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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학 외면은 한국불교 정체성 등지는 일

  • 사설
  • 입력 2024.03.12 15:22
  • 수정 2024.03.12 15:23
  • 호수 1720
  • 댓글 1

선학 강좌 반토막 나 ‘충격’
인재 배출·수용 환경 안 돼

승속 떠나 역량 갖춘 학자에
교수길 열어줘 인재 양성해야

조계종 종립대학인 동국대에서 학부제 전환 이후 선학 강좌 수가 반토막이 났다. 대학원 선학과에서도 문헌이나 수행법 관련 강좌는 현격히 줄고, 선을 응용하거나 선과 거리가 먼 강좌들은 대폭 늘어났다. 이런 추세라면 전통 선학 연구와의 단절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감이 증폭되고 있다. 선을 학문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종학(宗學)의 와해도 초래할 수 있다는 얘기다.

동국대 서울캠퍼스 경우 2001년부터 2009년까지 학기당 선학 강좌는 평균 9.5개였는데 2017년부터는 4.8개에 그쳤다. 와이즈캠퍼스에서의 감소세는 더 심하다. 2001년부터 2013년까지 학기당 선학 강좌는 10.5개였는데 2018년부터 2024년 1학기까지 개설된 선학 강좌는 4.1개다. 

선학 강좌가 줄어든 요인은 다양하겠으나 핵심만 짚어 보자. 우선 학생들의 청강 열기가 뜨겁지 않았다. 불교학부 체제 전환 이전에도 불교학과에 평균 30여 명이 입학할 때 선학과는 10여 명 정도였다. 대학원 진학도 선뜻 택하지 못했다. 졸업 후의 취업이 난망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계가 선학과 인재들을 품을만한 환경을 조성하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학계는 물론 교계 언론도 오래전부터 각 지역의 교구 본사와 수사찰이 원력을 갖고 선학·불학연구소 설립에 나서 줄 것을 주문했다. 전 지역의 연구소 설립은 다양한 학회 설립으로도 이어질 것이라 기대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지지부진하다. 결국 전문 인력을 충분히 배출하는 데 실패했다. 

그 결과 전국 각 지역, 전 시대의 주제를 다루지 못했다. 인물 연구에도 편중된 경향을 보였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고승 연구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선학의 폭과 깊이를 더하는 데 한계를 보인 셈이다.

선학은 물론 불교학의 발전을 더디게 한 요소가 또 하나 있다. 선학과 교수는 스님만이 할 수 있다는 불편한 사실이다. 이러한 자격 요건을 걸어야 하는 이유를 합리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떤 이유로든 재가불자를 ‘철저하게 배제’한 불합리한 조건이기 때문이다.

마조, 황벽, 임제, 조주, 경허, 만공, 동산 스님 등의 활구(活口)에 천착해 사구(死口)가 아닌 활어(活語)로 생생하게 들려주는 사람은 선(禪) 연구자다. 선종의 가르침을 궁구해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장본인 역시 선 연구자다. 사부대중은 물론 불자가 아닌 일반인에게도 선학의 문은 활짝 열려 있다. 

오래전이지만 한때 이런 풍토가 팽배한 적이 있다. 재가불자 학자가 깨달음이나 수행법에 대한 의견을 내놓으면 화두를 든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 “참선은 해 보셨나요?” “수행도 안 해보고 선어록을 논하는 건 알음알이 지식에 불과합니다.” 비약이 아니다. 학회 토론 중에 한 스님이 이와 유사한 발언을 해서 대중을 놀라게 한 적이 있다. 선(禪)은 학문이 아니다. 선의 본질과 수행 방법 등에 관한 이론이 선학(禪學)이다. 선사가 학자일 수는 있어도 학자가 선사여야만 할 이유는 없다. 당연한 얘기지만 선 또한 스님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덕진 선생이 논문 ‘현대사회와 선의 재발견’에서 언급한 일언은 의미 있다. “역사적 전환기에서 한국 선불교는 언제나 변화의 원동력이었다. 비근한 역사적 예로 신라 교학 불교의 한계를 극복하면서 전개된 나말여초의 구산선문이 있다. 신라의 승려들은 선종을 바탕으로 신라의 골품제를 비판하며, 교종의 타락성을 질타하게 된다. … 선이 언제나 불굴의 정신으로 역사를 독창적으로 바라보고 해석하고 변혁시켜왔다는 점을 상기하고, 새로운 역사적 전환기를 받아 다시금 변화의 주체이자 원동력이 되도록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선의 특성 중 하나는 고정관념을 깨는 것이다. 불합리한 조건 정도는 과감히 걷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승속을 떠나 유능한 학자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역사가 증명하듯 폐쇄는 퇴보를 부른다. 이를 간과하면 ‘거룩한 삼보의 언덕 위에 한 줄기 눈부신 동국의 빛’은 점점 약해진다. 이것은 전법의 동력을 떨어뜨린다. 21세기의 대안 사상은 선학이라 하는데 정작 한국 선학의 본류 동국대는 이를 놓치고 있는 듯해 씁쓸하다.

[1720호 / 2024년 3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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