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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도코지(東光寺) 下

기자명 법보신문

낙엽 뒤로 청춘 회상하는 장부의 뒷모습 떠올라

<사진설명>단풍에 휩싸인 도코지 대웅보전.

어린 시절 가슴 깊숙이 자리잡은 고독은 인간을 내면적으로 성숙시키기도, 때로는 감정 결핍 상태의 미완성물로 만들기도 한다. 그 상실감은 이후 그의 선택에 의해 삶의 질량을 변화시킨다. 그럼에도 한번 패인 감정의 골은 죽을 때까지 채워지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리 모토나리(毛利 元就, 1497∼1571). 전국시대 제일의 모략가이자 주고쿠의 패자로 불리는 그의 삶에서 항상 빠지지 않는 수식어는 ‘고독’이다.

1558년 8월 그가 큰아들 타카모토(隆元)에게 보낸 편지는 왜 모토나리가 고독과 상처 속에서 한평생을 살아야 했는지 짤막하게 알려주고 있다.

“나는 다섯 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오로지 형 모키모토(興元) 한 사람을 의지했는데 그 형마저도 내가 열아홉 되던 해에 죽어버렸다. 그 후 나는 부모·형제나 친척 중에 아무도 보살펴 주는 사람 없이 혈혈단신 혼자서 여태까지 어떻게든 살아왔다.”

모리 모토나리의 삶은 ‘나를 키운건 8할이 바람’이라는 서정주의 ‘자화상’ 시구(詩句)처럼 평생 바람 속에서 머물다간 발 없는 새의 행적이었던 것이다.
21살에 처음으로 전투에 참가한 후 75살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55년간 모리 모토나리는 226번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1년에 평균 네 번의 전투를 치른 셈이다.


그는 평생 어느 누구도 믿지 않았고, 어느 누구에게도 신의를 지키지 않았다. 자신에게 도움을 줬던 이들을 파트너로 인정할지언정 단 한번도 마지막까지 그들에게 성심을 다해 충성한 적은 없었다. 그리고 이용가치가 없어졌을 때는 가차없이 제거했다. 또한 자신을 단련시키기 위해 불교와 유학 등 사상 공부에도 상당히 깊이 심취했다. 지금으로 치면 작은 면의 면장에 불과했던 그가 전국시대 일본을 대표하는 무장, 주고쿠의 패자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냉혹한 지성’ 때문이었을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의 황량했던 삶과는 대조적으로 모리 모토나리에게는 ‘세 개의 화살’이라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자신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모토나리는 장남 타카모토(隆元), 차남 킷카와 모토하루(吉川元春), 삼남 코바야카와 타카카게(小早川隆景) 등 세 아들을 불러 각각 화살 한 촉씩을 내밀었다.

“그 화살을 한 번 부러뜨려 보아라.”
세 아들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화살을 쉽게 부러뜨렸다.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들들을 둘러본 모토나리는 다시 화살 3개씩을 나누어 주었다.

“그것도 한 번 부러뜨려 보아라.”
다시 화살을 손에 쥐고 꺾으려고 했지만 조금 전처럼 한 번에 꺾을 수가 없었다. 마음을 다잡은 다음에야 비로소 그 화살들을 부러뜨리는 광경을 느긋한 미소로 지켜보던 모토나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보았느냐? 이 화살은 한 개씩 꺾으면 쉽게 부러지지만 세 개를 묶으면 쉽게 부러지지 않는다. 너희들도 세 명의 마음을 하나로 합쳐 서로 협력한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꺾이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형제끼리 협력하며 살아가라는 교훈을 담고 있는 이 일화는 ‘세 개의 화살’이란 이름으로 일본 교과서에 실려 널리 알려졌다. 평생 ‘한 촉의 화살’로 살아가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모리 모토나리. 하지만 그의 아들들에게는 ‘恨과 외로움’을 물려주고 싶지 않았던 애틋한 부성의 표현이었으리라.

<사진설명>쇼인신사 입구에 서있는 비석.

도코지를 지나는 길에 잠시 일본 근대 사상가 요시다 쇼인(吉田松陰, 1830∼1859)의 집이었던 쇼인(松陰)신사에 들렀다. 일본 근대화의 산실인 이 역사적인 장소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쇼인신사 입구에는 이곳이 메이지유신의 발원지임을 알리는 커다란 비석이 서있다.

