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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죽어가는 사람의 세 번째 반응 : 분노

기자명 법보신문

오래 살고 싶다는 소망이 분노로 분출

죽어가는 임종환자가 왜 자기가 죽어야 되는지 주위사람에게 화를 내는 경우가 있다. 이것이 바로 죽어가는 삶의 세번째 반응 ‘분노’이다. 아직 죽고 싶지 않다, 더 오래 살고 싶다는 희망이 분노의 형태로 표출되는 것이다. 분노로 가득 찬 말기환자와는 아무런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몇 년 전 크리스마스 이브에 세상을 떠난 어느 청년이 있었다. 찢어지게 가난한 청년은 암이 온 몸에 퍼진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고 경찰에 붙잡혀 서초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던 도중 강남성모병원 응급실로 옮겨졌다. 온몸에 퍼진 암 덩어리보다 더 꽁꽁 뭉쳤던 청년의 분노와 한은 호스피스 봉사자들의 따뜻한 보살핌에 의해 풀어졌다. 청년의 노모도 살아 생전 한 번도 인간적인 대접을 받아보지 못했던 아들이 떠나가는 순간에야 비로소 인간대접을 받았다면서 호스피스 봉사자들의 손을 잡고 엉엉 울었다.

49세의 폐암말기의 환자 K씨의 경우, 진단받았을 당시 항암제 치료를 하여 완치되었다가 다시 재발되었다는 진단을 받은 그는 병원 진료실에서 각목을 휘두르며 화풀이를 하는 바람에 병원 진료를 마비시켰다. 의료진들은 암 말기 상태인데다가 소란을 계속 피우는 환자를 다룰 수 없어서 호스피스에 의뢰하였다. 호스피스 봉사자가 처음 방문했을 때 그의 아내는 지쳐있었고 아이들은 겁에 질려 있었다. 환자는 심한 기침과 가래, 통증에다가 불면증까지 있어서 밤에도 깨어있어야 했다. K씨는 불을 끄지 못하게 할 뿐만 아니라 낮에 일하고 돌아온 아내가 피곤해서 잠시 졸면 발로 차서 깨우고 화를 냈다. 초등학교 5학년인 아들이 밥을 먹고 있으면 갑자기 주먹으로 얼굴을 때렸다. 그의 얼굴은 초췌하고 잠을 못자서 그런지 눈 밑이 그늘져 있었다.

통증 때문에, 혹은 기침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는가 생각해 그에게 질문했더니,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되었다.

“3주 전부터 밤마다 검은 옷 입은 사람이 나타나 내 이름을 부르며 ‘김아무개 나와’ 라고 부르기 때문에 겁이 나서 잠을 자지 못한다.”

K씨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한 영적인 고통’을 겪고 있었다. 몇 번의 상담을 받고 난 뒤 K씨는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난다는 이야기를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호스피스 치료를 통해 기침이나 통증도 어느 정도 조절이 되자 그토록 자지 못하던 잠도 잘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동안 가족을 불편하게 하였던 K씨의 짜증과 화내는 것이 한결 누그러졌다.

환자의 가정을 방문하는 호스피스 봉사자와 신뢰관계가 형성되면서 환자와 부인은 자신들이 살아온 고단한 삶의 여정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이 환자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셔서 큰 형님과 함께 살았는데, 그는 학교 다닐 때 도시락을 싸주지 않았던 큰 형수에 대해, 넓은 과수원의 한쪽에 자신이 묻힐 수 있게 해달라는 마지막 부탁을 거절한 형님에 대해, 그리고 자신을 치료한 의사에 대해, 분노와 함께 그들보다 오래 살아야 한다는 오기를 품고 있었다. “내가 병을 반드시 고쳐 보다 더 오래 살아 저들을 다 죽이고야 말겠다.” 이런 분노가 마음에 가득 쌓여있었던 까닭에, 병원에서도 소란과 행패를 부린 것이었다.

그러나 성직자와의 영적인 상담이 계속되는 동안 환자가 변하기 시작했다. 우선 환자의 표정이 변하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형과 형수에 대해 적개심을 풀어 마음을 바꾸게 되었다. 오랜만에 방문한 형님과 형수에게 자기를 돌보아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면서 그동안 화를 내었던 것을 용서해달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형 역시 그동안 좀 더 신경 써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면서 과수원에 묻힐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또 그동안 자신을 치료했던 의사에게도 용서를 구했다. 그리고 밥을 먹을 때마다 때리곤 했던 막내 아들을 향해 “아빠가 너를 때린 것은 네가 미워서 그런 게 아니다. 밥을 잘 먹는 네 모습을 보면 아무것도 먹을 수 없는 내 자신에게 화가 나서 그랬다. 너를 때린 건 미안하다. 아빠를 용서해주겠니” 라며 용서를 청했고 막내아들은 울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내에게도 그동안 잠을 자지 못하게 하고 화내는 등 심하게 굴었던 것에 대해 용서해달라면서 사랑한다는 말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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