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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보드가야 Ⅰ

기자명 법보신문

깨달음 완성한 자리에 대탑 솟다

<사진설명>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자리에 세워진 마하보디 대탑. BC 250년경 아쇼카왕에 의해 세워졌다.

전율! 이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구나. 이 감동을 어찌 언설로 형용할 수 있을까. 붓다를 이룬 이 성스러운 자리, 보드가야에 지금 나는 넋을 잃고 서 있다. 어떤 감동적 서사도, 광경도 이를 능가할 수는 없으리라. 이제까지 목숨을 걸어 의지해온 이의 숨결을 느끼고 있는 이 순간은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환희, 그 자체다.

이 감동과 환희는 어디로부터 오는가. 그것은 저 거대한 마하보디 대탑과 탑을 이루고 있는 벽면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 때문만도 아니요, 보드가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신성한 기운 때문만도 아니다. 어쩌면 이 감동은 붓다의 불가해한 위신력이 작용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대탑의 내부와 그 둘레를 차분한 걸음걸이로 거니는 이들의 저 지극한 표정이나, 곳곳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깊은 명상에 잠겨 있는 숭고한 모습들은 지금 내가 느끼고 있는 감동과 환희와 다르지 않을 것이리라.

보드가야는 싯다르타가 붓다로 새롭게 탄생한 곳이다. 진리의 측면에서 본다면 보드가야야말로 진정한 붓다의 탄생지라 할 수 있다. 보드가야는 붓다의 탄생지 룸비니, 최초의 설법지 사르나트, 열반지 쿠시나가르와 함께 불교의 4대 성지에 속한다. 4대 성지란 붓다가 열반에 들기 전에 아난다에게 자신의 입적 후에 제자들이 참배할 4곳을 일러준 데서 기인하는데, 사실 보드가야는 이 4대 성지 중에서도 으뜸에 해당한다.

연기의 이치와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깨달아 마침내 우주의 법칙을 확연히 깨우친 성인 중의 성인, 붓다의 탄생지, 보드가야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전 세계에서 불자들이 모여들고 있다.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 등 불교권은 물론이고 유럽과 미주의 푸른 눈의 불자들도 분주하게 찾아들고 있다. 이곳을 참배하는 불자들의 눈망울은 하나 같이 고요하고 절절하다. 얼굴, 아니 온몸으로 붓다를 향한 지극한 존경과 귀의가 묻어나오고 있다. 그들이 이곳에 와 마음속으로나마 붓다를 만났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저 표정들은 붓다를 만났을 때 나올법한 공경과 기쁨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이다.

보드가야의 상징은 아무래도 깨달음을 얻은 장소에 세워진 마하보디 대탑이다. 이곳은 붓다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깨달음을 완성했던 길상좌인데, 기원전 3세기 경 아쇼카 대왕이 붓다의 깨달음을 기념해 웅장한 규모로 세웠다. 대탑의 서쪽에는 금강보좌가 있는데, 이곳은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자리로 고목이 된 보리수가 한 그루 서 있다. 아마도 현재의 보리수는 붓다가 깨달음을 이룰 당시에 서 있던 보리수의 증손자쯤에 해당될 것이리라.

전정각산에서 내려온 붓다가 네란자라 강 건너 편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다. 저 멀리 서쪽 동산에 쾌적해 보이는 장소가 눈에 들어온다. 동산 한 가운데에 가지를 늘어뜨린 보리수가 서 있는데, 그 아래로 제법 긴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그곳은 전정각산보다도, 수자타 집안이 섬기는 보리수 아래보다도 한결 평온해 보인다.

붓다는 강을 건너기 위해 흐르는 물속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발바닥으로 느껴지는 모래의 감촉이 그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발바닥에 눌려 있던 모래들이 물살에 쓸려 빠져나갈 때의 감촉은 간지러울 정도로 부드럽고 감미롭다.
네란자라 강의 물살이 제법 세다. 어지간한 나무 쪼가리는 순식간에 흘러내려갈 정도다. 강물 중간쯤에 멈춰선 붓다는 문득 수자타 여인의 우유죽을 얻어먹고 바리때를 씻던 순간을 떠올렸다. 떠내려가던 바리때를 집어 들고는 바리때처럼 맥없이 물살대로 흘러내려가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마음을 냈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 인간의 삶이란 생명이 없는 바리때와는 달라야 한다. 이렇게 맥없이 물살 흐르는 대로 떠내려가선 안 된다. 인간은 의지만 가지면 강물을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지 않은가. 떠내려가지 않고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는 삶, 그것이 내가 추구해야할 길이다.”
네란자라 강을 건너온 붓다는 필발라 나무(보리수) 그늘 아래에서 동쪽을 향해 자리를 정했다. 이곳에서 과거의 여러 붓다들이 깨달음을 이뤘다는 산신의 설명을 회상하면서 어떤 것을 깔고 앉을 것인가를 잠시 망설였다. 그런 찰나, 마침 길상(吉祥·Sri)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쿠사(Kusa·훗날 이 풀은 길상초로 불린다)라는 풀을 붓다에게 바쳤다. 쿠사를 자리에 깔고 앉은 붓다는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다.

“이 자리에서 나의 육체가 소멸되어도 좋다. 다만 어느 시대에도 그 누구도 얻기 어려운 모든 지혜(一切智)를 얻지 못한다면 나는 이 자리에서 결코 이 자리를 뜨지 않으리라.”
이윽고 바이사카 월(인도력으로 2월) 보름날 저녁, 환한 달이 산하를 비추고 있다. 악마의 유혹과 더불어 생겨난 모진 비바람도 씻은 듯 개어 있다. 붓다는 지혜와 통찰력을 확대시켜나갔다. 인간의 생사를 둘러싸고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풀지 않고는 해탈, 깨달음은 기대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붓다는 깊고 깊은 사색에 빠져들고 있다.

