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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수산 스님 (1906∼1996)

기자명 법보신문

염불선 대중화 견인

1996년 10월 1일 입적
효봉 스님 문하 수행
73년 염불만일회 결성
재소자 포교 앞장



“늘 내 몸은 낮추고 다른 사람을 높이고 돕는 하심(下心)을 생활화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이 꼿꼿하지 못하면 겁이 생겨 극락세계에 가지 못합니다. 그리고 작은 선이라도 모이면 큰 선이 된다는 걸 명심하시어 염불 외에도 착한 일을 많이 하십시오.”(수산 스님 ‘유언 법어’ 중에서)

수산 스님은 평생을 염불 수행으로 일관하면서 정토신앙의 전파와 정법 수호를 위해 몸을 아끼지 않은 인물이었다. 스님은 철저한 지계(持戒)를 통해 수행자로서의 모범을 보이면서 대중들에게 염불을 통해 생사해탈 할 것을 강조했다.

1906년 경남 함양에서 태어난 스님은 뛰어난 한학을 바탕으로 한의학을 공부했으며,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통영 미래사에서 효봉 스님을 은사로 출가를 단행한다. 당시 스님의 나이 45세. 늦깎이(?)로 발심한 스님은 이 때부터 그 누구보다 더 수행 정진에 임했다. 이는 스승 효봉 스님의 가르침이 컸기 때문이다. 일제시대 판사생활을 하다 뒤늦게 불문에 인연을 맺은 효봉 스님은 늦깎이 수행자에게 언제나 나이보다는 수행을 통해 부처님의 참 가르침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해인사, 금정사, 송광사 등의 제방선원에서 수 차례 안거를 성만한 스님은 이후 73년부터 해인사 극락암과 홍제암에 주석하면서 염불 수행에 대한 원력을 세우게 된다. 불법에는 여러 갈래의 길이 있으나 그 가운데 으뜸은 곧 염불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스님은 이 같은 발원과 함께 염불만일회를 결성하고 대중들과 염불선원을 건립, 하루 1만 번 이상 염불주력에 정진했다. 스님은 또 이 곳에서 당시 참선 수행을 어렵게 생각하는 일반 불자들을 대상으로 염불 선을 통해 삼매에 들것을 당부했다. 스님은 언제나 일반 불자들에게 “참선을 해서 견성을 하기란 하늘의 달을 따기보다 어렵고, 염불을 해서 삼매를 얻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생사해탈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스님은 이와 함께 76년 경북 달성 남지장사 주지 소임을 맡으면서 전국을 순회하며 30만권의 불서를 무상으로 배포했으며 특히 4만권의 불서를 전국 교도소에 보급하는 등 재소자 포교에 누구보다 앞장섰다. 스님은 그러면서도 철저한 지계를 바탕으로 수행자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았다. 스님은 철저하게 계율을 지키는 것이 곧 수행자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본분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스님은 자신의 입적을 예견하고 일반 대중들에게 남긴 법어에서 “내가 죽거든 산에서 다비를 하지 마라. 산에서 화장하면 많은 뭇 생명들이 나로 인해 희생을 당하기 때문”이라고 당부해 수행자로서의 모범을 보이기도 했다.

평생을 염불선 수행에 정진하던 수산 스님은 1996년 10월 1일 대구 염불선원 광명당에서 세수 90세 법랍 44세로 입적했다.
권오영 기자 oyemc@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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