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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조선시대 별각탕

수행자 허기 채우고 정진 도운 든든한 도반

봄철 캐 먹기 좋게 말려 사찰창고 저장하면 1년간 식재료 활용
금명보정 스님 “고려 여덟 고승 굶주린 뱃속 고사리로 채웠네”
나옹혜근 스님 “고사리 먹고 누더기 걸쳐도 싫증이 나지 않아”

사찰음식인 햇고사리찜.[한국불교문화사업단] 
사찰음식인 햇고사리찜.[한국불교문화사업단] 

“봄 산의 별각탕을 배불리 먹고/ 배를 문지르며 앞산을 지나 소요한다/ 금당과 옥마도 모두 나에게는 하찮으니/ 누런 띠풀 헤치며 다시 고사리를 캐노라.”

이는 18세기 중후반 해남 대흥사와 지리산 화엄사 등에서 활동한 몽암기영 스님의 ‘몽암대사문집(蒙庵大師文集)’에 나오는 ‘채궐(採蕨, 고사리를 캐다)’이라는 시다. 봄철이 되면 온 산에 가득한 고사리를 캐 만든 별각탕 한 그릇이 있다면 세속 최고 가치로 여기는 금당·옥마도 필요 없다고 말한다. 이렇듯 별각탕은 수행자 허기를 채우고 정진하는데 더없이 귀한 원천이었다. 별각탕은 ‘고사리국’을 의미한다. 고사리의 동그랗게 말린 부분이 자라의 발을 닮았다고 해 붙여진 명칭이다. 고사리를 의미하는 한자는 궐(蕨)자 이외에 자라 별(鼈)에 초두머리(艹)가 붙은 고사리 별(虌) 자가 있다.

동아시아에서 고사리에 대한 언급은 ‘시경(詩經)’ 국풍·소남(國風, 召南) 편의 초충(草蟲)과 ‘소아(小雅)’ 사월(四月)이라는 시에 있다. 

“저 남산에 올라 고사리를 딴다고 했네. 산에는 고사리와 고비가 있고, 뻘에는 구기자와 뽕나무가 있다.”

이 대목에서 춘추시대 서주 백성도 이미 고사리를 채집해 식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사리와 관련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의 고사는 은나라의 은사인 백이와 숙제에 관한 일화이다. 서한(西漢)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에 언급된 식물은 고사리(蕨) 사촌격인 고비(薇)이다.

“백이와 숙제가 이를 수치스럽게 여겨 의롭게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에 은거하여 고비를 따서 먹었다(伯夷叔齊恥之 義不食周粟 隱於首陽山 采薇而食之).”

고사리는 봄철에 돋아나는 식물이다. 중국의 문인과 스님들에겐 봄을 알리는 전령이었다. 당나라 초기인 624년 찬술한 구양순의 ‘예문유취(藝文類聚)’에선 ‘복숭아가 떨어져 저녁 노을처럼 붉은 산의 모습과 고사리가 가득 돋아나 온통 자주빛인 들판’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북송의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 선사나 남송의 허당지우(虛堂智愚, 1185~1269) 선사의 어록에서도 봄을 알리는 고사리를 언급하고 있다. 

“강남에 봄이 일찍 와서 자주빛 고사리가 이미 뻗어 나왔네. 죽순과 고사리 익는 모습을 보니 봄이 이미 와 있는 듯.”

고사리는 동시에 사찰의 일년 간 먹거리를 책임지는 가장 중요한 존재였다. 온 산에 가득 핀(滿山筍蕨粉之屬以為煎餅)’ 식재료였다. 봄철에 캐 먹기 좋게 말려 사찰창고인 고원(庫院)에 저장하고 다른 계절에 섭취하기도 했다. 

