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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과 친한 사찰 만들겁니다”

기자명 김민경

부디스트라이프 - 미국에 한국 전통사찰 짓는 무량 스님

스님의 본명은 Erikd Berall. 나이를 묻자 “59년생 돼지띠예요”란다. 수재들만 간다는 예일대학에서 지질학을 전공했다. 고등학생 시절엔 건축을 전공하고 싶어서 건축관련 책을 독파하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대학에 진학 한 후 요가와 명상을 만나 심취했다. 3학년 무렵 그의 대학가에 숭산 스님의 초청법회를 알리는 포스터가 나붙었다. 그 포스터 한 장으로 푸른 눈에 큰 키를 지닌 미국인 청년은 그 자신조차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삶으로 뛰어들었다.



출가

포스터의 내용은 뉴헤이븐 시의 한국선방에서 숭산 스님의 법문이 열린다는 것. 그곳은 대학에서 5분 거리였다. 법회에 참석한 후 그는 거처를 한국선방으로 옮기고 1년여 머무르며 그곳에서 대학을 졸업했다. 그리고 숭산 스님의 유발상좌가 됐다. 82년에는 20여명의 미국인 불자들과 한국을 방문하여 한달 동안 전국의 명산대찰을 순례했다. 한국사찰의 멋과 독특한 가풍을 접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후 그는 숭산 스님이 해외로 전법활동에 나서면 그림자처럼 수행하게 되었다. 숭산 스님의 발길은 전 세계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때 브라질 방문 길에서 출가할 결심을 굳혔다. 브라질은 극심한 빈익빈 부익부의 사회였다.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는, 믿을 수 없는 세계-그러나 그것은 현실이었다. 부처님께서 사문유관 끝에 출가를 감행한 것처럼 그도 지옥보다 더한 현실을 자신의 눈으로 확인 한 후 출가를 결심했다.



수행과 만행

1984년부터 한국에 머무르며 수행했다. 화계사와 수덕사, 금산 태고사 등지에서 안거에 들었고 해제 중에는 서울 시내의 어학원에서 한국어를 익혔다. 큰 스님의 법문을 정확히 알아듣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말부터 배워야 했다. 100일간 매일 화계사에서 버스를 타고 시내에 다니며 글과 말을 익혔다. 그러던 중 두 스님을 알게 되었다. 태고사의 도천 노스님과 천축사 원공 스님.

도천 스님은 ‘노동이 곧 수행’ 혹은 ‘운력=수행’이라하여 평생을 지게 지고 나무하며 모든 불사를 손수 해내시는 것으로 유명한 분이다. 그 스님 곁에서 몇 달 지내며 소처럼 일을 했다.

원공 스님은 한국에 오자마자 우연히 알게 되었다. 평생 문명의 이기를 거부하고 걸어만 다니시는 분이라는 소개를 받고 출가 후 일부러 찾아가서 스님으로부터 ‘걷기 비결’을 전수 받았다. 그 결과 86년 아시안 게임이 끝난 후 44일간 도보로 만행했다. 서울에서 출발하여 강원도 일대의 명산을 쭈욱 한 바퀴 돌고 경기도를 거쳐 임진각까지 오직 걸어서만 다녔다. 그 다음엔 서울에서 강화를 거쳐 서해안을 따라서 진도까지 다녀왔다. 이 코스는 석달이 걸렸다. 이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도 하기 힘든 대장정이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

“물론 몸은 힘들지요. 그러나 걷다보면 차츰 잡념이 사라지고 마침내 일념을 얻게 돼요. 몸을 조복 받는 것도 좋구요. 또 걸으면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이것 또한 큰 소득입니다. 스님은 물론이고 전국의 많은 사람들의 수행과 삶을 몸으로 부딪혀 알게 되었지요” 그 길에서 한국의 명당이란 명당은 모두 눈으로 확인하고 한국 고찰이 지닌 멋과 미감을 체득했다.

출가 한지 3년 후 수덕사 산내 작은 암자에서 1년간 혼자 공부했다. 종일 참선에 들 수 있어 너무 너무 행복하고 편한 시간 이었다. 그러다가 문득 미안한 마음이 일었다. “나만 편하면 안돼지, 내 고향에도 이런 수행도량을 어서 만들어야 해”. 그 후 그는 미국행을 결심했다.



다시 미국으로

89년 여름 미국으로 돌아갔다. 먼저 미국 땅을 한 바퀴 돌았다. 다음 해 LA 달마선원의 주지소임이 맡겨졌다. 법회도 열고 포교당 수리도 하는 그런 저런 나날들 속에 우연히 부동산업체에서 보내온 광고문을 보게 되었다. 먼 사막 너머의 땅을 싸게 판다는 글귀가 보였다. “그 날 이후 전 절을 지을 만한 명당을 찾아내고 싶은 병에 걸렸어요”

1년 넘게 수많은 땅을 보러 다녔다. 매주 새로운 땅을 소개받아서 확인하러 나섰다. 지도를 들고 1년 동안 그 너른 대륙을 참 많이도 다녔다. 간혹 꼭 맘에 드는 자리가 나왔으나 가격이 너무 비싸 포기하거나 온천이 발견되어 포기하는 등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그러다가 한 지역을 소개 받았는데 10년 전 퓨마가 자주 출몰하여 소를 해쳤던 곳이었다. 퓨마에게 시달린 지역의 카우보이들이 퓨마가 살고 있는 동굴에 폭탄을 던지고 화염을 피해 동굴 밖으로 나온 퓨마를 총을 쏘아 사살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무량 스님은 이후 3년간 그 퓨마를 위해서 산신기도를 올렸다. 첫 해엔 일주일간 지장경을 읽으며 천도재를 지내 주었다. 천도재를 치른 지 두 달 후 꿈에도 그리던 절터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 보자 마자 ‘이 땅이다’ 했지요. 산신 기도 덕분에 찾아낸 것 같아서 절의 이름을 Mountain Spirit Center(한국이름은 태고사)라고 지었어요”



