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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71)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27)

의천, 후기 화엄학 받아들이며 전기 화엄 중심 균여 신랄하게 비판

신라와 중국, 거란의 학승들 저술 망라하면서도 균여의 저술 모두 제외
정치안정과 귀족문화 융성으로 후삼국 전란 극복 위한 화엄신앙 종말
의천이 의상과 함께 원효를 해동화엄 정통조사 받들며 화엄종은 양분 

 대각국사문집 권1 신집원종문류 서문(위),  권16 시신참학도치수조 목판본(아래) 
 대각국사문집 권1 신집원종문류 서문(위),  권16 시신참학도치수조 목판본(아래) 

앞호에서 혁련정의 ‘균여전’에서 균여(923~973)는 해당비구(海幢比丘)나 선재동자의 화신, 그의 세 살 위의 누나 수명은 덕운비구(德雲比丘)의 화신이라는 설화를 언급하였다. ‘화엄경’ 입법계품에서 선재동자가 문수보살의 가르침을 받고 찾아간 52인의 선지식 가운데서 여섯 번째로 만난 인물이 해당비구였고, 첫 번째로 만난 인물이 덕운비구였음을 보아 이들 남매가 일찍이 선재동자의 구도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였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균여의 저술들 가운데 ‘입법계품초기’ 1권이 포함되었음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또한 ‘균여전’에는 균여가 그의 누이에게 ‘입법계품’에서의 보현보살과 관음보살의 법문과 함께 ‘천수경’과 ‘신중경’을 강술하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여 보현신앙과 관음신앙 이외에도 신중신앙에 이르기까지 화엄신앙을 폭넓게 이해했음을 전해주었다. 그런데 균여가 화엄신앙의 대중화를 위하여 가장 중요시한 것은 역시 보현신앙이었다. 보현보살의 열 가지 서원 내용을 바탕으로 ‘보현행원십원가’ 11수를 향가(詞腦歌)로 지어 유포시켰던 것은 그 단적인 예였다. 이 노래는 곧바로 최행귀가 한시로 번역하여 송나라에도 전해졌는데, 한역한 연대가 광종 18년(967) 정월이었음을 보아 균여가 향가(사뇌가)를 지을 때의 나이는 45세 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균여전’제7 ‘노래를 펴서 세상을 교화시킴’의 서문에서는 이 향가를 지은 동기를 다음과 같이 자세하게 서술하였다. 

“대저 사뇌라 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놀고 즐기는 데 쓰는 도구요, 원왕이라 하는 것은 보살이 수행하는 데 줏대가 되는 것이다. 얕은 데를 지나서야 깊은 곳으로 갈 수 있고, 가까운 데서부터 시작해야 먼 곳에 다다를 수가 있는 것이다. 세속의 이치에 기대치 않고는 열등한 근기를 인도할 길이 없고, 비속한 언어에 의지하지 않고는 큰 인연을 드러낼 길이 없다. 이제 쉽게 알 수 있는 비근한 일에 의탁하여 생각하기 어려운 심원한 종지를 깨우치게 하고자 열 가지 큰 서원의 글에 의지하여 열한 마디의 거친 노래의 구를 짓노니, 뭇사람의 눈에 보이기는 극히 부끄러운 일이나 모든 부처님의 마음에는 부합되기를 바란다. 비록 지은이의 뜻을 잃고 언사가 어긋나서 성현의 미묘한 취지에 합당하지 않더라도 서문을 전하고 시구를 짓는 것은 범속한 사람들의 착한 바탕을 일깨우고자 함이니, 가볍게 웃어 염송하는 자라도 염송하는 바 소원의 인연을 맺을 것이며, 훼방하여 염송하는 자라도 염송하는 바 소원의 이익을 얻을 것이다.”

