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 발 딛고 살아가는 한 반드시 그대들을 태양 아래 인도하리라”

  • 교계
  • 입력 2024.03.29 03:21
  • 수정 2024.03.30 05:58
  • 호수 1723
  • 댓글 2

대한불교관음종 일본 조세이탄광 희생자 위령재 현장

스님·불자들 60여 명 동참…일본 시민단체 회원들도 함께해
희생자 위령재 때 거센 비바람 불었으나 차분함 속에서 진행
위패 봉안된 사이코지 참배…‘오빠 생각’ 부를 때는 눈시울도

3월 28일 관음종 스님과 불자들이 1942년 2월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로 조선인 136명을 비롯한 183명이 희생된 장소 앞에서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있다.
3월 28일 관음종 스님과 불자들이 1942년 2월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로 조선인 136명을 비롯한 183명이 희생된 장소 앞에서 영가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고 있다.

“천고에 묻힌 슬픔이여, 시간의 먼지 속에서도 그대들은 빛을 잃지 마소서. 이 땅에 우리들 발 딛고 살아가는 한 반드시, 반드시 그대들을 태양 아래로 인도하겠나이다. 부디 맑은 공기 원 없이 들이마시고 남은 원한 다 훌훌 털어버리고 극락왕생하소서.”(관음종 총무원장 법명 스님 추도사 중)

3월 28일 오후 1시, 일본 야마구치현 우베시 조세이탄광 희생자 추모광장. 오전부터 간간이 내리던 비는 위령재를 시작할 무렵 빗줄기가 굵어지고 바람은 거세졌다. 어제까지도 완연한 봄날이더니 하룻밤 사이에 겨울의 끝자락으로 되돌아간 듯했다. 82년 전 이곳 조세이 탄광 해저에서 수몰 사고가 있던 날 하늘과 바다, 원통하게 스러져간 조선인과 일본인의 183명 희생자 마음이 이 같았을지 모른다.

바다 한가운데 환기와 배수를 위해 설치한 둥근 콘크리트 기둥인 피아. 이곳은 82년 전 조세이탄광의 비극이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고 있다.
바다 한가운데 환기와 배수를 위해 설치한 둥근 콘크리트 기둥인 피아. 이곳은 82년 전 조세이탄광의 비극이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고 있다.

조세이탄광은 시모노세키 남쪽 61km 지점의 해저 탄광이다. ‘조선탄광’의 일본식 호칭인 ‘조세이탄광’은 이름에서 드러나듯 광부 대부분 징용된 조선인이었다. 그들은 조선 각지에서 부산으로 모여 대한해협을 건너 시모노세키로 왔다. 하루 12시간 2교대의 노동강도와 해저 탄광의 높은 온도, 비좁은 갱도에 반라 상태로 작업을 하는 최악의 노동조건으로 악명 높아 일본인 광부들조차 외면했던 곳이다. 제국주의의 비호를 받던 석탄회사는 조선인 광부들의 탈출을 막으려고 3.6m 높이의 울타리로 둘러싼 숙소에 가두고 철저한 감시와 통제 속에 채탄 작업에 투입했다. 해저 채굴 제한구역에까지 석탄을 캐게 했고, 더 많은 생산을 위해 갱목 일부를 제거하는 등 안전 수칙을 아예 무시했다.

수몰 사고가 일어난 건 1942년 2월 3일 오전이었다. 갱도에 구멍이 뚫리자 바다 한가운데 환기와 배수를 위해 설치한 둥근 콘크리트 기둥인 피아에서 물기둥이 솟구쳤다. 그 아비규환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단 2명, 나머지 조선인 136명과 일본인 47명은 수장됐다. 전쟁에 눈이 먼 일본은 국민의 사기 저하를 염려해 철저히 비밀에 그쳤고, 그들 뜻대로 조세이탄광은 세상에서 잊혀 갔다. 그러나 1976년 양심적인 우베 시민들에 의해 이 사실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2013년 2월에는 참극의 현장에서 500m 떨어진 마을에 추모비가 들어설 수 있었다.

