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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로 원각사지-중

기자명 임석규

세조가 도성 한가운데 ‘원각사’ 세운 이유는?

세조, 왕위찬탈에 많은 희생…명분·정통성 잃은 죄책감 시달려
경천사지석탑 모방한 원각사 10층석탑 건립 등 숭불군주로 거듭
피의 군주로 왕위 오른 아소카왕도 전쟁 참회하며 불교에 귀의

1) 원각사지 10층석탑 [불교문화재연구소] 2) 경천사지 10층석탑 3) 바이살리 스투파와 아소카 석주 
1) 원각사지 10층석탑 [불교문화재연구소] 2) 경천사지 10층석탑 3) 바이살리 스투파와 아소카 석주 

조카인 단종의 왕위를 탐한 숙부 수양대군은 1453년(단종1년) 계유정난을 일으킨다. 단종을 지지했던 세력을 대거 숙청하는 작업이 시작된 것이다. 단종의 가장 든든한 신하 김종서는 철퇴에 맞아 쓰러졌고, 영의정 황보인도 피살되었다. 그리고 의정부의 수많은 대신들도 피살되거나 축출당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수양대군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기반을 다지게 된다. 1455년(단종3년) 9월에는 스스로 왕위에 오르니 조선의 7대왕 세조이다. 세조의 왕위찬탈에는 많은 이들의 희생이 따랐다. 성삼문 등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 처형당한 사육신을 비롯해 수많은 대역죄인과 그의 가족들은 죽임을 당하거나 노비가 되었다. 왕족 간에는 골육상잔이 벌어졌다. 세조는 친동생 안평대군과 금성대군에게 사약을 내렸고, 조카 단종도 영월로 유배보낸 뒤 나중에 사약을 내렸다. 

이렇게 유혈정변을 일으켜 집권한 세조는 즉위 10년(1464)을 맞이하여 도성 한복판에서 원각사 창건 공사를 일으키고 1467년에는 백색 대리석으로 높이 12m나 되는 불탑을 세웠다. 이 탑은 성리학자들의 유교적 이상을 질서정연하게 구현한 한성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세조는 왜 도성 한복판에 즉위 10년을 기념하는 정치적 상징물로 불탑을 세웠을까? 

조선시대 조성된 석탑 중 가장 크고 화려한 원각사 10층석탑의 직접적인 모델은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세워진 개성 경천사지 10층석탑이다. 두 석탑은 모두 일반 석탑과는 달리 기단부가 3층으로 구성되었으며 평면형태는 亞자형 혹은 사면돌출형에 가깝다. 기단이 3층이고 탑신이 10층이므로 13층석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1층 기단에는 용·사자·목단·연화문 등이 있고, 2층 기단에는 삼장법사와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일행이 인도에서 불법을 구해오는 서유기의 내용을 새겨놓았다. 3층 기단에는 나한상이 조각되어 있다. 탑신부의 각 면에는 설법하는 불(佛)·보살(菩薩)·천인상(天人像) 등이 조각되어 있다. 

