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저주한 살인자의 한마디
92년 세상을 놀라게 했던 여의도 차량질주 사건의 윤용제도 “자신을 냉대한 사회에 복수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해 8월 여의도광장에서 자전거를 타고 놀고 있던 어린아이들을 향해 훔친 차량으로 살인질주했던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22세였던 그는 시력이 나빠 어렵게 취직을 해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번번이 좇겨 나곤 했다. 형제와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해 사회에 복수한 다음 자살할 마음으로 살인질주 사건을 일으켰다. 최정수나 윤용제같은 사형수들은 대개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하면서 자랐다. 배운 것도 없고 돈도 없고 취직도 제대로 못하면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만 키웠을 뿐이다. 주위의 환경이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버거운 경우도 있으므로, 사회의 냉대와 불우한 환경에서도 어느 정도 원인을 찾을 수 있겠다. 그러나 사회 문제의 해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문제가 언제 해결될 지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우리 사회만이 아니고 어느 사회든지 문제 혹은 모순이 없을 수 없다. 더구나 그런 모순에 직면해 있는 것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해당되므로, 극단적인 행위의 책임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아니라 자기 자신의 몫일 수밖에 없다.
최정수나 윤용제 등이 살인을 저질러 사형선고를 받은 것처럼,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 세상에 대해 분노하면서 죽는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인과응보를 받게 된다. 자기 삶의 방식과 죽음의 방식은 기본적으로 스스로 선택한 것이므로, 자기 자신이 책임지는 것은 당연하다. 탐진치 삼독 가운데 하나인 분노는 우리 존재를 해치는 독약이나 다름없다. 분노로 가득 찬 생 각이나 말은 상한 음식을 먹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우리 몸에서 나쁜 독소를 야기한다. 자기의 분노를 무고한 사람을 향해 거칠게 표출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어리석음을 표출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을까. 더구나 세상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이 사회문제를 가장 고민한다고 말할 수도 없다. 다만 사회문제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는 방식이 어리석은 것일 뿐이다.
그런데 사람은 어떤 의미에서 사형수나 다름없다. 누구나 죽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최정수는 살인을 저질렀을 때에는 매우 포악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감옥에 수감되어 사형을 언도받을 무렵에는 지극히 선량한 모습으로 바뀌어 동일한 사람의 말일까 의심이 들 정도로 크게 달라졌다. “사람을 죽인 저는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습니다. 진짜 미친놈이 할 짓을 내가 왜 했는지 아직까지도 모르겠어요”. 그러나 사람들은 사형수처럼 자기 행위를 뉘우치면서 하루하루를 보다 의미있게 살기보다, 죽을 날이 머언 훗날까지 미루어져있는 무기수처럼 삶을 살아가면서 죽음에 직면하기를 뒤로 미룬다. 세상을 저주하면서 죽자마자 후회할 것인지, 아니면 평소에 죽음 준비를 시작해 삶과 죽음의 방식을 심사숙고할 것인지 더 이상 뒤로 미루어서는 곤란하다.
한림대 철학과 오진탁 교수
jtoh@hallym.ac.kr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