을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했다. 브라만은 단지 비싼 공양에만 가르침을 전하는 소피스트일 뿐이었다.

그런데 부처님이 나타나 가난한 사람들이나 평민들의 공양도 받으시기 시작한 것이다. 부처님께서 가난한 마을에 탁발을 하러 가시려고 하자 아난존자는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루 벌어 하루 연명하는 사람들에게까지 공양을 받는 것은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도 종교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고민을 털어놓고, 축복을 받고 위안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생각하셨기에 가난한 마을에 일부러 들어가신 것이었다. 그렇다고 왕족이나 브라만의 초대를 거부하신 것은 아니었으며, 다만 모두에게 똑같이 대하려고 하셨다. 

아마도 부처님이 처음 가난한 사람의 집 문을 두드렸을 때에 사람들은 깜짝 놀랐을 것이다. 이런 가난한 마을에 무슨 볼일이 있어 귀한 분이 오셨을까? 더구나 요즘 제일 잘 나간다는 수행자가 아니신가? 그러면서 “저희 집은 가난하여 먹을 것이 변변찮은데 성자여, 어찌 저의 집 문을 두드리십니까?”라고 반문하고는 했다. 

마치 ‘한끼줍쇼’라는 예능프로는 연상케 하는 장면이다. 사실 그 원조가 바로 부처님이다. ‘한끼줍쇼’에서 유명 연예인들은 거창한 먹을거리가 없어도 라면이나 김치만 있으면 된다며 함께 식사할 것을 부탁했다. 부처님의 발우가 바로 그런 의미였다. “어떤 음식이든 여기에 들어갈 한 끼 식사면 충분합니다.” 발우 한 그릇도 정해진 가격이라면 가격이겠지만, 그 안에 어떤 음식이 들어가는가에 따라 가격은 다를 것이기에 꼭 가격이 정해진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물건 하나에 ‘무조건 1000원’, 아니면 ‘전화 한 통에 500원’ 하는 식으로 최대한 부담 없이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저가 전략에 가깝다. 

이처럼 부처님이 제정하신 발우의 사용은 공양을 하고 싶지만 자신은 가진 것이 없어서, 혹은 얼마를 내야 할지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기준을 제공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와 반대로 브라만 사제들은 당시 대부분 값비싼 공양이 아니면 잘 움직이지 않는 속칭 ‘지식 장사꾼’이었던 셈이다.

부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로부터도 보시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만약 발우와 같은 형태로 최소 기준이 정해져 있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 가난한 사람들이 형편에 맞게 공양을 드리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왠지 이 정도 헐값의 공양을 받으실 분이 아닌데 하며 스스로 부족함을 느꼈을 것이고, 부잣집에서 상다리가 휘어지게 음식을 대접하는 모습을 보면 비교되어 오히려 부처님을 초대하는 것이 결례였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음식점에 갔는데 아주 비싼 것부터 저렴한 것까지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주머니 사정에 따라 싼 것을 주문할 때면, 공연히 남들이 비웃거나 무시하지는 않을까 조바심을 내는 것과 같다. 그러나 만약 메뉴의 가격이 다 그만그만하게 비슷하다면 훨씬 더 당당하게 저렴한 메뉴를 주문할 수 있다. 

부처님은 말로만 “가난해도 괜찮으니 설법을 들으러 오라”, “가난한 사람도 나에게 공양할 수 있다” 하신 것이 아니었다. 공양을 드릴 사람들의 기분과 마음까지 읽고, 부담을 느끼지 않게끔 한 끼 식사면 충분하다는 것을 발우라는 형태를 통해 분명하게 각인시킨 것이다. 이야말로 종교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가격 정책이 아니었을까?

주수완 우석대 경영학부 교수 indijoo@hanmail.net

[1719호 / 2024년 3월 6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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