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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3.고대불교-삼국통일과불교(72) (8) 의상과 화엄종의 사회적 성격(28)

왕권 무력화된 무신집권기 이르러 의천의 불교는 변방으로 밀려

의상 따르는 부석종이 화엄종 주류로 복귀하며 원효의 저술 모두 잊혀
재조대장경 조판하며 의천이 제외시켰던 의상 법손들의 저술이 포함
고려 후기 체원은 고려 관음신앙의 기원을 의상의 신앙으로부터 구해 

체원의 ‘화엄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 판본. [동국대학교]
체원의 ‘화엄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 판본. [동국대학교]

11세기 후반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화엄종을 개혁하고 천태종을 개창함으로서 중앙불교계는 교종 계열의 화엄종과 법상종, 선종 계열의 천태종과 조계종 등 4개 종단으로 개편되었다. 특히 화엄종에서는 의천이 고려 초기에 균여의 불교를 신랄하게 비판함으로서 종단의 주류가 의천의 문도들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데 의천이 세상을 떠난 뒤 70년만인 의종 24년(1170)의 무인들의 정변, 그리고 뒤이은 명종 26년(1196)의 최충헌의 집권을 계기로 하여 불교계는 또다시 큰 변화를 겪게 되었다. 중앙불교계에서는 전반적으로 선종 계열의 종파가 크게 득세하는 한편 교종 계열의 종파들은 침체하는 방향으로 변화를 겪는 가운데, 선종과 교종을 막론하고 각 종파들의 내부에서도 각각 그 주류가 바뀌는 전면적인 질적 변화로 발전하였다. 선종 계열의 조계종에서는 보조지눌(1158~1210)의 수선사, 천태종에서는 원묘요세(1163~1245)의 백련결사 등의 개혁운동이 전개되었고, 교종 계열의 화엄종에서는 의천의 직계 법손들이 주류에서 밀려나고, 그 대신 의천에 의해서 억압받았던 균여의 법손들이 다시 대두하여 종단의 주류적인 위치가 전복되는 파벌 교체를 이루었다. 그리고 같은 교종 계열 가운데 주류적인 종파의 일원이었던 법상종은 침체의 늪에 빠져들게 되었던 반면 새로운 군소 종파들이 등장하여 난립하는 혼란스러운 형세가 연출됨으로서 고려불교사를 전기와 후기로 양분하는 시기구분을 짓게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불교계의 전면적인 변화 가운데, 특히 화엄종의 변화는 의천 계통과 균여 계통 사이의 파벌 교체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었고, 신라 의상의 화엄교학과 신앙의 전승과 직결되는 변화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 회에서 의천이 송의 진수정원(1011~1088)과의 교류를 통하여 징관과 종밀의 당나라의 후기 화엄학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균여의 화엄학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한편, 신라 화엄종의 정통조사로서 의상과 함께 원효를 새로 추앙하면서 화엄종은 균여의 법손들과 의천의 직계 제자들로 양분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었다. 

그리고 화엄종단 안의 두 파벌은 무인집권기 불교계의 전면적인 개편이라는 혼란을 계기로 하여 마침내 균여 법손들의 부석종·의지종, 의천 직계 제자들의 분황종·해동종이라는 두 파벌로 나눠지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런데 두 파벌이 직접 대립하게 된 계기를 제공한 사건이 고종 23년(1236)~38년(1251)에 국가적인 사업으로 추진된 재조대장경의 조판 사업이었다. 대장경의 보유판으로 간행한 15종 가운데 ‘석화엄교분기원통초’10권(1251) ‘석화엄지귀장원통초’2권(1248) ‘화엄삼보장원통기’2권 ‘십구장원통기’2권(1250) ‘일승법계도원통기’7권(1287) 등 균여의 저술 5종 23권이 포함되었는데, 이 저술들은 앞서 의천이 교장을 간행할 때에는 모두 제외되었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보유판 가운데는 ‘법계도총수록’4권도 포함되었는데, 이 책은 ‘대기’ ‘법융기’ ‘진수기’ 등을 중심으로 하여 의상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의상 법손들의 주석과 이와 관련된 문헌들을 집성한 것으로서, ‘교분기원통초’ ‘지귀장원통초’ ‘십구장원통기’ ‘공목장기’ 등 균여의 저술도 인용되었음을 보아 균여 이후에 편집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대장경을 재조할 때에 교감(校勘)을 맡은 인물은 수기(守其) 등이었는데, 그는 고려초기 태조가 삼국통일의 달성을 기념하여 창건한 개태사의 승통으로 있었다. 그리고 균여의 저술들은 조판하기에 앞서 그 원고들을 수습하여 개간케 한 인물은 천기(天其)였는데, “흥왕사교학승통”이라는 승직을 가졌음이 주목된다.
 