고사리는 고려~조선시대 백성과 스님에게 중요했다. 봄이 되면 민가나 사찰의 중요한 일상 가운데 하나가 들과 산에 핀 고사리를 캐 국이나 나물 등 일상적 식재료로 사용하고 또 찬거리로 사용했다. 곡식이 부족한 시기엔 배고픔을 이기고 기아에서 생명을 이어가는 생명줄로도 기능했다. 조선시대 금명보정(1861~1930) 스님은 자신의 시문집 ‘백열록(栢悅錄)’에서 고사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혜능 선사를 계승한 고려의 여덟 고승은 굶주린 뱃속을 고사리로 채웠네. 황토 언덕에는 고사리가 지천이고 푸른 이끼 낀 땅에도 적지 않다. 고사리순 비 맞아 잘 자라는 모습 어여쁘고 대나무숲에 낮게 바람이 드니 좋아라.”

동시에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반가운 식재료였다. 고려시대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스님은 ‘삼종가(三種歌)’에서 고사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읊고 있다.

“혼자 산에서 살지만 한 해가 다 가도록 산에 싫증이 나지 않네, 고사리 꺾고 땔나무 해서 밥을 해 먹고 한 평생 누더기 납의를 걸쳐도 싫증이 나지 않네.”

나옹혜근 스님은 매일 밥상에 오르는 고사리 같은 흔한 반찬에도 만족감을 보였다. 조선후기 의룡체훈(1822~1895?) 스님도 고사리를 평생을 함께할 존재로 여겼다. 

“작설차 향기를 늘 삶의 계책으로 삼고 고사리순 나물 맛도 평생을 함께하리.”

고려시대 대각국사 의천 스님도 고사리를 늘 들었음을 ‘대각국사집(大覺國師集)’에서 알 수 있다.

“한낮의 강론은 귀신을 감동시키고 아침 공양은 고사리를 먹었다네.”

이렇듯 고사리는 여러 시문집을 통해  확인된다. 솔잎과 더불어 수행에 매진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로 생각했다. 수행자에게 음식은 여러 문제를 일으킬 수 있었다. 경제적 형편이 어려운 조선 사찰의 스님들에게 음식을 구해야 하는 번다한 문제를 수월하게 해결해 줬을 뿐 아니라 음식에 대한 탐욕을 덜거나 제거하는 데에도 일정한 역할을 해줬다. 고사리가 있으면 음식 관련 문제를 수월하게 해치우고 수행에 보다 집중할 수 있었다.

조선 후기 용담조관(龍潭慥冠, 1700~1762) 스님은 고사리와 솔잎 같은 식재료 덕분에 불도에 매진할 수 있었다고 자신의 문집, ‘용담집(龍潭集)’에서 서술하고 있다.

“고사리 꺾으면 넉넉한 밥과 국/ 솔잎 찧으면 발우에 넘치는 음식/ 이 생애 이만하면 족하니/ 도를 걱정하고 가난은 걱정하지 말라”

종합 생활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후기 서유구(徐有榘, 1764~1845)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정조지(鼎俎志)’에는 고사리의 성질에 대한 상세한 설명, 고사리를 말리는 방법과 다시 먹을 때 부드럽게 만들어 파, 기름, 간장으로 볶아 익혀서 맛있게 먹는 방법(乾蕨方), 산행에 가서 꿩이나 닭고기를 사용하여 고사리찜(山行蒸蕨)을 만들어 식초와 간장 끼얹어 먹는 방법, 죽순과 함께 데쳐서 기름에 볶아 술·간장·향료를 섞어 소를 만들어서 만두류 음식인 혼돈(餛飩)을 만들어 먹는 방법(筍蕨餛飩方) 등을 소개하고 있다. 

이렇듯 고사리는 국이나 나물과 같은 일반식의 형태로 주로 소비됐지만 일반인에게는 닭고기·꿩고기와 함께 고사리찜을 만들거나 다른 식재료와 소를 만들어 만두류 음식인 혼돈 등을 만들어 먹었다. 또는 앞서 언급한 명나라 사찰에서처럼 고사리 가루로 전병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사리가 수행자인 스님에게 가져다 주는 가장 큰 이로움은 조선시대 수많은 스님의 문집에서 확인할 수 있듯, 불도에 집중하기 위한 알맞은 육체적 힘을 제공하면서도 1년 식량의 상당 부분을 해결해 주는 음식이기에, 수행에 매진해 불도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일 것이다.

공만식 동방문화대학원대 교수 kms3127@hanmail.net

[1722호 / 2024년 3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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