개성 경천사지 석탑은 원 황실과 고려 왕실의 복을 빌고자 세운 것이지만, 조선 건국 직후 이성계가 아버지 환조의 진영을 경천사에 봉안하고 자주 참배하면서, 경천사는 조선 왕실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 유혈 정변을 통하여 즉위한 세조는 재위기간 동안 강력한 왕권을 행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신하와 가족을 살해하고 명분과 정통성을 잃은 왕으로서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세조는 경천사 10층석탑을 그대로 모방하여 원각사에 석탑을 세움으로써, 혈연적으로 환조-태조-세종을 잇는 적통이자, 부처의 이름으로 축복받은 군주임을 과시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조선시대 최후의 숭불군주였던 세조는 만년에 더욱 독실한 불교신자가 되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유혈정변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했던 정치적 정당성 문제 이외에도 가정적 불행과 그 자신의 지병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다. 특히 적장자 의경세자의 죽음은 큰 고통이었다. 세조는 세자가 죽자 대신들이 매일 아침 정사를 아뢰는 조회를 5일간 하지 않았고, 소복을 입은 채 30일을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오대산 상원사에 전해지고 있는 세조의 피부병을 낫게 해 준 문수동자의 이야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그런데 꿈에서 세조에게 침을 뱉어 피부병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바로 그가 죽인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란 사실이 신경쓰인다. 어디까지 믿어야 할 지 잘 모를 이야기이지만 세조는 왕이 된 이후에도 그가 저지른 일들로 인해 상당히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며 생활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세조는 1465년 원각사를 중건하고 그 이듬해인 1466년에 오대산 상원사를 중창한다. 세조는 중창식에 참석하기 위해 1개월 전부터 서울을 출발해 금강산 지역의 사찰을 순례하였다. 순례하는 동안 금강산 여러 사찰에 쌀과 참깨 등을 시주하였고, 표훈사에서는 수륙회(水陸會)를 베풀도록 간경도감에 지시하였다. 수륙회는 수륙재처럼 물과 육지에서 떠도는 외로운 원혼을 달래기 위한 의식이다. 태조 이성계는 특히 북한산 진관사에서 수륙재를 여러 번 베풀었다. 조선을 건국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람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태조와 세조는 정권을 장악하는 과정에 유사한 점이 많다. 세조가 금강산에 가서 수륙회를 베푼 뜻은 태조가 북한산에서 했던 것처럼 불교의식을 통해 자신의 죄업이 조금이라도 소멸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에 기대어 자신의 죄업을 소멸코자 한 왕이 조선에만 있던 것은 아니다.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3대 황제 아소카왕은 흔히 아소카 대제 또는 아소카 대왕이라 칭송되는 인도 역사상 최고의 군주이다. 재위 기간은 불분명하지만 기원전 273년~기원전 232년 정도로 여겨지고 있다. 마우리아 제국의 2대 왕이자 아소카의 아버지 빈두사라왕에게는 101명의 자식이 있었다. 아소카는 왕위 계승 다툼에서 친동생 한 명을 뺀 이복형제 99명을 모두 살해하고, 그들을 따르던 신하와 궁녀까지 모두 죽인 뒤 왕위에 오른 피의 군주였다. 그는 왕이 된 후 10여년 동안 인도 대륙 전역을 피로 물들인 통일전쟁을 한다. 전쟁을 승리한 아소카는 인도 최초의 통일왕조를 세우는 데는 성공했지만 자신의 야심으로 인해 무수한 인명이 죽고 아이들이 고아가 된 모습을 보고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아소카왕은 전쟁에 대한 참회와 반성의 의미로 불교에 귀의하게 된다. 

불교에 귀의한 뒤 아소카왕은 불교 사회의 이상적인 왕인 전륜성왕이라 불릴 정도로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나라를 다스린 최고의 군주가 되었다. 특히 그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한 근본8탑을 열고 그 안에 봉안했던 사리를 나누어 전국 각지에 불탑 8만 4천 기를 짓게 했다. 그리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있는 곳이거나 아소카왕 자신이 순례했던 수많은 유적지 그리고 거의 모든 불교 사원에 아소카 석주(石柱)라 불리는 돌기둥을 세운다. 현재 남아 있는 돌기둥에는 명문이 남아 있는데, 주로 황제의 칙령이나 황제의 순례를 기념한다는 내용 등이 새겨져 있다. 룸비니에서 발견된 아소카왕의 석주가 없었다면 아직도 우리는 싯다르타 태자의 탄생지를 특정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탑골 공원에 있는 ‘대원각사비’의 비문에는 원각사 10층 석탑의 건립 이유를 분신사리와 새로 번역한 원각경을 안치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실은 신생국의 힘을 과시하고 민족정신의 통일을 염원하기 위해 수도의 중심부에 조선 최고의 석탑을 세운 것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더 깊숙한 내면에는 아소카왕처럼 자신의 욕심이 일으킨 비극을 참회하고 피해자들의 원혼을 달래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임석규 불교문화재연구소 수석연구관 noalin@daum.net

[1720호 / 2024년 3월 1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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