불사

절을 짓겠다며 사들인 땅의 면적은 무려 50만평. LA에서 북으로 160Km 달려 사막을 건너면 산이 연꽃처럼 둘러진 계곡이 나온다. 은행에서 대출 받고 속가의 조부가 스님 앞으로 남긴 약간의 유산을 보태어 땅을 사들였다. 은행 빚은 4년만에 다 갚았다. 94년경 새 절을 지을 땅으로 거처를 옮겼다. 말이 거처지 천막 한 채에 모빌 홈이라 불리우는 이동용 숙소가 전부였다. 그 속에서 살며 땅을 고르고 건물을 지을 나무를 마련했다. 굴삭기와 트럭을 사들여 석축도 쌓고 제재소도 설치해 모든 일을 혼자 벌여 나갔다. 약간의 돈이 생기면 인부를 사서 일을 하고 돈이 없으면 혼자서 했다. 건축 관련 책을 보고 일을 배워 나갔다. 혼자 하는 일이라 비용은 늘 제로 상태여서 불사는 더뎠지만 힘겹지는 않았다. 한 두명씩 자원봉사자들도 찾아 들었지만 결국 모든 일은 스님의 손 끝에서 이루어졌다. 4년 만에 요사채가 그럭 저럭 모양을 갖추어 세워졌다. 99년 4월 26일 부처님 오신날에 태고사 개원식을 가졌다.



생태도량

개원식을 연 후 매주 일요법회를 열고 있다. 많을 땐 70명까지 그러나 적을 땐 15명 정도가 법회에 참석한다. 올해부터는 매달 2박3일의 참선정진법회를 열고 있다. 10여명이 동참하는 작은 법회지만 열기와 근기 만큼은 여느 한국 사찰에 견주어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태고사엔 지금도 신도회가 없다. 오직 무량스님의 원력만으로 불사가 이루어지는 중이다. 스님이 직접 두 팔 걷어 부치고 나섬으로서 다섯 배 이상의 비용을 절감하며 한 발 한 발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스님은 태고사를 생태도량으로 건설하려 한다. 그래서 태고사엔 그 흔한 전기선과 수도가 없다. 전기는 풍력과 태양열로, 물은 우물을 파서 쓴다. 생활 하수는 철저히 분리하여 정화시키고 있다. “인류는 계속 팽창하지만 지구의 환경은 유한합니다. 우리가 머무른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은 자연의 일부분인 인간이 반드시 지켜야할 도리이지요”

스님이 출가를 감행했을 때 스님의 부친은 아무 말도 안했지만 매우 슬퍼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작년엔 태고사를 직접 찾아와 아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매우 흡족해하셨다고 한다. 스님은 태고사 불사를 시작한 후 그 좋아하던 참선 정진을 할 틈도 겨우 내고 있다. 몸은 몸대로 고되고 불사는 자주, 갖은 어려움을 만나고 있다(옆 상자 기사 참조). 그래서 스님에게 물었다. 행복하세요? 그랬더니 스님은 말한다.

“물론 이지요. 스님이 되어서 많이 행복해요. 우리는 세월처럼 빠른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해요. 내가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인지, 내가 무얼하러 이 세상에 왔는지, 나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지 의심하고 연구하는 삶 만큼 좋은 삶이 어디 있습니까? 불자가 되어 행복해요”

무량 스님, 초발심을 한결같이 유지하는 그는 정말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취재후기

무량 스님은 지금, 태고사 불사를 시작한 지 7년 만에 가장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불사 중에서 가장 심혈을 쏟은 대웅전 건축에서 동티가 난 것이다. 애초에 스님은 대웅전을 한국 전통사찰의 멋을 십분 살려서 짓고자 도편수와 목수 등 인력은 한국에서 데려와 일을 맡겼다.

그런데 그들이 지은 대웅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스님이 그리던 그런 건물이 아니었다. “대웅전이 지녀야 할 웅장한 아름다움과 멋은 간데 없고 요사채 처럼 지어졌다”〈사진〉고 스님은 매우 애석해 했다. 공사 대금의 대부분(14만불 중 13만불)을 공사 개시 초반에 지급한 상태이고 기술자들은 이역만리로 돌아가 버린 뒤라서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다시 지을 힘도 없다. 그래서 스님은 이만저만 속이 상한 게 아니다. 그저 ‘아이고, 아이고’를 연발하다가 “내가 바보였어요, 정말 바보였어요”라고 한탄만 한다.

“다시는 나와 같이 억울한 일을 겪는 스님이 없길 바랄 뿐”이라는 말로 모든 것을 잊고 다음 불사에 눈을 돌리는 무량스님의 모습을 곁에서 지켜본 불자들은 미안함과 안타까움에 몸둘 바를 몰라했다. 스님은 앞으로 요사채와 대웅전이 완공되면 기숙사와 선방을 지을 계획이다.

미국 태고사 주소 : Mountain Spirit Center 8400 Juniper Way Tehachapi CA 93561

전화 : (661)822-7776,

후원계좌 : 외환은행 031-18-38859-2 , 예금주 Erikd Berall.


김민경 기자
mkkim@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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