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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사르나트Ⅲ

기자명 법보신문

“세상으로 나아가 참된 법을 전하라”

60여 제자에게 전도를 부촉하다

<사진설명>사슴에 관한 전설(본지 776호 참조)이 남아있는 사르나트는 산스크리트어로 사슴의 왕을 뜻하는 사란가나타(sarangatha)가 줄어든 말이다. 붓다가 초전법륜을 설한 이곳에는 아직도 사슴들이 자유롭게 뛰놀고 있다.

<사진.좌>바라나시 산 비단을 파는 인도의 여인네가 한국에서 온 순례객들에게 현란한 전통춤을 선보이고 있다.|<사진.우>아쇼카왕의 석주 기둥. 원래 이 석주의 꼭대기에 있던 사자 조각의 주두는 현재 사르나트 박물관에 소장돼 있고 다메크 사원터에는 기둥만 남아있다.

사르나트의 첫 인상은 포근함, 그리고 따뜻함이다. 마치 부드러운 솜이불에 싸여 있는 느낌이다. 딱딱한 벽돌조차 손가락으로 찍어 누르기만 하면 구멍이 파일 듯이 부드러워 보인다. 마치 잃어버렸던 소성(塑性)을 되찾기나 한 듯이. 그뿐이랴. 지나치게 짙지 않은 연녹색의 나무 이파리들이며, 양 볼을 간지르는 바람결이며, 앙증맞은 사슴의 눈빛들은 바라나시 산 비단을 팔기 위해 이방인 앞에서 인도의 전통춤을 추는 젊은 여인네의 속살만큼이나 여리고 살갑다.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이곳에 왜 많은 사슴들이 모여 살았는지, 수행의 고수들이 경향각지에서 찾아와 제각각 정진의 깊이를 겨뤘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순례일행이 가는 곳마다, 버스가 멈춰서는 곳마다 장사치와 구걸을 하는 어린이들이 몰려든다. 눈 깜빡할 사이에 수십 명을 훌쩍 넘기기는 다반사다. 장사치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어린아이들의 눈망울은 선하기 짝이 없다. 구걸을 목적으로 하기보다는 차라리 재미로 몰려다닌다는 것이 맞을 듯 싶다. 한국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라 간단한 우리말을 하는 아이도 눈에 띤다.

아귀에 들만큼 작은 초전법륜 상을 두 손에 가득 들고 ‘원 달러’, ‘천 원’을 외치는 한 장사치와 문득 눈이 마주쳤는데, 불상을 살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있음을 간파한 그를 결국 불상을 1구 팔아주고 나서야 떨쳐낼 수 있었다. 1달러를 받아쥐고 기뻐하는 저 표정이라니!

사르나트의 중요성은 바로 불교가 탄생한 곳이라는 점이다. 붓다와 붓다의 가르침, 붓다의 제자가 처음 형성되었고, 재가불자가 처음 탄생한 성지가 바로 이곳이다. 카필라바스투가 붓다의 육신이 탄생한 성지이고 보드가야가 정각자로서의 붓다가 탄생한 성지라면, 사르나트는 불교라고 하는 교단의 탄생 성지인 셈이니 그 중요성을 재론해서 무엇하랴.

사르나트에서 5비구 이외에 야사(Yasas) 등 55인의 비구가 새롭게 탄생하고, 야사의 아버지와 어머니 등이 최초의 재가불자(우바새, 우바이)로 탄생하는 광경은 이렇다.

야사라는 청년이 있었다. 바라나시의 부자 상인의 아들로 준수한 젊은이였다. 야사는 당시 부자의 자제들처럼 온각 환락과 쾌락에 젖어 살고 있었다. 친구들과 어울려 거의 매일 밤 여흥을 즐기고는 여자 악사, 무희들과 어울려 성희에 젖고 널부러지는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야사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곯아떨어진 여인네들의 추한 자태를 보게 되었다. 마치 붓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야사도 이 광경을 보고는 느낀 바가 많았다. 자신이 살아온 삶의 모습이 구차하고 의미없이 다가왔다. 온갖 해악으로 가득 찬 인생, 비참하고 보람이 사라진 인생을 어떻게 할 것인가. 야사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집을 빠져나온 야사는 무엇에 이끌리듯 사르나트로 향했다.

붓다가 수심에 찬 젊은이 야사를 발견한 것은 이른 아침 숲 속을 산책하던 중이었다. 젊은이로부터 해악으로 가득 찬 자신의 인생을 탄식하는 소리를 듣게 된 붓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자신의 깨달음을 수행자가 아닌 일반 재가자에게 전달할 좋은 기회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그래, 수행자의 삶을 살지 않아온 사람들에게도 내가 깨달아 안 가르침을 전달해보자. 진리를 전하는 방법에서 어떤 점이 달라져야 하는 지를 파악해볼 좋은 기회일 것이다.’
이윽고 붓다는 야사를 향해 말했다.

“이보게 젊은이. 해롭지도 비참하지도 않은 것이 여기 있네. 이리와 내 이야기를 들어보게나.”

붓다의 모습에 저절로 존경심을 갖게된 야사가 예를 올리고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호사스럽게 자라 세상물정을 모르는 야사를 위해 붓다는 자신이 이룬 깨달음의 진수를 말하기에 앞서 이해하기 쉬운 것부터 설명을 시작했다. 상대의 수준에 따라 진리를 설하는 방법을 달리하는 붓다의 대기설법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보람과 가치가 있는 삶을 위해 재가자가 해야 할 수행의 첫 단계는 능력에 따라 베푸는 일이다. 베푸는 일은 다섯 가지의 결실을 맺는다. 타인을 기쁘게 하고, 선량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며, 좋은 평판을 갖게 되며, 매사에 머뭇거리지 않고 당당하며, 인간계나 천상계에 나게 되는 것이다.”

