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형 효(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
그러면 도덕주의는 소유욕과 무관한가? 아닌 것 같다. 그 도덕심은 이기심의 소유욕을 실질적으로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것을 길들이려는 명분적이고 당위적인 소유욕에 집착함으로써 이기심에 대하여 화를 낸다. 그 화는 대단히 정의롭고 올바른 것 같다. 그래서 화를 발산하려고 고집한다. 이것이 어리석음이다. 도덕주의적 주장은 늘 스스로 반이기적이기에 옳고 의롭다고 여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도덕주의적 이상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환상에 젖는다. 그러나 세상은 마음의 상분(相分)이기에 마음의 견분(見分)을 바꾸지 않는 한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이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경제적 소유욕은 무의식적 이기심에 의한 유위적 지배욕이지만, 명분에 의한 이상은 도덕의식에 의한 당위적 지배욕이다. 둘 다 이 세상을 능위적으로 지배하고자 하는 소유욕에서 차이가 없는 것 같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의 무위법을 다시 생각한다. 오랜 세월동안 사람들은 무위법이 게으른 자의 사유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자의 현실도피적 구실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나 불교의 무위법은 이제 이기적 경제주의와 반이기적 도덕주의를 넘어서 세간을 근본적으로 제도하는 사회적 실학사상임을 알아야 하겠다. 무의식의 마음에는 소유의 탐욕과 존재의 요구라는 두개의 욕망이 있다. 즉 이기배타적 소유욕과 자리이타적 원력이 그것이다. 이 원력은 불성의 자발적 요구다.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 아뢰야식에는 이기적인 욕망과 자리이타적인 원력이 공존하고 있다. 이 후자가 곧 불성의 무위적 말이다. 보조국사는 중생이 지니고 있는 각종 재능인 지치(至治)산업과 공교(工巧)기예가 다 불성의 일음(一音)이라고 언명하였다. 각 재능은 동물의 무위적 본능처럼 생존의 타고난 능력이다. 이 능력을 각자가 무심과 무아로 꽃피우고 성숙시키면, 그것이 바로 보살도에 이르는 가장 손쉬운 길이 아니겠는가? 불성의 자발적 요구로서의 자리이타의 원력이 생활화되면, 거기에 경제와 도덕의 갈등이 이미 소멸되어 버린다. 자리이타의 원력은 그동안 궁합이 안 좋았던 경제와 도덕의 두 길을 다 살리는 세간의 구원으로 인식되어야 하겠다. 사람들은 저 자리이타의 자연적 무위법을 출세간적 허학(虛學)이라고 너무 오랫동안 오해해 왔다.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