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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선등선원장 현 산 스님 법문

기자명 법보신문

이 주장자가 물질이면 마음은 어디 있는가!

4월 3일, 부산 범어사에서는 ‘10대 선사 초청 설선대법회’의 반결제에 해당하는 다섯 번 째 법석이 열렸다. 이날 4천 여 명의 사부대중을 위해 법좌에 오른 구례 화엄사 선등선원장 현산 스님은 주장자를 들고 “이것이 물질이라면 어떤 것이 마음이고 이것이 마음이라면 어떤 것이 물질입니까?”라는 화두를 던졌다. 질의법사로 나선 종대 스님과는 법거량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문답을 나누기도 한 현산 스님은 “의심 덩어리가 홀로 드러나는 ‘의단독로’를 이루기 위해 간절하게 정진하라”고 강조했다. 스님의 법문을 요약 개재한다. 편집자 주

須菩提 若有善男子善女人
初日分 以恒河沙等身 布施
中日分 復以恒河沙等身 布施
後日分 亦以恒河沙等身 布施
如是無量百千萬億劫 以身布施
若復有人 聞此經典 信心不逆
其福 勝彼 何況書寫受持讀誦
爲人解說

금강경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항하사 같은 마음으로 아침과 점심, 저녁에 보시하고, 무량백천만억겁을 몸으로 보시하는 공덕이 한량 없지만, 이 금강경을 듣고 믿는 마음이 거슬리지 아니하면 그 공덕은 더 한량없다는 말입니다. 즉 선의 도리를 믿는 사람의 공덕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과거 생에 지은 공덕 없이는 이 자리에 앉을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그런 수승한 공덕을 지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앉아서 법문을 듣게 된 것입니다. 깨달음의 바탕은 공(空)입니다. 바로 그 ‘공 도리’를 가장 힘차게 드러낸 경전이 금강경입니다.
임제종의 양기파 시조 양기방회(楊岐 方會) 선사가 수좌 시절 자명 스님을 모실 때 공부에 진전이 없자 스님께 쫓아가서 “선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물으면 자명 스님은 “나는 자네보다 못하니 스스로 깨닫게나”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깊은 뜻을 헤아릴 수 없었던 양기 스님은 한참 공부를 하다가 또 안 돼 쫓아가서 “어떤 것이 도입니까?” 하고 물어보았으나 자명 스님은 똑 같은 답변만 거듭했습니다. 어느 날 자명 스님을 모시고 길을 나서는데 큰 비가 쏟아졌습니다. 길 양쪽에 담벼락이 있는 좁은 길을 만난 순간 양기 스님은 깊은 생각이 솟아올라 자명 스님에게 청했습니다. “이 자리서 일러주십시오. 지금 일러주시지 않으면 스님을 주먹으로 한 대 치겠습니다.” 자명 스님은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자네만 못하니 스스로 깨닫게나.” 이 말에 양기 스님은 확철대오 했습니다. 그 뒤 양기 선사는 임제 스님의 법맥을 이었는데 자명 스님은 도리어 양기 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도를 구하고자 하는 한 마음 때문에 양기 선사는 깨달은 것입니다.

늦게 출가해 선방에서 정진하던 한 스님이 있었습니다. 정진이 잘 안되자 일찍 출가한 나이 어린 스님에게 “어떻게 해야 도를 이룰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 스님은 장난기가 동해서 “앉아 있을 때 내가 공으로 세 번 때리기만 하면 도를 이룰 수 있다”고 했습니다. 간절한 마음이 극에 달했던 그 스님은 “내가 앉아 있을 테니 공으로 세 번 때려 달라”고 하고는 앉았습니다. 그 어린 스님이 공으로 머리 세 번을 내리쳤는데 그 자리서 스님은 아라한과를 증득했습니다.

지극한 신심이 도원(道源)입니다. 공덕은 도의 어머니입니다. 신심을 갖고 이 법문을 들으면 비록 제가 법문을 잘 못하더라도 오늘 이 자리에 오신 성과를 거둘 것이지만, 아무리 선승이 법문을 잘 할 지라도 신심 없이 들으면 한낮 꿈 이야기에 불과할 것입니다.

옛 스님이 이르시기를 “수행인은 모든 물질을 볼 때 마음을 본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것(주장자 들며)이 물질이라면 어떤 것이 마음이며, 이것이 마음이라면 어떤 것이 물질이겠습니까? 마음이 있으면 물질이 항상 나타나거늘 물질을 택해 놓고 마음을 찾으려고 하다 보니 못 보는 겁니다. 또 이르시기를 “선은 색성언(色聲言)에 다 드러나 있다”고 했습니다. 색이란 물질이고, 성이란 소리이며 언이란 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주장자 보이며)이 선이고, 이 소리(주장자 내려 치며)가 선이며, 제 말이 바로 선입니다. 이 순간 알아차리면 근심 걱정 다 여의고 항상 즐거울진대 그렇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선의 길로 좀 더 안내하겠습니다. 이 선의 길은 비사량처입니다. 생각을 놓아야지 생각하는 순간 어긋납니다.