“스승이시여, 네 개는 이해할 수 있으나, 내생에 관한 마지막 이야기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생에 관한 마지막 이야기는 세존을 믿고 그렇다고 우선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렇게 하라. 그 부분은 나중에 저절로 알게 되리라.”

붓다는 이어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이 반드시 지켜야할 기본적인 덕목에 대해 설명했다.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위해 실천해야할 다섯 가지 덕목이 있다. 생명을 해치지 말고, 주어지지 않은 것을 갖지 않으며, 잘못된 쾌락을 삼가고, 거짓말을 하지 말며, 술이나 약물 같은 것에 취하지 않는다. 이것을 지키면 사회가 건전해지고, 지키는 사람에게도 좋은 과보가 따른다. 좋은 과보란 다음 생에 천상과 인간계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붓다는 이처럼 5계와 선악의 행위에 따르는 과보에 대한 설명으로 쾌락을 추구함으로써 생기는 좋지 않은 결과와 그것을 버림으로써 얻어지는 좋은 결과에 대해 설명했다. 이는 야사의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한 것인 동시에 자신이 깨달은 정수, 즉 네 가지의 성스러운 진리(사성제)와 성스러운 삶을 위한 여덟 가지의 바른 길(팔정도)을 전하기 위한 기초를 마련해주려는 붓다의 배려였다.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 난 야사는 마침내 진리의 눈을 갖게 되었다. 집을 나간 아들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그를 찾아나선 야사의 아버지 역시 아들의 출가를 말리려다 붓다의 설명을 듣고는 귀의를 결심했다. 최초의 재가불자(우바새)가 탄생한 것이다.

야사는 붓다로부터 출가를 허락받음으로써 불교교단의 7번째 아라한이 되었다. 붓다는 야사의 집으로 초대되어 공양을 받는 자리에서 그의 어머니와 전부인의 귀의도 흔쾌히 허락했다. 이들이 최초의 여성 재가불자(우바이)들이다.

야사가 붓다의 제자가 되어 출가를 했다는 소식이 바라나시까지 전해지자 그의 절친했던 친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많은 재산과 온갖 쾌락을 떨쳐버리고 출가수행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선뜻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붓다라는 스승이 필시 보통의 인물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에 이들은 붓다를 찾아 사르나트로 향했다. 이들 역시 붓다의 가르침을 듣고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정진에 전념하여 곧 깨달음의 눈을 갖게 되었다. 드디어 이 세상에 붓다와 60명의 아라한이 탄생한 것이다.

60명의 제자들이 자신의 가르침을 충분히 체득했으며, 그 진리를 이웃에게 전할 만한 능력을 갖췄다고 판단한 어느 날, 붓다는 60명의 제자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고 역사적인 당부를 내리기로 결심했다. 불꽃처럼 일어나는 괴로움에서 헤쳐나오지 못하는 중생에 대한 끝없는 연민이 붓다를 재촉한 것이었다. 이렇게 한 순간이라도 빨리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붓다의 구세원력이 압축된 선언으로 나타난 것이 ‘전도명령(傳道命令)’이다. 그 내용은 이렇다.

“비구들이여, 길을 떠나라! 대중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향한 자비심으로 신과 인간의 이익과 복락, 행복을 위하여. 둘이 함께 가지 마라. 비구들이여, 처음도 중간도 마지막도 좋은 법, 뜻도 말도 참된 법을 가르치라. 온전히 청정한 범행(梵行)을 보이라. 눈 밝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니, 바른 법을 듣고 그들 또한 해탈을 이룰 것이리라! 나도 우루벨라로 가겠다.”

붓다의 제자들이 세상에 진출하면서, 붓다의 명성은 빠르게 세상에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수없이 많은 수행자들과 바라문들이 붓다를 만나기 위해 사르나트로 모여들었다. 그들을 향해 내리는 붓다의 가르침은 말 그대로 ‘한 여름날의 얼음우박’과 같은 것이었다. 진리를 구하고자 찾아오는 이뿐만 아니라 가정사의 어려움을 상담하기 위해 찾아오는 일반인들도 부지기수였다.

붓다의 전도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마가다국의 수도 라즈기르에 가 있던 아쉬바짓을 통해 산자야의 제자였던 사리풋트라와 목갈라야나가 붓다를 만나 귀의한 것도 바로 이즈음이다. 훗날 교단의 상수제자가 된 이들은 붓다의 지도아래 있으면서도 쉽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가, 어느 날 한 방랑수행자와 나눈 붓다의 대화를 듣고는 법안이 열려 아라한의 지위에 올랐다. 이들의 눈을 열어준 붓다의 설법을 다음과 같다.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들은 영원하지 않으며, 성향에 따라 조건지어진 것이며, 얼마동안 머물다가 부서지고 결국 소멸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세계 안에 존재하는 사물과 세계에 관한 견해도 초연하다. 그에게 갈망은 없으며, 자유롭다. 갈애로부터 벗어난 그는 어떤 것에도 매달리거나 반발할 것이 없다. 논쟁을 벌일 일도 없다. 그는 언어에 집착하는 일도 없이, 보통 사람들이 쓰는 일상어를 사용한다.” urubella@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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