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청곡사 나한전 사월의 기도

기자명 선우 스님

새벽 4시 45분, 청곡사 대웅전 앞 적막의 한가운데 서 있다. 도량석을 하기 위해 기다리는 짧은 순간이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니 북극성과 눈이 딱 마주친다. 북극성과 나와의 거리는 433광년이다. 433년 동안 빛의 속도로 달려온 북극성의 별빛이 창백한 푸른 점 속의 아주 아주 작은 나의 눈에 와닿는 기막힌 순간이다. 찡하다. 곧이어 목탁이 또로로록 올려지고 새벽바람이 소리를 싣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대웅전 처마에 깃들어 사는 작은 새가 제일 먼저 맑고 고운 소리로 응대한다. 천년을 넘게 흐르던 계곡의 물소리는 여전히 깊이 흐른다. 밤새 웅크린 산 목련이 새벽의 고요함을 수놓는다.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법의 성품이 걸림 없이 통하여 둘이 아니며 모든 법은 움직이지 않으니 본래로 적적하다. 의상 스님의 법문이 이 순간에 살아 생명을 얻는 듯하다. 이어지는 범종의 울림이 존재 않던 분별의 세상을 하나씩 깨운다. 이렇게 시작하는 하루는 그저 맑고 담연하다. 분별의 기운이 세차게 작동하지 않는 새벽녘과 아침의 기운은 자연 속으로 향하게 만든다. 소나무 숲의 딱따구리와 나의 발걸음 그리고 쇼팽의 선율이 조화롭다. 인간이란 탈을 쓰고 인간세상에 살아갈 숙제를 받은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자연에 스며드는 시간이다. 이 시간에 깨어있음은 누구한테도 들키고 싶지 않은 자연과의 은밀한 공명이다.

정초부터 청곡사 나한전에서 얼마간이 될지 모를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다. 천년고찰의 무심하게 빛바랜 단청이 누구에게라도 자리를 허락할 듯 너그러워 보인다. 오랫동안 도량을 살피고 돌봐온 분들의 손길이 느껴진다. 거기에 내려앉는 햇살과 바람은 평화롭게 통하고 있었다. 

믿음이 약할수록 ‘자기’가 공부를 하려고 한다. 믿음이 있다면 자기가 저절로 놓아진다는데 자기를 넘어서기가 이렇게도 넘기 힘든 강이었던가! 믿자고 다짐하는 것도 마음을 쉬려고 노력하는 것도 다 유위조작을 넘어서지 않는다. 번뇌를 찍어 누르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아가려 할수록 꽉 막히는 반복되는 절망적인 기분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구도자에게 기도란 간절함일 것이다. 뭘 바라는 기도가 아니라 진심이, 지극한 마음이 바닥끝까지 닿는 그 마음이 되어보고 싶었다. 힘을 들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행해지는 기도는 묘하게 편안하다. 기도가 끝나고 법당의 문을 활짝 열면 산이 보이고 그림 같은 저수지가 보이고 아래 마당의 천리향이 깊은 향을 내어준다. 세상의 모든 무용한 것들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순간이다. 

나한은 부처님의 말씀을 직접 듣고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결실인 아라한과를 얻은 스님들을 말한다. 부처님 열반 후 아라한 신앙은 아라한이 신통력을 발휘해 중생을 고난에서 구제해 준다는 믿음으로 확대됐다. 아난존자는 부처님 열반 당시 아라한과를 얻지 못했지만 이후 다른 아라한의 가르침을 듣고 아라한이 되었다. 후대 수행자들에게 아라한은 믿음직한 의지처였음이 틀림없다. 희노애락 다양한 표정이 담겨있는 나한님의 얼굴이 좋다. 독특한 자세와 자유로운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근심이 무엇인지 걱정은 또 무엇인지 농담 같아진다. 뭐가 심각하냐? 그렇게 꿈과 같고 환과 같다고 말했는데 무엇이 또 실제로 여겨지냐? 그래봤자 꿈이라니까…. 딴청 피우는 듯 허공을 응시하는 나한님이 말 없는 소식을 전한다.

나한전에 앉아있으면 편안하고 단정해지는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한보따리 인간적인 욕망과 근심을 이고 지고 올라와 항복지심하는 마음. 내맡기고 훌훌 털어버리고 가볍게 내려가는 곳. 이곳에 오는 모든 분이 그 마음이 그대로 평온이 깃들길 간절히 바란다. 우리도 나한이 되어가는 중이 아닌가! 이 모양 이 꼬라지 그대로 익살스런 또 하나의 나한으로 거듭나고 싶다. 

부산 여래사 불교대학 학장 선우 스님 bababy2004@naver.com

[1722호 / 2024년 3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