도코지가 위치한 하기시는 일본 역대 수상 8명이 배출된 지역으로 유명하다. 요시다 쇼인의 제자 중에서만 3명의 수상이 배출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사람이 바로 이토 히로부미이다. 한국인들에게 한일합방의 원흉으로 알려진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메이지유신을 성공시킨 근대화 기수의 한 명이자 요시다 쇼인의 가장 나이 어린 제자(당시 18세)였다.

‘도쿠가와 막부를 타도하고 황실을 다시 일으켜 근대화된 일본국을 세워야 한다’며 근대적인 국가관을 제자들에게 심어준 요시다 쇼인은 서른이라는 젊은 나이에 ‘혹세무민’이라는 죄목으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이때 마지막으로 다음의 글을 남겼다.

나는 지금 나라를 위해 죽으나, 군왕과 부모에게 폐를 끼쳤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지는 영원하다. 내 참마음도 영원의 신이 알고 있기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노라!

기존의 질서를 뛰어넘는 선견지명의 소유자 요시다 쇼인은 비록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지만 그의 제자들은 모두 메이지유신 현장으로 뛰어들어 일본 근대화의 주역이 되었다. 13명의 제자 중 3명이 수상을 역임했고, 6명은 대신이 되었으니, 일본국 근대화의 화신 다카스기 신사쿠(高衫晉作),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郞: 후일의 기토 다카요시(木戶孝允)이자 메이지정부의 총리대신), 메이지정부의 초대 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후일의 외무대신, 조선공사),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후일의 내무대신, 육군대신)와 같은 기라성같은 인물들이 요시다 쇼인에게 ‘호연지기’를 배운 젊은이들이었다.

근대 일본을 탄생시킨 메이지유신은 다다미 여덟장 크기의 방에서 요시다 쇼인으로부터 세상을 제패하라고 배웠던 제자들이 주동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요시다 쇼인이 학생들을 가르쳤던 4평짜리 서당 쇼카손쥬쿠(松下村塾)는 이층구조로 되어 있었다. 자신의 좁은 집으로 주코구·규슈 등지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들자 요시다 쇼인은 학생들을 따뜻한 다다미방에 재우고 자신은 차가운 다락방으로 올라가 잠을 잤다고 전해진다. 요시다 쇼인은 젊은 문도들에게 글보다는 ‘도의를 실현하는 기상〔浩然之氣〕’을 가르치는데 더욱 주력했다.

<사진설명>요시다 쇼인이 메이지 유신의 기수들을 길러낸 4평 규모의 서당 쇼카손쥬쿠. 그는 학생들을 따뜻한 방바닥에 재우고 자신은 다락방에서 잤다고 전해진다.

“늘 높이 날아올라서 긴 눈을 떠라(高飛長目)!”
“죽어서 불후(不朽)가 되려거든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말아라. 살아서 대업을 이루려면 오래 살아라!”
‘일본의 미래를 책임지라’는 요시다 쇼인의 가르침은 이곳에 모여든 젊은이들의 가슴 가슴에 커다란 태양을 심어주었다.

요시다 쇼인의 좁고 어두운 다락방을 보는 순간, 서부의 변방 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이토 히로부미부터 모리 수상까지 근현대 일본을 움직이는 인물들이 무더기로 배출된 것은 결코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우치 히로요를 비롯한 야마구치 사람들의 고급 문화에 대한 열정, 서구의 기독교를 스스럼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던 열린 시각, 모리 집안의 냉혹하기까지 한 현실 감각 그리고 요시다 쇼인이라는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은 이 땅의 청년들을 일본 최고의 브레인집단으로 길러내는 비옥한 토양이 됐다.

15세기 전국시대 전란을 피해 이곳 야마구치로 흘러들어온 예술인들은 작은 씨앗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야마구치를 지배하던 고급 문화인들의 긴 안목은 이를 커다란 나무로 성장시켰고, 결국 일본 근대국가라는 열매를 일구어냈다.

야마구치에서 만난 일본의 오늘은 결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우치 히로요가 갈망했던 아름다운 도시 사이쿄(西京)의 꿈은 결국 600년뒤 ‘세계 최대의 경제대국’이라는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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