제17조가 되신 승가난제 존자가 교화를 하시러 전역을 다니시던 중 한 마을에 이르러 동자를 만났습니다. 합장 배례를 하는 동자를 자세히 보니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얼굴이 참 맑았습니다. 승가난제 존자가 “참 착한 아이로구나. 그래, 몇 살이냐?”고 묻자 이 소년 한다는 말이 “100살입니다”하지 뭡니까. “어째서 100살이냐?”고 다시 묻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백살을 먹더라도 마음을 깨닫지 못할 것 같으면 하루를 살더라도 이 마음을 깨달은 사람만 못하다고 했습니다”고 말했습니다. 보통 선근이 아님을 알아차린 승가난제 존자는 그 아이 집에 가 보았습니다.

그 부모 역시 신심이 깊어 아이를 출가시키면 어떻겠냐고 존자가 청하자 “스님을 뵙고 이 아이의 자질을 알았다”며 두말하지 않고 허락했습니다. 승가난제 스님의 상좌가 된 이 아이는 열심히 정진해 갔습니다.

승가 난제 스님이 상좌를 데리고 어느 여름날 정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풍경소리가 ‘뎅그렁 뎅그렁’울렸습니다. 스승이 상좌에게 “저 소리가 풍경에서 나느냐, 바람에서 나느냐?” 하고 물으니 상좌는 “풍경에서 나는 것도, 바람에서 나는 것도 아닙니다”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그러면 어디에서 나느냐?”하고 물으니 상좌는 “마음에서 납니다”했습니다. 스승이 다시 “소리 나는 마음이 어떤고?”하고 물으니 상좌는 “참마음은 적적합니다”했습니다. 이에 승가난제 존자는 “네가 내 대를 이을 것”이라며 인가했습니다. 이 상좌가 바로 18조 가야사다 존자입니다. ‘소리 나는 마음’이라는 말은 아무한테서나 나올 수 있는 소리가 아닙니다. 깃발이 움직이느냐 바람이 움직이느냐 하고 싸울 때 육조 혜능 스님은 “움직이는 것은 바람도 깃발도 아니라 그대의 마음”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쉬운 말 같지만 격식을 뛰어 넘은 무서운 소리입니다. 법안 선사가 평했듯이 ‘깨달은 소리’즉 깨달은 이의 경계를 바로 드러낸 소리입니다. 선이라는 것은 바로 막힌 곳을 뚫어서 알아야 합니다. 분별로 헤아려서 아는 도리가 절대 아닙니다.

심즉시불(心卽是佛)이라 했습니다. 이 도리를 믿고 정진하고 정진해야 합니다. 영명연수 선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진정한 선지식을 만나거든 간절한 마음으로 묻고 배워라. 설사 수행해도 깨닫지 못하고. 배워서 이룬 것이 없다 할지라도 오랫동안 들으면 절로 도의 종자가 되어 세세생생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사람 몸 받아 언젠가는 하나를 들으면 천을 깨달을 것이다.”

나라는 것이 깨어날 때 무량 백천만상의 세계가 다 깨어납니다. 억천겁 억만겁 세계가 다 여러분 마음속에 있습니다. 임제 스님도 “법문 듣는 여러분이 부처”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온 천지가 있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온 천지가 없어지며, 이것이 즐거우면 온 천지가 즐겁고, 이것이 괴로우면 온 세상이 다 괴로운 법입니다. 온갖 신령함이 다 갖춰져 있기 때문에 여러분 마음이 만법의 약입니다.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인 것도 이 마음 도리를 드러내 보인 것이고, 달마 대사가 면벽을 하고 계신 것도 이 마음 도리를 드러내 보이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뭣고, 이 뭣고 하는 그 간절한 생각, 이 마음이 여러분을 영원한 행복의 길로 인도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내 본래면목을 깨달아야 참 지혜가 드러납니다.

