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⑫ 밍군 대탑 - 거대한 전탑에 서린 꽁바웅 왕조의 비운

기자명 법보신문

<사진설명>시원하게 펼쳐진 이라와디강 뒤로 세계 최대의 전탑인 밍군 대탑이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아침 7시, 미얀마의 마지막 왕도(王都) 만달레이를 순례하기 위해 눈을 떴다. 호텔에서 간단하게 빵과 홍차로 아침을 들고 나니 포만감에 비로소 어제의 일이 환영처럼 아른거린다. 어제의 여정은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그야말로 악몽 같은 것이었다. 미얀마의 개마고원 깔로의 무서우리만치 가파른 산길과 폭풍처럼 몰아치는 먼지바람은 이미 각오한 상태였지만 ‘푸드득’하는 단말마적인 비명과 함께 버스가 길 위에 서 버리는 일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더구나 시간은 새벽 12시.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길 위에 버려진 신세라니! 그 때의 무서움과 막막함, 그리고 처량한 기분은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결국 2시간 이상을 길에서 떨고 나서야 어디에서 구해온 것인지도 알 수 없는 낡은 픽업트럭을 타고 빨래판 같은 도로를 널뛰듯이 날뛰며 겨우 만달레이에 도착했다. 이러니 만달레이에서 맞는 아침 햇살에 대한 감회는 남다를 수 밖에 없었다.

만달레이는 미얀마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기 전 왕조였던 꽁바웅 왕조의 마지막 수도였던 고도다. 시내 곳곳에는 성과 사찰 등 고풍스런 유적들이 도시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고 있다. 특히 시내 외각의 언덕, 일명 만달레이 언덕은 부처님이 재세 당시 아난존자와 함께 다녀가셨다는 설화가 남아 있는 곳으로 수많은 미얀마 사람들의 귀의처로 이름이 높다. 당시 부처님은 이곳을 순례하며 “내가 죽은 후 2400년 후에 위대한 나라의 왕도가 될 것이라고 수기하셨다”고 한다.

<사진설명>밍군 대탑 뒤쪽에 자리잡은 작은 사원. 일본군이 약탈한 흔적이 남아 있다.

물론 미얀마 사람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역사적인 시각으로 보자면 사실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부처님과의 인연을 통해 권위를 확보하려 했던 미얀마 사람들의 마음 씀이 십분 느껴지는 대목이다. 일행은 만달레이에 대한 본격적인 순례에 나서기에 앞서 미얀마의 젖줄 이라와디 강을 건너 고대 도시 밍군으로 향했다. 미완성의 아픔을 담고 있는 세계 최대 전탑 밍군 대탑을 먼저 친견하는 것이 만달레이 순례의 정석이기 때문이다. 선착장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강가에서 조각배를 타고 물 위로 나섰다.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리는 이라와디강은 그대로 바다였다. 조그만 섬과 즐비하게 늘어선 수상 가옥들, 강가에서 목욕하고 빨래하고 동물들에게 물을 먹이는 모습이 문명의 이기에 오염되지 않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강 위에는 돛단배, 모터보트, 나룻배 등 각양의 배들이 어울려 평화롭게 강물을 젖처럼 빨고 있었다.

한가한 물가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나의 눈은 어느새 초점을 잃고 물을 따라 흘러가고 있다. 물 위에는 이름모를 새들이 날고 뛰고 헤엄치며 그들의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이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흘러가는 물길에 지쳐 눈이 흐릿해질 무렵, 갑자기 거대한 산이 조금씩 시야를 장악해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강가를 따라 이어졌던 초목의 푸른 선이 ‘툭’ 소리를 내며 끊어지고 말았다.
시야를 가득 메우며 다가오는 붉은 산, 밍군 대탑이 달려들 듯 서 있다. 그래! 저건 탑이 아니라 차라리 산이라고 해야 옳다. 배에서 내려 선착장에 몸을 부리자, 탑은 몸집을 더욱 부풀려 놀라움을 넘어 위압적으로 다가온다.