‘균여전’제7 ‘노래를 펴서 세상을 교화함’의 발문에서는 균여가 지은 ‘보현행원십원가’가 민간에 널리 유행하였고, 때로는 고질병을 치료하는 영험을 나타내기도 하였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었다. “위의 노래는 사람들 사이에 퍼져서 가끔 담벼락에 쓰여있기도 하였다. 사평군(沙坪郡)의 나필급간(那必級干)이 3년간 고질병을 앓았는데, 의술로 고쳐지지 않았다. 대사께서 가서 보시고 그 괴로워함을 가엾게 여겨 이 ‘원왕가’를 직접 구술해 주시고 항상 읽도록 권하였다. 그 뒤 어느 날 공중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다. ‘그대는 성인의 노래의 힘을 입어서 아픈 것이 반드시 나으리라’ 그 뒤 병이 곧 나았다.” 위 인용문 가운데 사평군은 오늘날 충남의 홍성 지역에 비정되는데, 균여가 자신의 고향인 황해도 황주나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홍성 지역까지 찾아가서 ‘보현행원십원가’를 구술해 주었다는 사실은 지역적으로 상당히 넓은 지역에까지 유포되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런데 ‘보현행원가’는 최행귀에 의해 한시로 번역되어 송나라에까지 전해졌는데, ‘균여전’제8 ‘노래를 한시로 번역하여 덕을 드러냄’의 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전해주고 있다. “위쪽의 노래와 한시가 만들어지자 그들은 다투어 베꼈는데, 그 가운데 한 본이 중국에 전해졌다. 송나라 군신이 보고서 말하기를, ‘이 사뇌가의 주인은 한 분의 참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 것이다’ 하고, 사신을 보내어 대사께 예를 드리도록 하였다.” 결국 귀법사에 주석하던 균여가 피신함으로써 사신과 직접 대면하는 일은 성사되지 못하였다고 하는데, 다소 과장된 이야기로서 사실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내용이지만, 송에 전해져 주목받았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한편 혁련정이 ‘균여전’을 찬술한 때는 문종 29년(1075) 1월이었는데, 균여가 입적하고 102년이 지난 뒤였고,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의 나이 21세 때였다. 그리고 혁련정에게 균여의 행적을 정리한 기록을 전해주면서 전기를 짓도록 한 인물은 ‘신중경’의 주석자(神衆經注主)인 등관승통 창운(昶雲,1031~1104)이었는데, 의천과는 경덕국사 난원(爛圓,999~1066)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사형제이면서 의천이 어릴 적에 그에게 배우기도 한 선배였다. 그러나 의천이 뒷날 화엄종을 개혁하여 영도하게 되면서는 오히려 의천의 문도로 간주되어 의천의 문도 명단에 열거되기도 하였다. 이로 보아 균여 화엄의 전통은 난원을 거쳐 창운과 의천에게 연결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의천이 송나라의 학승들과 폭넓게 교류하고, 특히 선종 2년(1085) 송나라에 구법 여행하여 진수정원(晉水淨源)에게서 새로운 화엄학을 배워온 이후에는 균여의 화엄학을 중심으로 하는 고려 화엄학의 전통을 신랄하게 비판하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고려초기 균여의 화엄학 전통은 한때 단절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균여의 ‘보현행원십원가’는 전승되지 못하였고, 창운을 거쳐 계승되던 ‘(화엄)신중경’의 전통도 끊어지게 되었다.

의천은 ‘대각국사문집’ 여러 곳에서 고려의 불교전통과 당시의 불교계 상황에 대해 비판하는 글을 남겼는데, 그 가운데 권16 ‘새로 참여한 치수(緇秀)에게 보인 글’에서는 균여의 이름을 직접 들어 신랄한 비판을 가하고 있었다. “성인의 시대와 점점 멀어지고, 게다가 변두리 지역이라서 세상에서 정도를 보기 어려우며, 학술도 사도(邪道)를 따른 나머지 마침내 우리의 도(화엄교학)가 거의 질식할 지경에 이르렀다. 내가 항상 한탄하는 것은 해동의 선대 여러 스님들이 전한 저술들이 학문이 정묘하거나 넓지 못한데다 억설이 너무 많아서 몽매한 후학들을 지도할 만한 것은 백에 한 책도 없기 때문에 성교(聖敎)를 밝은 거울로 삼아 제 마음을 비춰보지 못하고 일생동안 구구하게 남의 보배만 세고 있다. 세상의 이른바 균여·범운(梵雲)·진파(眞派)·영윤(靈潤) 등의 저술들은 학문이 정박하지도 못하면서 그 말은 문장을 이루지 못하고 이치는 변통이 없어서 우리 조사의 도를 황폐케 하고 후생들을 현혹시키는 것이 이보다 심한 것이 없다.” 

이 글에서 의천이 거명하여 비판한 인물 가운데 균여 이외 3인의 행적은 전연 확인할 수 없으나, 균여와 같은 성향의 화엄학 저술을 남긴 학승들이었을 것이다. 의천은 새로 편집한 ‘원종문류’의 서문에서도 균여의 이름을 직접 들지는 않았으나, 같은 취지의 비판을 토로하고 있었다. “여러 종파의 의학(義學)에 대해서도 미상불 논의하며 소개하도록 하였는데, 다만 지극한 이치는 그윽하고 미묘하여 여러 가지 주장이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문답할 때에 그것을 인용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더구나 근세에 이상한 것을 좋아하는 우리 종(화엄종)의 무리들이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좇아 억설이 분분함으로 마침내 조사의 현지(玄旨)가 막히어 통하기 어렵게 된 것이 10중 7,8이나 되니, 교관(敎觀)에 정통한 사람으로서 어찌 크게 탄식하지 않겠는가?”   