천기는 고종 13년(1226)~38년(1251) 개태사·갑사 등 균여와 인연 있는 사찰들의 고장(古藏)에서 고사본(古寫本)들을 수습하여 방언을 삭제하고 개간케 하였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하면 의상→균여→수기·천기 등으로 이어지는 부석종(의지종)에서 최씨 집권기인 고종대(1324~1259)는 이미 화엄종 교단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재조대장경의 간행을 주관하게 되었고, 그리고 이 부석종에 속한 인물들에 의해서 의천이 제외시켰던 균여의 저술들과 함께 의상의 ‘일승법계도’에 대한 법손들의 주석을 집성한 ‘법계도총수록’을 함께 간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화엄종에서 부석종이 주류로 등장하여 재조대장경 간행을 주도할 때 의천의 직계 법손들로 구성된 분황종 측의 반발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한문준(?~1190)이 찬술하고 최선(?~1209)이 글자를 쓴 ‘화쟁국사비’를 분황사에 수립한 것은 부석종에 대한 경쟁의식과 무관할 수 없다고 본다. 대장경 간행의 교감 과정에서 양 파의 대립이 표출되었던 사실도 확인되는데, 수기의 ‘고려대장경교정별록’ 추함(推函)의 ‘대집경(大集經)’조에서 교감과정에서의 논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대집경’의) 국본(國本)과 송본(宋本)의 두 대장경은 모두 60권, 단본(丹本)과 ‘개원록’은 모두 30권으로 권수가 상이하였다. ‘개원록’ 전후의 경문에 표현되어 있는 상태를 자세히 살펴보니, 국본과 송본의 60권본은 6가지 잘못된 점이 있기 때문에 의거할 수 없다. 이것은 이치적으로도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하지만, 어떻게 바로 잡겠는가? 

간략히 하려면 ‘개원록’과 단본처럼 30권으로 하는 것이 옳고, 복합적으로 하려고 하면 ‘개원록’ 가운데 있는 제6본과 같이 80권으로 고치면 바야흐로 모든 것을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 바로 잡지 못하는 것은 이 60권본을 본조(고려)의 분황종에서 선택하여 경행한지 이미 오래 되었기 때문이니, 오래된 것은 고치기 어렵다” 수기가 ‘대집경’을 교정하면서 60권본이 잘못된 것으로 지적하면서도 분황종에서 사용되어 왔기에 바로 잡을 수 없다고 토로한 것은 그 반대를 의식한 결과로 해석될 수밖에 없다. 재조대장경의 보유판 가운데 원효의 저술로서 유일하게 ‘금강삼매경론’ 3권을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분황종 측을 배려한 결과였다고 본다. 

그러나 12세기 이후 화엄종의 주류는 의상을 조사로 추앙하는 부석종이 차지하였고, 원효를 조사로 추앙하는 분황종은 소수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 즈음에 이미 원효의 저술들이 모두 잊혀가고 있었고, 원효의 행적도 대중교화사로서의 설화적인 인물로 전승되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 고려 왕실의 강력한 지원을 받았던 의천의 불교는 왕권이 완전히 무력화된 무인집권기 이후에는 변방으로 밀려나거나 아주 단절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부석종만이 번성하여 화엄종을 주도하는 사정은 무인집권이 끝난 다음 시기에도 변함이 없었다. 충렬왕 13년(1287)에 균여의 ‘일승법계도원통기’의 개판이 이루어지고 있었고, 이장용(1201~1272)이 의상의 강의록인 ‘화엄추동기’를 윤색(潤色)하였는데, 특히 ‘화엄추동기’는 의상이 문도를 이끌고 소백산 추동에 가서 3000 회중에게 90일에 걸쳐 ‘화엄경’을 강설한 것을 문인 지통이 필록하여 2권으로 엮은 것이었다. 이러한 화엄종 주류의 사상과 신앙을 계승하여 대미를 장식한 성과가 14세기 전반기에 활약했던 체원(體元)의 관음신앙 관계의 저술들이었다. 