보드가야의 감동에 젖어 모른 사이에 넋을 잃었던 나는, 한참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고개를 들어 마하보디 대탑의 꼭대기를 바라보고 있다. 순례 일행들도 저 장엄한 대탑의 위용에 눌린 듯 말문을 닫고 있다. 붓다가 이룬 깨달음의 경지는 아마도 저 아득하게 솟은 대탑의 정상만큼이나 높고 심오한 경계이리라. 숨을 고르게 하고나서 붓다가 깨달음을 완성해가는 과정을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아, 깨닫지 못한 이 미혹 중생이 그 성스러운 광경을 어떻게 감히 나타낼 수 있을것인가. 고민 끝에 스리랑카 불교학자인 데이비드 깔루빠나와 인드라니 깔루빠나가 쓴 책 ‘싯다르타의 길’(재연 스님 번역)에 그려진 붓다의 깨달음의 순간을 참고하기로 한다. 다른 책에 비해 비교적 그 순간을 실감나게, 또한 사실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명상에서 깨어나자마자 두고 온 조국과 사랑하는 사람들, 야소다라와 라훌라의 얼굴이 떠오른다. 순식간에 마음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뒤이어 온갖 유혹의 군사들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감각적 욕망, 탐욕, 권태, 기아, 갈증, 나태, 마비감, 겁(怯), 불확실성, 분노, 고집, 칭찬, 비난, 이권, 명예…. 그것은 실로 끊임없이 물고 늘어지는 마구니(Mara)의 화신들이다. 이제 새로운 정력과 냉정, 평온과 평정으로 이들과 싸워야만 한다.”

붓다는 다시 명상의 첫 단계에 들어갔다. 점차 집중은 강화되고, 온전한 주의집중과 평정으로 이루어진 제4선정에 도달했다. 여기서 붓다는 이전처럼 감각과 인식이 정지된 수상멸처로 들어가지 않고, 대신 순일하고 유연해진 마음을 인간의 생사문제 쪽으로 향하게 했다. 그리고는 극도로 순수하고 집중된 마음으로 자기 자신을 통찰하기 시작했다.
“나의 몸은 부모에 의해 만들어져 음식으로 지속되는 사대(四大·지수화풍)의 조합이다. 이 육체가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손상되고 마모되고 부서지고 있다. 이제야 나의 육신과 맞물려 일어났다 사라지고 다시 일어나 흐르는 의식을 꿰뚫어 볼 수 있게 되었다. 육체와 마음이 서로 어떻게 의존하며,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나는 알게 되었다.”

붓다는 이러한 통찰에 의해 이른바 정신과 육체의 화합체인 인간 존재의 본성에 대한 지혜를 갖게 되었다. 다음으로 그가 해결해야할 것은 어떻게 한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고 또 사라지는지 알아내는 것이다. 그는 극도로 순수하고 집중된 마음으로 자신의 과거를 더듬어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는 복잡하게 얽힌 지난 생, 수십·백·천·만 생의 과거, 그리고 여러 차례에 걸친 세계의 생성과 소멸을 회상했다. 어떤 종족에서 어떻게 태어나, 무슨 이름으로 어떻게 살았으며, 어느 곳에 태어났던가 하는 지난 생에 대한 상세한 내용을 상기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끝없는 과거 생에 대한 소급인식능력으로 자신의 생존을 둘러싼 신비를 해결하고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은 또 어떤가? 그들도 나와 같은 것일까?’

그는 온전한 집중력과 순일해진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생을 추적해 나갔다. 그는 범부의 안목을 초월한 신묘한 눈(天眼)으로 중생들이 윤회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들은 때로 비열하게, 혹은 고상하게, 아름답게, 추하게, 행복하게 또는 불행하게 사라지고 또 다른 생을 이어간다. 그는 잘못된 소견을 가지고, 그런 사견으로 말미암아 또 다른 악행을 저지른 중생들이 불행과 파멸의 지옥에 태어나는 것을 보았다. 이렇게 그는 다른 사람들의 삶과 죽음의 양상을 알았다.

<사진설명>대탑 앞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 상좌부권 스님과 불자들. 지극한 표정에 그들의 순수하고 뜨거운 불심이 녹아있다.

다시 붓다는 마음을 집중하여 인간 번뇌의 본질, 즉 오욕에 빠지는 성향을 통찰해 나갔다. 이내 그는 감각적 욕망이 곧 번뇌의 뿌리이며, 생존에의 갈망 및 무지(無知)와 그릇된 견해가 곧 번뇌의 근원임을 깨달았다. 또 그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어떻게 인간의 성향을 결정짓는가를 보았다. 그러한 성향에 따라 선택되고 형성된 것들은 결국 불만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이 마침내는 실망과 괴로움, 좌절로 끌고 가는 것을 보았다. 또한 어떻게 하면 이들 좋은 것과 싫은 것, 갈망과 증오심을 제거하고, 성향의 평정, 곧 완전한 해탈로 향할 수 있는지를 깨달았다. 이런 것들을 명료하게 꿰뚫어봄으로써 그는 자신의 성향을 평정할 결의를 다졌다. 탐욕과 증오와 무지가 모든 고통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확신은 거의 자동적으로 붓다를 모든 번뇌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드디어 큰 깨달음을 완성한 붓다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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