의천은 균여와 같은 화엄종단의 소속이면서도 직접적으로 혹독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역 삼장에 대한 장소(章疏)들의 간행 예정 목록인 ‘신편제종교장총록’ 3권을 편찬할 때에 원효를 비롯한 신라의 학승들, 그리고 중국·거란 등 동아시아 학승들의 저술들을 광범하게 망라하면서도 10부65권에 달하는 균여의 저술들은 일체 제외시켰다. 또한 화엄종의 중요한 글들을 내용별로 분류하여 새로 편집한 ‘원종문류’ 22권에서도 오늘날 22권 가운데 권1·14·22 3권만이 현존하기 때문에 확인할 수는 없으나, 혁련정의 ‘균여전’과 균여의 ‘보현행원십원가’ 등은 제외되었을 것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의천이 입적한 이후 150여 년 뒤 의천에 의해 억압받았던 균여의 법손들이 다시 대두되면서 균여의 저술들을 수습하여 ‘재조대장경’의 보유판으로 간행하였는데, 특히 ‘균여전’은 ‘석화엄교분기원통초’ 권10의 끝에 붙여 조판하였다. 원래 ‘균여전’에는 최행귀가 한역한 ‘보현행원십원가’만 수록되었었는데, 이때 이두로 쓰여진 향가를 보충하여 넣음으로서 비로소 오늘날 향가 11수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의천이 균여의 불교를 비판하고 그 저술들을 제외시킨 이유에 대해서는 별도로 구체적으로 살펴볼 기회를 갖기로 하고, 우선 양자 사이의 차이점에 대해서만 간략하게 언급하겠다. 균여는 지방의 중소호족 출신으로서 광종의 불교개혁정책에 부응하여 새로 대두한 선종의 비판에 대응하여 화엄종의 교학체계를 재정비하였는데, 특히 주력한 것은 당의 지엄과 법장, 그리고 신라의 의상의 저술들을 주석하고 강론함으로써 전기 화엄학을 재조명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교학면에서는 대승불교의 양대 주류인 중관학과 유식학을 통합하는 사상체계를 재정비하는 것이 현안의 과제가 되었고, 그 핵심적인 주제가 바로 성상융회(性相融會)의 문제였다. 그리고 신앙면에서는 후삼국시대의 전란에 대처하는 시대적인 요청에 따라 화엄신중신앙을 주목하였고, 화엄신앙의 대중화를 위해서는 보현행원신앙을 중시하였던 것으로 본다. 그런데 균여 이후 100년이 지나서 문벌귀족체제의 성립에 상응하여 불교교단은 화엄종 중심의 교종과 선문9산 중심의 선종으로 2원체제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때 왕실 출신의 의천이 등장하여 일대 불교개혁을 시도하였다. 

우선 화엄종의 개혁을 추진하면서 전기 화엄학의 단계에 머물던 균여 계통의 화엄학을 비판하고, 당의 징관과 종밀의 후기 화엄학을 새로 받아들였는데, 그 핵심적인 주제가 성상융회에서 교관병수(敎觀幷修)로 바꾸는 사상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다른 한편 선문9산의 승려들을 포섭하여 새로이 천태종 교단을 조직하는 교단의 개편을 추진하였다. 또한 신앙면에서는 정치적인 안정과 귀족문화의 융성에 상응하여 불교 전적의 수집과 간행에 주력하게 되면서 전란에 대응하는 신중신앙이나 대중교화를 위한 보현행원신앙은 더 이상의 주목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런데 균여와 의천 사이에서 특히 예민한 문제로 부각된 것은 화엄종의 조사설이었다. 의천은 인도·중국의 화엄종의 조사로서 9조(馬鳴·龍樹·天親·佛陀·光統·帝心·雲華·賢首·淸凉)를 추앙하는 새로운 조사설을 제창하였고, 신라의 화엄종의 조사로서 의상과 함께 원효를 새로 추가함으로써 균여 계통의 조사설과 갈등하게 되었다. ‘균여전’에서는 화엄종의 정통조사로서 인도의 용수, 신라의 의상, 그리고 고려의 균여 등 3인을 꼽음으로써 의상과 균여를 특히 추양하였는데, 의천이 원효를 화엄종의 정통조사로서 새로 받들게 됨으로써 이후 고려의 화엄종은 의상만을 조사로 받드는 균여 계통의 부석종(浮石宗)=의지종(義持宗), 그리고 의상에 더하여 원효를 함께 정통조사로 받드는 의천 계통의 분황종(芬皇宗)=해동종(海東宗)으로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720호 / 2024년 3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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