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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인도네시아 프람바난 사원

기자명 법보신문

원형마저 잃어버린 9세기 시바와 붓다의 전설들

<사진설명>자와 중부 족자카르타에 위치한 프람바난 사원은 힌두교와 불교가 교차하던 9세기 무렵 산자야왕조에 의해 건립된 사원이다.

보코왕의 아들인 반둥 본도워소왕자가 이웃 라라 종그랑공주를 사랑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는 데 실패하자, 보코왕이 라라공주의 아버지를 공격해서 사로잡았다. 하여, 아버지를 구하고자 반둥왕자의 청혼을 받아들이게 된 라라공주는 대신 ‘하룻밤 사이에 절 1천개를 지어 달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그러자 반둥왕자는 묵상 끝에 마술을 부려 땅 속으로부터 마귀들을 불러내 순식간에 절을 짓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999개 절이 완성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라라공주는 급히 하녀들을 깨워 쌀을 찧게 했고, 그 소리에 놀란 닭들이 울어대자 마귀들은 아침이 온 걸로 착각해서 땅 속으로 되돌아가버렸다.

그렇게 해서 결국 1천개 절을 짓지 못한 반둥왕자는 그 보복으로 라라공주를 석상에 가둬버렸다.


18C 식민주의자들에게 도굴 당해

이건 인도네시아 자와 중부 프람바난(Prambanan)의 ‘가냘픈 소녀’란 뜻을 지닌 라라 종그랑(Lara Jonggrang)사원에 얽힌 전설이다. 그 전설이 사실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여하튼 자와 중부로 가면 수많은 사원들이 늘어있다. 힌두교와 불교가 교차·경쟁했던 9세기 무렵 거대한 건설사업이 이루어졌던 결과다.

그 9세기는 중부 자와에서 힌두교를 앞세웠던 산자야왕조(Sanjaya Dynasty)가 내리막길을 걷는 동안 불교가 크게 확장되었던 시기로 꼽힌다. 그러나 825년, 다시 인디아로부터 동력을 얻어 새로운 문화와 기술로 무장한 힌두가 역공을 시작하면서부터 메라피산 남동쪽, 오늘날 프람바난이 거대한 사원 건축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 프람바난의 핵심이 바로 종그랑사원이다. 세 개의 사당으로 이뤄진 종그랑사원은 힌두 신들인 시바가 한가운데, 비슈누와 브라마가 각각 북쪽과 남쪽에 서있다.

<사진설명>인도네시아 불교의 '초발심' 보르부두르 사원.그렇다고 같은 시기 불교건축이 위축되었던 건 아니다. 특히 불교는 9세기 중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중부 자와 거의 전역으로 또렷이 확장되어 나갔다. 프람바난의 중심을 차지하는 종그랑사원 주변만 해도 불교 유적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비록 허물어졌고, 목 잘린 부처가 앉아 있긴 하지만 찬디 룸붕(Candi Lumbung)이나 찬디 부브라(Candi Bubrah) 같은 유적들은 그날의 불교를 잘 증언하고 있다.

현대에 이르러 콘크리트로 복원

이번 주 이야기로 프람바난을 꺼낸 까닭은 인도네시아 전역에 걸쳐 있는 불교를 다시 보자는 뜻에서다. 흔히들 인도네시아라고 하면 그저 세계 최대 무슬림 국가라고만 알고 있지, 세계 최대 불교유적 국가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지 않나 싶다. 어쩌다 인도네시아 불교를 안다는 이들을 만나 봐도 그저 보르부두르(Borobudur)가 다 인양 여길 뿐이었으니.

근데, 사실은 자와 뿐만 아니라 술라웨시나 보르네오 그리고 수마트라와 발리를 비롯한 인도네시아의 거의 모든 섬들에 수많은 불교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규모면에서야 물론 보르부두르를 따를만한 건축물이 없지만, 그 예술성이나 역사성을 놓고 본다면 결코 보르부두르에 뒤지지 않는 중요한 보물들이 구석마다 넘쳐날 정도다.

문제는 그 유적들의 보존상태다. 유적들이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화산과 지진으로부터 치명타를 입은 데다, 서양 식민주의자들로부터 도굴당하면서 본디 모습을 거의 상실해버렸다.

게다가 14~18세기를 통해 인도네시아 거의 모든 지역이 ‘형상’과 ‘상징’을 금지하는 이슬람문화권으로 편입되면서 불교와 힌두교 유적들은 그 정신마저 잊혀져 버리고 말았다.

물론 현대로 접어들면서 그 유적들이 지닌 가치에 눈 뜬 인도네시아 정부가 유적 복구를 위해 애써온 것도 사실이지만, 사회적 무관심과 학문적 바탕이 부족해 이미 무너져버린 역사를 되돌리기엔 명백한 한계를 보여 왔다.

그러다 보니, 많은 유적들이 본 바탕을 이루는 사암의 성질과는 전혀 다른 콘크리트를 밑감 삼아 졸속복구를 한 탓에 오히려 흉물덩어리로 변했고, 또 많은 유적들은 어설프게 손대다 만 폐허 상태로 흩어져 있다. 해서, 인도네시아 불교 유적 현장들을 보노라면, 왜 그 동안 뜻있는 이들이 “차라리 현대 기법으로 원형복구가 불가능하다면 아예 건드리지 말고 두었다가, 보다 정밀한 기술을 갖게 될 후손들 손에 맡기자”고 주장해 왔는지 절로 실감하게 된다.

<사진설명>인도네시아 불교의 '초발심' 보르부두르 사원.

마찬가지로, 학문적 연구부재도 원형복구에 치명적인 장애 요인이었음을 흘려 넘길 수 없다. 인도네시아 역사 서적이나 자료들을 들쳐보면, 너무 자주 ‘알 수 없는’이나 ‘알려지지 않은’ 같은 학문적 자존심이 결여된 단어들과 마주치게 된다. 논문을 조작하고 사기 치는 놈들보다야 정직하다고는 할 수 있겠지만, 역사적 주제를 놓고 볼 때 매우 가까운 과거에 해당하는 기껏 700~800년 묵은, 그것도 형태가 존재하는 사원을 놓고 그게 불교였는지 힌두교였는지조차 가려내지 못한다면 문제가 심각하다는 뜻이다.

그 좋은 본보기로, 비록 불교와 힌두교가 비슷한 시기를 놓고 주도권을 다퉜다고는 하지만, 게동안(Gedongan), 세가난(Seganan), 켄달(Kendal)을 비롯한 7~8개 유적의 정체를 아직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보르부두르 인근 유적지를 꼽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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