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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죽어가는 사람의 다섯 번째 반응 : 슬픔의 사례

기자명 법보신문

극도의 상실감에서 오는 감정상태

죽어가는 사람들의 반응은 첫째 절망 혹은 두려움, 둘째 부정, 셋째 분노, 넷째 삶의 마무리, 다섯째 슬픔, 여섯째 수용, 일곱째 희망 여덟 번째 유머 혹은 웃음, 마지막 밝은 죽음이다. 이런 아홉 가지 반응은 단계 혹은 과정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사람마다 각각 다양하게 반응하므로 순차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첫째 반응에서부터 진행되어 마지막 반응으로 종결되는 그런 과정을 거쳐서 사람들이 죽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두세 가지 반응이 동시에 관찰되기도 하고, 삶을 마무리하는 모습(네 번째 반응)을 보여주다가 갑자기 죽음에 대한 절망이나 두려움(첫 번째 반응)을 표출하기도 하는 등 죽음이란 절대명제 앞에서 말기환자는 감정적으로 크게 흔들린다.

따라서 죽어가는 사람의 아홉 가지 반응은 말기환자의 다양한 모습을 단지 유형 별로 정리한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제 다섯 번째 반응 슬픔의 사례를 살펴보면,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게 될 때, 증상이 점점 뚜렷해지고 몸이 현저하게 약화될 때, 환자의 초연한 듯한 자세와 무감정, 분노와 격정은 머지않아 극도의 상실감으로 바뀌게 된다. 이런 상실감은 여러 가지 양상을 띄게 된다. 유방암을 앓는 여인은 미용문제를 한탄하게 되고 자궁암에 걸린 여인은 이젠 자기가 여자가 아니라는 자조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어느 오페라 가수는 턱과 얼굴에 심한 악성종양이 생겼다. 방사선 치료를 위해 이빨을 모두 뽑아내야 한다는 진단을 받고 충격과 함께 지독한 우울증 증세를 보였다. 아무 준비없는 상태에서 갑자기 찾아온 죽음에 대해 이런 식으로 극도의 상실감을 나타내는 것은 어쩌면 인지상정의 감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한씨 부인은 사려깊고 조용한 여성이었다. 오른쪽 유방암으로 수술을 받은 후 한동안 잘 지내다가 재발하여 항암치료를 받던 등 호스피스에 의뢰되었다. 호스피스 봉사자가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방문해 신뢰관계가 형성되면서 그녀는 낮은 목소리로 자신의 지나온 삶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호스피스 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두 달 정도 지나면서부터 그녀는 ‘죽음 예감을 통해 느껴지는 예비적 우울’을 겪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머지않아 죽게 될 것을 알았고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면 슬퍼져서 감정은 한없이 낮아져 말이 없어졌다. 한숨을 내쉬곤 했는데 들릴 듯 말 듯한 낮은 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떨~어~지~는 저~낙~엽~을 내~가~다~시~볼~수~있~을~까. 나~는 이~걸 생~각~해~봐~요. 이~게 마~지~막 이~구~나. 지~금 보~는~것~을 다~시~는 보~지~못~하~겠~구~나라고 생~각~하니....”

그녀는 자신의 주변을 살펴보면 문득 생경스럽게 느껴져 가만히 음미해본다고 말했다. 이제 서서히 다가오는 자신의 떠남을 생각하면서 이 세상과 앞으로 다가올 세상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감정은 우리 삶의 일상적 소란스러움과 상당히 다른 것이었다.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앉아 텔레비전을 시청하면서 웃고 있으면, “저~게~뭣~이~저~렇~게~재~미~있~을~까” 의아스러워진다고 말했다. 한동안 예비적 우울의 단계에 머물러 있던 그녀는 자신의 지나온 삶을 가만히 돌이켜 보니 모두가 자신과 가족만을 위해 이기적으로 살았다고 말하면서 이웃과 국가를 위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어서 너무나 부끄럽고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장기기증, 필요하면 시신 전부라도 기증하고 싶다고 했다. 가족회의에서 그녀는 ‘인간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했으며 무의미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에 종지부를 찍기 전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인류를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자신의 각막으로 누군가 밝은 세상을 볼 수 있고 의대생의 해부학 실습을 통해 의학 발전에 기여할 수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림대 철학과 오진탁 교수
jtoh@hallym.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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