한국 불교계가 조세이탄광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15년 9월 제18회 한중일불교우호교류회의 히로시마대회에서다. 그때 히로시마 총영사는 한국불교종단협의회(종단협)에 조세이탄광 희생자 위령재를 요청했다. 종단협은 이를 받아들여 다음 해인 2016년 1월 30일 위령재를 봉행했고, 때마침 창종 50주년을 맞아 일제강점기 희생자 무연고 영골들에 대한 환국사업을 펼치기로 선포한 관음종이 이 사업을 잇기로 결의했다. 관음종은 국적을 초월해 억울하게 희생된 영가들의 넋을 위로하고 역사를 바로 세운다는 취지로 매년 위령재를 열었으며,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양심의 울림에 떳떳이 행동해나갔다.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조세이탄광에 대한 원력들이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교계 언론 외에도 국내 일반 언론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올해 1월에는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조세이 탄광 한일공동유해발굴 및 봉환 국회토론회를 개최했다. 또 다큐 사진작가 이재갑 씨가 조세이 탄광의 아픔을 렌즈에 담은 ‘그들은 아직도 바닷물 속에 있다’는 주제로 전시회를 열었다. 지난해 일본 중의원 회의에서도 조세이탄광 수몰 사고와 관련한 질의들이 오간 것으로 전한다. 그 배경에 관음종의 호시우행의 일관함과 원력이 있었음은 자명하다.

올해 위령재에는 관음종 종정 홍파 스님과 총무원장 법명 스님을 비롯해 부원장 도각 스님, 중앙종회의장 혜산 스님, 조계종 첫 비구니 어산어장 동희 스님, 총무부장 홍경 스님, 수교부장(영산작법연구회장) 도문 스님, 사서실장 법룡 스님, 영산작법연구회 비호, 해사, 묘광 스님 등과 사찰 신도들 60여명이 동참했다.

스님들과 불자들이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의 위패가 모셔진 우베 사이코지에서 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스님들과 불자들이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의 위패가 모셔진 우베 사이코지에서 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희생 영가들에게 헌향하고 있는 관음종 종정 홍파 스님.
희생 영가들에게 헌향하고 있는 관음종 종정 홍파 스님.
희생 영가들에게 헌향하고 있는 관음종 총무원장 법명 스님.
희생 영가들에게 헌향하고 있는 관음종 총무원장 법명 스님.
영가 축원을 하고 있는 조계종 어산어장 동희 스님.
영가 축원을 하고 있는 조계종 어산어장 동희 스님.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패.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위패.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의 위패가 봉안된 사이코지에 참배한 스님들과 신도들.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의 위패가 봉안된 사이코지에 참배한 스님들과 신도들.

이들은 위령재에 앞서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의 위패가 봉안된 정토진종 사찰 우베 사이코지(西光寺)를 참배했다.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절에는 수령 300~400년은 됨직한 은행나무가 경내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었다. 참배 일행은 위패를 불전 앞에 일일이 세워 모시고 삼귀의와 반야심경, 특히 동희 스님이 장엄하면서도 절절한 목소리로 영가들을 위로하고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시간을 가졌다. 총무원장 법명 스님은 주지 사사키 스님에게 미리 준비해온 선물을 증정했고, 사사키 스님은 “우리 할아버지 스님이 당시 바닷속에서 숨을 거둔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며 위패를 조성하셨다”며 “먼 곳에서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얼마 후 조세이탄광 희생자 추모광장에 도착한 스님과 불자들은 더욱 거세진 비바람 속에서 위령재를 봉행했다. 임시홍 주 히로시마 한국 총영사와 ‘조세이탄광 수몰사고를 역사에 새기는 회’ 이노우에 요우코 공동대표와 회원들도 참여했다.

위령재가 시작되자 바람이 더 거세지고 빗방울은 굵어졌다. 추도사를 하고 있는 총무원장 법명 스님.
위령재가 시작되자 바람이 더 거세지고 빗방울은 굵어졌다. 추도사를 하고 있는 총무원장 법명 스님.

위령재는 간단한 예불의식과 함께 총무원장 법명 스님의 추도사로 시작했다. 스님은 “조세이탄광 희생자 유골 발굴은 해저에 잠들어계신 희생자들뿐만이 아니라 지금도 주야장천 산업 현장과 국경 최전선에서 헌신하는 모든 분을 위한 위로”라며 “작은 관심들이 한 군데에 모여 해저에 묻혀 계신 희생자들의 손을 잡아드리는 큰 도약이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강조했다. 임시홍 주일 히로시마총영사는 “식민지와 차별, 전쟁으로 얼룩진 시대에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이들을 달래기 위해 우베시를 찾아오신 관음종의 고승대덕과 신자분들에게 감사를 표한다”며 “보다 많은 일본 시민이 자발적으로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을 생각하게 되도록 시민사회의 노력이 이어지기를 희망한다. 그럼으로써 언젠가는 한일 양국 시민의 따뜻한 관심 속에서 해저의 유골이 햇빛을 볼 날이 오기를 기원한다”고 말했다.