체원은 고려말기(충숙왕~충혜왕) 의상→균여→수기→체원 등으로 연결되는 화엄종의 전통을 계승하여 ‘화엄경’의 관음신앙을 사상적으로 집대성한 인물로 평가된다. 체원은 고려말기 대표적인 사대부 가문 출신인 이진(1244~1321)의 아들이자, 이제현(1287~1367)의 형이었다. 그의 호는 목암(木庵), 자는 향여(向如), 양가도승통국일대사라는 최고의 승직을 받은 화엄학자였다. 그는 1280년 초반에 출생, 20세 전후에 출가하여 승과에 합격하고, 해인사를 중심으로 하여 인근의 법수사·반룡사·동천사 등 경상도 일원에서 주로 활동하였다. 그는 1320년에서 1330년대에 걸쳐서 ‘화엄경관음지식품’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 ‘백화도량발원문약해’ ‘삼십팔공덕소경’ 등 여러 종의 불전을 펴냈으며, ‘화엄경’과 ‘반야경’의 사경을 주도하였다. 이 가운데 ‘화엄경관음지식품’은 ‘화엄경’의 ‘입법계품’ 부분을 별도로 번역한 정원본 40권 가운데서 권16 선재동자가 관음보살을 찾아 보살도와 보살행을 구하는 부분만을 발췌하여 지송용으로 간행한 것이고, ‘화엄경관자재보살소설법문별행소’는 징관의 ‘화엄경소’ 등에 의거하여 주석을 가한 것이다. 원래 정원본 40권은 60권본 ‘화엄경’과 80권본 ‘화엄경’의 ‘입법계품’과는 별개로 795년 계빈국(罽賓國)에서 보내온 범본 ‘Gaṇḑa-vyūha’를 반야(般若)가 한역한 것으로 특히 “보현행”을 중시하여 ‘입불사의해탈경계보현행원품(入不思議解脫境界普賢行願品)’이라는 부제를 붙였다. 징관은 앞서 787년 80권 ‘화엄경’에 대한 주석서로 ‘화엄경소’ 20권과 ‘화엄경수소연의초’ 40권을 저술하여 징관의 종합불교학의 성과를 집대성한 바 있었다. 그리고 798년 40권본의 한역 때에는 상정(詳定)의 역할을 담당하고, ‘정원화엄경소’ 10권을 저술하였다. 그리고 권40 보현보살의 법문 부분만 별도로 주석한 ‘보현행원품별행소’ 1권을 저술하였는데, 종밀이 그것을 다시 주석한 ‘행원품소초’ 6권을 저술함으로서 동아시아 불교사에 큰 영향을 미치었다. 그런데 일찍이 고려초기 균여는 권40의 보현보살의 법문 부분만을 징관이 주석한 ‘보현행원품별행소’에 근거하여 ‘보현행원가’를 지어 보현신앙을 유포시킨 바 있고, 고려말 체원은 권16의 관음보살의 법문 부분만을 발췌하고 징관의 ‘정원화엄경소’ 등의 여러 경전을 근거로 해석하여 관음신앙을 유행케 하였다. 이로써 고려시대 화엄종의 중심적인 신앙이 초기의 보현신앙에서 말기의 관음신앙으로 바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체원은 ‘화엄경’의 관음신앙의 사상적 내용과 그 근거를 밝히는 데 그치지 않고, 고려 관음신앙의 기원을 신라 화엄종의 개조인 의상의 신앙에서 구하여 의상의 찬술로 전해오던 ‘백화도량발원문’을 주석한 ‘약해’를 저술하였다. 체원은 1328년 집해하고 1334년 간행하였는데, 그 서문에서 의상은 지엄 문하에서 법장과 함께 수학하고, 의상은 의지(義持), 법장은 문지(文持)라는 이름을 받았음을 언급하여 화엄의 깊은 뜻을 체득한 의상이 학자적인 면모의 법장과 구별됨을 분명히 하였다. 의상과 법장이 지엄으로부터 의지와 문지라는 이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전해주는 자료로는 체원의 ‘약해’가 유일한 것이기 때문에 그 진위 여부는 확인하기 어려우나, 신라 화엄종의 정통성을 내세우려는 체원의 의지의 발로인 것임은 분명하다. 

그리고 의상이 ‘법계도’와 그 해석을 지었음을 밝히고, 이어 낙산 관음굴에 예배하고 발원하여 이 글을 지었음을 명기하였다. 이 ‘발원문’은 제목을 합하여 모두 312자의 4언 게송체로 이루어졌는데, 중심은 관음보살을 관상하고 관음을 본사로 모시고 백화도량 정토에 왕생하기를 기원하는 구도적 내용이다. 체원은 이 게송을 풀이한 ‘약해’에서 많은 전적을 이용하여 화엄적인 관음신앙의 실례를 상세하게 풀이하였다. 체원은 의상이 낙산 관음굴을 찾아 관음보살에 예배하고 발원문을 찬술하였음을 역사적인 사실로서 믿었고, 이를 통하여 관음신앙의 정통성을 확보하여 화엄종의 중심적인 신앙으로 자리 잡게 하려던 것으로 보이는데, 배경으로서 12세기 이후 의상 계통의 화엄종에서 관음신앙이 크게 유행하였다는 사실은 다음 호에서 상술하게 될 것이다.

최병헌 서울대 명예교수 shilrim9@snu.ac.kr

[1722호 / 2024년 3월 27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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