밍군 대탑은 미얀마 마지막 왕조 꽁바웅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상륜부를 올리지 못한 채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게 된 탑의 슬픈 운명처럼 한때 번영을 누렸던 꽁바웅 왕조도 탑 건립을 계기로 쇠락의 길을 걷다가 끝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비운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밍군 대탑의 건립은 1790년 꽁바웅 왕조의 패기에 찬 젊은 왕 보도페이야에 의해 시작됐다. 왕은 자신의 등극을 자축하기 위해 세계에서 가장 큰 탑을 짓겠다는 원력으로 야심차게 불사를 추진했다. 당시 탑 건립에 동원된 인원은 대략 1000여명. 노예와 전쟁포로 등이 주류를 이뤘는데 공사는 노동자들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가혹했다고 한다. 적은 인구수와 국력은 생각하지 않고 7년 동안 노동자들을 혹독한 노역의 현장으로 몰아붙인 결과 불사는 결국 중단되고 말았다. 고통을 참지 못한 노동자들이 목숨을 걸고 인도로 도망쳐 버렸던 것이다.

<사진설명>사찰에 금칠을 하고 있는 미얀마 노동자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노동자들의 도망에 분을 참지 못한 왕은 그들을 잡아오겠다는 일념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던 인도를 침범했다. 당시 인도는 영국의 식민지 상태. 호시탐탐 중국으로의 무역로 확보를 노리던 영국은 국경 침범을 구실로 미얀마를 침공했고, 결국 3차례의 전쟁 끝에 꽁바웅 왕조는 역사 속으로 영원히 그 자취를 감췄다. 물론 영국과의 전쟁 와중에도 불사가 재개됐지만, 보도페이야왕이 세상을 떠나자, 밍군 대탑은 미완성의 상태로 그대로 버려지게 되면서 다시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더구나 1838년에는 지진까지 발생해, 탑의 측면부와 기단부가 상당부분 훼손됐는데, 아마도 불사 현장에서 피를 흘렸을 노동자의 원혼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이었을까? 파란 하늘을 이고 서 있는 탑은 당당한 위용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을씨년스런 기운을 품고 있다. 가로 200m에, 높이만 150m. 단일 전탑으로 그 크기를 비교할 곳이 없을 정도로 엄청난 규모이지만 별다른 장식 없이 벽돌로만 쌓아올린, 측면이 허물어진 탑은 애잔한 감상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더구나 탑 공사에 동원됐다 고통 속에 죽어갔을 수많은 민초들의 한(恨)을 생각하니 이내 가슴 한 구석이 답답해진다.

아무려나, 탑의 측면에 놓여있는 계단을 통해 꼭대기에 올라 바라 본 전경은 천연의 아름다움 그 자체다. 옥빛 하늘을 배경으로 푸르게 펼쳐진 숲은 점점이 박힌 탑과 사원을 안고 넓게 자리를 폈고 그 앞으로 이라와디강의 쪽빛 물줄기가 손에 잡힐 듯 아스라이 들어온다. 모든 것이 시원스럽게 툭 터져 보는 이의 몸에서 쌉쌀한 바람이 가슴 속을 훑고 지나간다. 탑의 꼭대기는 이곳 밍군에서 가장 좋은 전망대였던 셈이다.

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세계에서 두 번째로 크다는 밍군종이 걸려 있다. 19세기 러시아에서 미완성의 종이 건립되기 전까지는 세계에서 가장 큰 종이었다는데 무게가 무려 90톤에 이른다. 이 역시 보도페이야왕에 의해 주조됐는데 제작에 참여했던 기술자들은 종 완성과 동시에 죽임을 당했다. 다시는 이와 같은 종을 만들 수 없도록 하기 위한 왕의 지독한 이기심 때문이라니, 인도 타지마할의 비극에서도 알 수 있듯이 통치자의 잘못된 신념이 빚어내는 참담한 역사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kimh@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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