관음종 종정 홍파 스님은 “오랜 세월 춥고 냉랭한 바닷속에서 묻혀 있는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안타깝다”며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데도 서울과 부산 등 곳곳에서 찾아와 억울하게 희생된 영가들을 위로하는 것 자체로 더없이 뜻깊은 천도재”라고 밝혔다.

비가 쏟아지고 바람이 더 거세졌다. 영산작법연구회 주관으로 장엄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던 법회의식은 소략하게 이뤄졌다. 낙산묘각사 관음합창단도 몇 주간 정성껏 준비해온 노래들을 부득이 미뤄야 했다. 헌화와 함께 행사는 서둘러 마무리됐으나 일행은 끝까지 흐트러짐이 없었고, 엄숙하고 진지한 표정은 오랫동안 이어졌다. 깊은 감회와 환희로움도 줄지 않았다.

2013년 2월 참극의 현장에서 500m 떨어진 마을 입구에 들어선 조세이탄광 희생자 추모공원.
2013년 2월 참극의 현장에서 500m 떨어진 마을 입구에 들어선 조세이탄광 희생자 추모공원.
영산작법연구회 주관으로 장엄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던 법회의식은 궂은 날씨로 인해 부득이 소략하게 이뤄졌다.
영산작법연구회 주관으로 장엄하게 진행될 예정이었던 법회의식은 궂은 날씨로 인해 부득이 소략하게 이뤄졌다.

“조세이탄광에 대해 7년째 관여해오고 있다. 올 때마다 많은 것을 느끼고 종도 여러분에게 늘 감사하다. 궂은 날씨에 참 수고 많으셨다. 어떻게든 좋은 결실로 이어지도록 하자.”(도각 스님) “코로나 전에 초청받았으나 못 오다가 이번에 오게 됐다.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울컥하고 마음이 아프다. 기회가 닿으면 꼭 또 오려고 한다.”(동희 스님) “한마음 한뜻으로 한·일, 일·한 양국의 우호발전에 기여하고 평화를 기원하며 전쟁이 되풀이되지 않기를 발원하게 된다.”(홍경 스님) “우린 잠깐도 춥고 힘든데 80년을 넘게 추운데 계셨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파도가 치는 모습이 아우성치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널리 알려서 유해가 하루빨리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허경화) “위령재에 참여할 수 있어서 아주 기쁘다. 바람이 불고 파도가 치는 모습에서 오히려 그분들이 우리를 반가워하며 빨리 위령재를 지내달라는 것 같았다.”(김미영) “다섯 번째 위령재에 참여했다. 그분들이 내 오빠 같다. 매번 가슴이 아프고 어떻게든 해결될 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다.”(박해정) “비가 오는데도 위령재를 열어준 관음종 스님과 신도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함께 힘을 결집해 반드시 갱구를 열자.”(이노우에 요우코) “일본인의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다. 죄송하다. 유해 발굴은 꼭 이뤄져야 한다.”(후지모토 가즈노리)

위령재를 마친 스님과 불자들을 태운 버스는 숙소를 향했다. 바다는 여전히 크게 일렁였고, 콘크리트 환기 구멍인 피아는 82년 전 비극이 과거가 아니라 여전히 현재형임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이때 종정 홍파 스님이 마이크를 들었다. “우리는 저기 바다에 묻혀 있는 분들을 언제까지고 잊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며 합창단원들에게 “아까 부르지 못한 노래를 지금 불러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잠시 후 조용하던 버스 안에 노랫소리가 조용히 울려 퍼졌다. 그 옛날 징용으로 현해탄을 건너간 뒤 소식이 끊긴 오빠를 기다리며 부르고 또 불렀을 숱한 누이들의 한 맺힌 노래 ‘오빠 생각’이었다.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울 제~/ 우리 오빠 배 타고 현해탄 건~너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관음종 스님과 신도들.
희생자들의 극락왕생을 발원하는 관음종 스님과 신도들.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의 애도하는 관음종 스님과 신도들.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의 애도하는 관음종 스님과 신도들.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사이코지의 위패들.
조세이탄광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사이코지의 위패들.

이재형 대표 mitra@beopbo.com

[1723호 / 2024년 4월 3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 이 기사를 응원해주세요 : 후원 ARS 060-707-1080, 한 통에 5000원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