이 몸뚱아리는 하찮은 것입니다. 별 볼일 없이 욕망만 피우다가 죽으면 축생이나 다름없습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부처님 제자라면 이 도를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합니다. 이처럼 위대한 법을 만났을 때 ‘깨닫겠다’는 간절한 마음을 내어 정진할 때 여러분의 가정과 사회가 평안해지고 온 세계가 평화로워 집니다.
부산지사=주영미 기자
ez001@beopbo.com


현산 스님은

1943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난 현산 스님은 1961년 19살 때 현재 화엄사 조실이신 도천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4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범어사에서 비구계를 수지했다. 1997년부터 화엄사 선등선원 선원장을 맡아 지금까지 후학 지도에 진력하고 있다.
현산 스님은 노동을 통한 선 수행을 실천하고 있는 도천 스님의 ‘선농일치(禪農一致)’의 가르침을 받아 직접 목장갑을 끼고 절 살림살이를 돌보며 수행하고 있다. 현재 조계종 전국선원 수좌회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질의응답]

<사진설명>법석의 회가 거듭될수록 더욱 많은 불자들이 매주 일요일 부산 범어사 경내를 가득 메우고 있다.

“수행본사란 옷 입고 밥 먹는 것”

- 질문자 종 대 스님
(벌교 동화사 주지)

Q.유년에 출가해 법을 수행하는 데 있어서 어떤 때는 어려움이 많아서 게으르고 나태해진 때가 있습니다. 헤어 나오지 못할 정도로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피눈물 나는 참회를 통해서 다시 발심을 하게 됐습니다. 이 설선법회에 모이신 모든 대중들이 부처님께 먼저 참회를 통해 수행을 일구어가는 그런 불자들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스님께 묻습니다.

수행의 요체, 수행의 본사는 무엇입니까?

A.옷 입고 밥 먹는 것이다. 옷 입고 밥을 먹되 옷 입은 생각도 없고 밥 먹는 생각도 없는, 그런 경지의 옷 입고 밥 먹는 것이다.

Q.향상일로에 천성도 전할 수 없는 도리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천성도 전할 수 없는 도리란 무엇입니까?

A.어려운 질문인데, 쉽게 표현하자면 그대가 묻고 내가 대답하는 이것이다.

Q.스님의 가풍은 무엇입니까?

A.봄이 오니 꽃이 피고, 새들이 울며, 가을이 되니 단풍이 져 낙엽이 지는도다.


“화두와 하나 될 때 의단독로”

- 질문자 박 근 호 거사
(부산경남 포교사단 수석부단장)

Q.의단독로(疑團獨露) 공부 내용을 알고 싶습니다. 또한 의단독로가 안 될 때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합니까?
A.참선수행자는 의단독로가 되어야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오직 의심덩어리가 홀로 드러나는 것을 의단독로라고 한다. 시작할 때는 샘에서 물이 졸졸 흘러나오듯이 의심이 끊어지지 않다가 그 의심 덩어리가 내 심신과 하나가 되어 하늘을 봐도, 땅을 봐도, 가고, 앉고, 밥을 먹어도 오직 의심하는 경지이다.
“일체 중생이 불성이 있는데 어째서 ‘무(無)’라고 했는고?”, “조사가 서쪽에서 온 뜻이 왜 ‘판치생모(板齒生毛)’ 인고?” 등 도무지 알 수 없는 이(화두)를 간절히 참구해 나가면 의단독로 되는 시절이 반드시 온다.

Q.간화선과 묵조선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그 차이점을 알고 싶습니다.
A.조사선을 먼저 알아야 한다. 조사선은 조사 스님께서 이미 이룬 깨달음의 세계를 목전에 드러내고 있는 법문을 말한다. 조사 스님께서 드러내는 그 경계와 말씀이 곧 화두며 ‘무(無)’, ‘판치생모(板齒生毛)’,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등 1700공안이 있다. 화두를 들어서 깨달음에 들어가는 것을 간화선이라고 한다.

묵조선은 묵묵히 경이로운 자리를 관조해서 비춰보는 것을 말한다. 유명한 조사가 있던 옛날에는 수승한 한 수행법 중 하나였다. 그러나 말세에 갈수록 무기공에 떨어지거나 이상한 경계에 팔려 도를 이룬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대혜종고 선사께서 말세 중생은 간화선을 해야 삿된 곳에 떨어지지 않고 빨리 도를 이룬다고 했다. 사람이라면 모두 간화선을 할 수 있다. 믿는 사람은 모두 최상승의 근기가 되어 버리는 좋은 법이다.

Q.달마 스님께서 선의 소의경전으로 능가경을 택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또한 스님께서는 능가경과 금강경 중 어느 경전이 선의 소의경전으로 더 적합하다고 생각하십니까?

A.능가경은 마음자리, 여래장사상, 공사상 등 세 가지가 체계적이고 조리 있게 잘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당시 선종을 모르는 많은 사람들을 이끌기 위해서는 가장 좋은 경이었다. 그 뒤 중국 5조 때부터 금강경이 소의 경전으로 되어 우리나라에도 계속 내려 왔다. 반야경이 핵심인 금강경에는 선사상을 가장 가깝고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참으로 있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고, 참으로 없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니라는 진공묘유의 도리를 잘 드러냈기 때문에 선의 소의경전으로 채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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