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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의사협회의 임종환자 윤리지침

기자명 법보신문

안락사, 누구를 위한 것인가

안락사 문제와 관련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대한의사협회는 2001년 11월과 2002년 5월에 <임종환자 윤리지침>을 발표한 바 있다. 윤리지침은 ‘임종환자의 자율적 결정이나 가족 등 환자 대리인의 판단에 의해 연명치료의 중단이나 퇴원을 문서로 요구하는 경우 의사는 받아들일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환자 본인의 뜻이 아니라 가족의 요구에 의해 임종을 앞둔 환자의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생명을 경시하는 행위라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환자가 혼수상태에 빠져 의사를 표시할 수 없는 경우 가족이나 보호자가 가족 내 갈등이나 과도한 진료비, 재산상속 등 때문에 환자를 희생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의사협회 산하 대한 의학회가 회복이 불가능한 임종환자에게 연명치료를 중단시킬 것을 목적으로 의료윤리기준과 지침을 만들기 위한 ‘한국의료윤리심의기구’를 2002년 5월 31일 발족시켰다. 연명치료중단 문제가 생명윤리논란을 야기하지 않으려면 치료중단 여부를 환자 스스로 결정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필요가 있고, 무의미한 치료중단 결정권을 의료인이나 가족이 아닌 환자본인이 행사하는 게 중요하므로, ‘사전의사결정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것. 환자가 호흡이나 심장이 멎는 등 혼수상태에 빠지기 이전에 연명치료를 계속할 것인지 말 것인지 미리 문서형태로 작성해두거나, 어떤 치료를 받을 것인지를 대신 결정할 대리인을 미리 지명해두자는 이 제도는 미국 등 의료 선진국에서 이미 시행중이다.
그러나 ‘윤리지침’이나 ‘사전의사결정제도’ 는 안락사 문제로 난관에 봉착한 의협이 하나의 돌파구를 마련해 책임을 모면하려는 미봉책인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안락사 문제를 이런 식으로 국민적 공감대라든가 보다 개방적 논의 없이 의사들이 주도적으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대법원이 보라매 병원사건에 대해 2004년 6월29일 유죄 확정판결을 내렸으므로, 의사들의 이런 노력은 일거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최근 우리 사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안락사라든가 연명치료의 중단에 대한 관심과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치료하기 어려운 말기환자를 단지 육체적으로 생명을 유지하느냐 여부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의협이 발표한 ‘윤리지침’이나 ‘사전의사결정제도’에서 알 수 있듯이, 죽음을 눈앞에 둔 말기 환자를 더 이상 치료할 수단도 없고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때 육체적 연명만을 위해 연명치료를 계속할 것인지, 중단한 것인지 여부에만 초점이 맞춰져있을 뿐이다.
죽어 가는 사람을 육체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 치료할 뿐이고 영적으로 보살피는 의식이 거의 완벽할 정도로 결여되어 죽음문화를 찾아보기 어려운 게 우리의 현실이다. 외로움에 지치고 아무런 영적인 도움을 받지도 못한 채 커다란 압박감과 미몽 속에서 죽어 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우리는 많이 접하게 된다. 누구든지 마음의 평화를 느끼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없다면, 적어도 이를 가능하게 하려는 노력이 진행되지 않는다면, 세속적 성공만 지향하는 현대 사회의 허세는 공허할 뿐이다.

더구나 환자의 죽는 순간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의료관계자가 죽음에 대해, 죽어가는 환자를 돌보는 방식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 보았는지 궁금하다. 얼마 전 대학병원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오랫동안 근무한 간호사가 내 연구실을 방문한 일이 있다. 의사나 간호사가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에 대해 아무런 준비 없이, 임종환자를 차가운 병실 한 구석에 마지막 순간까지 방치해 놓고 있는 지금 상황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그는 말했다.
한 생명이 죽음을 맞는 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생명이 자신의 삶을 맺는 마지막 순간이므로,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은 죽음뿐만 아니라 삶에까지 관계된다. 따라서 그 순간에 연명치료를 계속할 것인지 중단할 것인지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너무도 피상적인 접근방식이다. 안락사에 대한 찬반여부를 떠나 죽음,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 죽어 가는 환자를 돌보는 방식, 나아가 삶을 영위하는 방식에 대해 보다 공개적인 논의와 철학적 성찰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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