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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지효스님(1909-1989)

기자명 법보신문

종단 대소사 앞장선 선승

1989년 9월 28일 입적

정화 당시 할복

위법망구 실현

수행자 실천궁행 강조


지효 스님은 용성, 동산, 동헌 스님의 뒤를 이어 범어사의 선 수행가풍을 이은 근·현대 대표적 선승으로 추앙 받는 인물이다. 평생을 전국 제방의 선원을 돌며 용맹정진 하며 후학들에게 모범을 보이는가하면 재가자들에게는 언제나 “헛된 욕망과 육체에 대한 애착심에서 벗어나 모든 중생을 부처님의 모습처럼 생각하는 자비관을 실천해야 할 것”을 강조했다.

특히 스님은 수행에 전념하면서도 1950년대 비구·대처간의 분규 등 종단의 중대사가 발생하자 직접 나서 종단의 안정을 이끄는데도 공헌했던 인물로 더욱 알려져 있다.

1909년 평안남도 정주 운흥리에서 태어난 스님은 생사의 문제에 깊이 고민하던 중 불가에 귀의할 것을 발원하고 그의 나이 34세 되던 1943년 범어사를 찾아 출가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 범어사에서 주석하던 동산 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수지한 지효 스님은 이후 범어사에서 수선안거(修禪安居) 정진을 거듭하던 중 1955년 은사인 동산 스님을 비롯해 청담, 구산 스님 등이 주축이 돼 대처승을 제거하기 위한 이른바 정화운동이 시작되자 수행을 잠시 접고 돌연 서울 조계사를 찾았다. 1955년 6월 10일 비구·대처간 갈등이 정점에 이른 이날 조계사 법당에서 기도를 마친 지효 스님은 불교정화 불사의 정당성을 설명하고 이를 반드시 이뤄내야 한다는 발원을 세우고 할복(割腹)을 단행한다. 수행자로서 오직 불교계의 밝은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겠다는 위법망구(爲法忘軀)의 정신을 실현한 것이다.

스님의 할복으로 새로운 전환을 맞은 비구·대처승간의 갈등은 결국 비구승들의 승리로 결말이 났다. 정화 불사가 마무리에 접어들었음에도 종단의 혼란이 계속되자 스님은 총무원 총무부장과 재무부장의 소임을 맡고 종단의 안정에 혼신을 기했다.

스님은 종단이 제모습을 갖춰가자 다시 수행자로 돌아갈 것을 결심하고 천축사 무문관에 들어 6년간 수행에 전념했다. 특히 스님은 이 때부터 자신의 수행이외에도 후학들을 양성하는데 더욱 매진했다. 그러면서 스님은 후학들에게 “선이란 불성의 본체에 대한 돈오적인 자기 주체화이므로 이론으로 따져서 알려고 하는 것은 참된 선이 아니다”라며 “오직 실천궁행(實踐躬行)만이 해탈로 나가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1978년 조계종 원로위원으로 선출된 뒤 1979년 70을 넘긴 나이지만 동화사, 해인사 등에서 유나를 역임하고 다보사 등에서 30하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이후 범어사에서 5번이나 주지 소임을 맡는 등 수행과 포교에 있어 누구보다 앞장섰다.

평생을 수행과 종단의 대소사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았던 지효 스님은 1989년 9월 28일 범어사에서 세수 81세, 법납 47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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