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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보드가야 Ⅲ

기자명 법보신문

카샤파 3형제, 붓다 앞에 무릎을 꿇다

<사진설명>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자리에 위치한 마하보디 대탑의 불빛이 새벽의 여명과 어우러져 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깨달음을 이룬 후 붓다는 보드가야(옛 지명은 우루벨라)에서 자신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 몇 가지 중요한 선택, 아니 결단을 내렸다. 이 곳에서 내린 붓다의 결단들은 그의 일생은 물론이요, 불교교단 형성에 중요한 분기점이 되었다. 따라서 우리는 보드가야에서 결단에 대해 보다 각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제일 먼저 꼽아야할 붓다의 선택은 전법을 결심한 것이다. 붓다가 당신의 깨달음을 뭇 중생들에게 전하는 것을 포기했다면 오늘날 우리 인류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스승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며, 불교라고 하는 최고의 가르침 또한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붓다 역시 이 결심을 통해 성인 중에서도 가장 존경받는 성인(聖中聖)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불전의 기록에는 제석천과 범천왕이 3번 설법을 권해옴에 따라 마침내 붓다가 전법을 결심했다고 전해지는데 이는 누구도 걷지 않았고 보지 못했던 길을, 또 어느 누구도 얻지 못했던 완전한 지혜를 대중에게 전하는 것을 결정하는 과정에서의 번민이 그만큼 컸음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물론 붓다가 세상에 태어날 때 세상이 편안치 못하니 내가 마땅히 편케 하겠다(三界無安 我當安之)는 선언을 한 만큼 전법은 붓다의 생애에서 예정된 일정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깨달음을 이룬 후 막상 그것을 전하고자 했을 때 필연적으로 밀려왔을 숱한 고민들은 범인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리라. 이런 고민들을 마침내 정리하고 무려 45년이란 긴 전법의 여정에 오르는 붓다에게 한없는 공경을 올린들 어찌 그 큰 은혜에 답할 수 있으랴.

두 번째로 꼽아야할 선택은 첫 전법의 대상자로 사르나트(Sarnath)에서 수행 중이던 다섯 명의 수행자를 정한 것이다. 이는 우루벨라 고행림에서 함께 수행하던 도반들에 대한 배려일수도 있겠지만, 더 큰 이유는 당시 가장 유행했던 난공불락의 수행법인 ‘고행’에 대한 극복 없이 당신이 깨달은 진리를 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행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이들 가운데 특히 고행을 버린 자신을 경멸하며 떠난 자들을 교화시킨다는 것은 어렵게 내린 전법의 결단이 성공할 가능성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가. 당시 마가다국에서는 우루벨라 이외의 지역에서도 고행이 폭넓게 수행되고 있었다. 이 중 수행의 고수들이 밀집해 있던 곳인 사르나트(녹야원)에 가 있던 다섯 수행자들 역시 그곳에서 고행을 지속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붓다는 다섯 수행자를 교화하는 것으로 고행수행법의 한계를 드러내고, 수행의 고수들이 운집한 사르나트에서 자신의 가르침이 통할 수 있음을 내외에 보여줌으로써 전법에 탄력을 입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사르나트 행을 결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니까 붓다가 첫 설법지로 사르나트를 선택한 것은 여러 가지 정황을 감안한 고도로 계산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번째 선택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사르나트에서의 전법에 성공할 경우 다시 이곳 우루벨라로 돌아와 법을 전하겠다는 결심을 내린 것이다. 붓다는 저 유명한 ‘전도선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르나트에서 다섯 수행자를 교화한 후 제자들에게 전도의 길을 떠나라고 명령했다. 아울러 자신도 이곳(우루벨라)으로 오겠다고 천명한 바 있다. 첫 전도지로 우루벨라를 택한 것은 당시 마가다국에서 대표적인 고명한 수행자로 손꼽혔던 가섭 3형제를 교화할 경우 수도 라즈기르는 물론 수행자들의 천국이었던 마가다국 전체를 들썩거리게 할 만큼 큰 효과를 거둘 것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실제로 붓다는 바라나시 사르나트에서의 성공적인 전법으로 얻은 명성과 자신감을 갖고 우루벨라로 돌아왔다. 이곳에서 고행을 하던 시절 익히 그 명성을 들었던 카샤파 3형제를 교화하던 장면은 불전에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카샤파 형제들은 염력에 정통한 요가 수행자로 이적을 행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불가사의한 것과 수행의 깊이를 동일시하던 바라문들로서는 그 신비한 능력에 놀라움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고 있었다. 제자들의 충성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카샤파 3형제들은 특히 불의 신 아그니(Agni)를 신봉했다. 맏형 카샤파는 붓다의 방문이 썩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할 수도 없었던 터라 흉계를 꾸며 붓다를 제거하기로 했다. 붓다가 만일 자신보다 더 큰 신통력을 가졌을 경우 곤란한 입장에 처할 수도 있음을 걱정했던 것이다.
카샤파는 자신을 찾아온 붓다를 맹독을 가진 코브라가 놓여 있는 움막에 머물도록 해 독살을 유도했다. 그러나 코브라를 발견한 붓다는 일체의 두려움이나 마음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공포를 일으키는 모든 열망과 갈애에서 벗어난 그에게 당황할 일은 없었다. 다음날 아침 붓다가 무사히 움막을 빠져나오자 움막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카샤파는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제자들에게 이미 시신을 치울 준비까지 시켰던 자신의 입장이 졸지에 곤혹스럽게 바뀌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고타마, 그대는 독사를 길들이기 위해 어떤 이적을 행했는가?”
“카샤파여, 나는 기적을 일으키지 않는다. 다만 나는 이미 나 자신을 길들이는 기적을 성취했을 뿐이다. 그러나 자신을 길들인 자는 독사나 사자, 코끼리와 같은 맹수 그리고 가장 사악한 인간조차도 큰 어려움 없이 길들일 수 있다.”

제자들의 면전에서 콧대가 꺾인 카샤파는 밀려드는 수치심으로 몸둘 바를 몰랐다. 붓다가 한 말의 뜻을 모를 리 없었기 때문이다. 생각 없는 미물, 독사조차도 붓다를 해꼬지하지 않는데, 큰 무리를 이끄는 자신이 뱀보다 못한 짓을 저지른 데 대한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이윽고 카샤파는 붓다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붓다여, 시기심과 오만으로 저의 눈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저에게 자신을 길들이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카사파는 붓다를 스승으로 모실 것을 다짐하고 그의 제자가 되었다. 이후 자초지종을 알게 된 나머지 두 형제들도 맏형을 따라 제자들을 이끌고 붓다에 귀의했다.
우루벨라의 카샤파 3형제와 제자들의 집단 개종은 마가다국에서 일종의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마가다 사람들의 가슴 속에 깊이 자리잡혀 있는 바라문교의 철옹성에 구멍이 뚫린 것과 다를 게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카샤파 형제들과 제자들의 개종 소식은 마가다국의 수도 라즈기르로 빠르게 번져갔다. 이 소문은 곧 빔비사라 왕에게 전해졌고 빔비사라 왕은 이전 붓다와의 약속을 들어 붓다를 공식적으로 초청하기에 이르렀다.
붓다는 빔비사라왕의 요청을 받고 카샤파 형제들과 그의 제자였던 1000명의 비구들을 이끌고 우루벨라를 떠났다. 한 나절을 걸어 붓다의 일행이 가야지역의 코끼리 모양을 빼닮은 상두산(象頭山·Gayasirsa)에 이르렀을 때, 마침 한 산봉우리에서 맹렬하게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 불길을 바라보던 붓다는 새로이 개종한 1000명 제자들을 모아놓고 그 자리에서 불과 관련된 설법을 시작했다. 저 유명한 산상수훈(山上垂訓)으로 일컬어지는 이 광경의 요지는 이렇다.

<사진설명>코끼리 모양을 빼닮은 상두산에서 붓다는 불과 관련된 산상수훈을 설법했다.

“모든 것이 불 위에 있다. 비구들이여, 무엇이 불 위에 있는가? 눈이 불 위에 있다. 눈에 보이는 형상이 불 위에 있다. 시각 의식이 불 위에 있다. 시각적 접촉에 의해 일어나는 감각 즉 쾌감, 고통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중립적인 감각이 불 위에 있다. 이 불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갈애의 불, 증오의 불, 미혹의 불이다. 이 욕망과 미움과 어리석음의 불길은 우리의 모든 감각과 감각기관과 감각대상 그리고 감각과 감각대상의 접촉에 의해 일어나는 모든 경험을 태워버린다. 감각과 함께 우리의 경험이 불 위에 있다는 것을 인지함으로써 지혜로운 사람은 눈과 시각대상, 시의식과 시각적 접촉에 집착함이 없이 침착하게 된다. 이와 같이 모든 감각기관 즉 눈, 귀, 코, 혀, 몸, 뜻(眼耳鼻舌身意)과 그 감각대상 그리고 감각의식과 감각적 접촉에 침착하게 된다. 냉정을 잃지 않음으로써 욕망이 사라지고, 욕망이 사라짐으로써 마음은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자재하게 된다. 그의 마음이 자유로워졌을 때 그는 이제 윤회가 끝났다는 것을 깨닫는다. 고상한 삶을 살았으며, 해야 할 일을 마쳤고, 다시는 태어나지 않는다는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붓다의 설법으로 인해 카샤파 형제들과 그들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서 타고 있던 불 즉 갈애와 증오, 미혹의 불에서 완전하게 벗어날 수 있었다. 그들 모두 아라한의 경지에 오른 것이다.

<사진.좌>붓다가 깨달음을 이룬후 다섯번째 일주일간 선정에 든 반얀나무/<사진.우>마하보디대탑 바로 곁에 위치한 불전 앞에서 개 한마리가 평화롭게 와선(?)에 취해 있다.

보드가야!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이 성지가 여명에 시나브로 그 자태를 또렷하게 드러내고 있다. 마하보디 대탑을 비추는 전등의 불빛들은 새벽의 햇빛과 어우러져 환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곳에서 전법에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빔비사라 왕의 요청에 따라 1천여 제자를 이끌고 라즈기르로 떠나던 붓다의 마음 또한 이처럼 감미로웠으리라.
동쪽 하늘에 해가 불쑥 솟았다. 모처럼 인도에서 맞이하는 맑은 아침이다. 붓다의 지혜와 자비광명처럼 솟구치는 태양이, 상두산을 붉게 물들였던 불길처럼 천지로 번져나가 보드가야를, 아니 삼천대천세계를 환하게 밝히고 있다.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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