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계도(法界圖)의 저술-2
법계도(法界圖)의 저술-2
  • 법보신문
  • 승인 2006.01.31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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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의 골수, 210자 법계도로 완성
많은 분량의 초고
여러번 압축 끝
불에도 타지 않는
7언30구로 집대성

스승 지엄 지도로
불후의 명저 남겨
표훈 등 제자들에
끊임없이 전승돼


<사진설명>의상 스님이 집대성한 『화엄일승법계도』. 안광석선생 화엄연기 참조.

의상은 많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고, 전하는 글 중에는 짧은 게송(偈頌)이나 발원문(發願文)이 대부분인데, 법성게(法性偈)를 비롯하여 일승발원문(一乘發願文), 백화도량발원문(白花道場發願文), 투사례(投師禮) 등이 그것입니다.

그의 저서로는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십문간법관(十門看法觀)』1권,『입법계품초기(入法界品?記)』1권,『소아미타경의기(小阿彌陀經義記)』1권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법계도』 이외에는 전하는 것이 없습니다. 아마도 이 저서들은 일찍부터 유통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법계도』는 의상의 대표적인 저서입니다. 『삼국유사』의상전교조에서 『법계도』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서술했습니다.

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과 약소를 지어 일승의 핵심을 포괄하였기에 천년(千年)의 귀감이 될 만하기에 다투어 소중히 지녔다. 이 밖에는 저술한 것이 없지만, 온 솥의 고기 맛을 알려면 한 점의 살코기로도 족하다.

『법계도』는 총장(總章)원년 무진(668)에 완성되었으며, 이 해에 지엄도 또한 입적했다. 이것은 마치 공자가 기린을 잡았다는 구절에서 붓을 끊은 것과 같다.


일연이 말하는 법계도서인이란 『법계도』를, 그리고 약소란 『법계도』에 관한 의상 자신의 주석서인『법계도기(法界圖記)』를 각각 지칭한 것입니다.

이 책의 끝에는「총장원년칠월십오일기(總章元年七月十五日記)」라고 저술시기를 밝혀 두었는데, 이로써 이 책이 668년에 당나라에서 집필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일연은 의상의 『법계도』가 스승 지엄(智儼)이 입적하던 바로 그 해에 씌어졌음을 강조했습니다.

지엄은 이 해 10월 29일에 돌아갔는데, 『법계도』는 이보다 100여 일 전에 완성되었습니다. 지엄은 의상의 『법계도』를 직접 검토했고, 또한 이의 유포를 허락하기도 했습니다. 그러기에 지엄이 『법계도』의 권위를 보증했다는 견해는 받아들여도 좋을 것입니다. 지엄이 의상의 『법계도』를 찬양했다는 내용과 더불어, 이 저술에 관한 연기설화가 최치원이 쓴 의상전에 수록되어 있었는데, 균여(均如)는 이 설화를 그의『화엄법계도원통기(華嚴法界圖圓通記)』에 다음과 같이 인용했습니다.

의상공(義相公)이 지엄법사에게서 화엄을 수학하고 있을 때다. 꿈에 용모가 빼어난 신인이 나타나 상공에게 일러주었다. “스스로 깨달은 바를 저술해서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이 마땅하다”

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총명약 10여 제를 주는 꿈을 꾸었고, 청의동자(靑衣童子)를 만나서 비결(秘訣)을 세 차례나 전해 받는 꿈을 꾸었다. 지엄이 이를 듣고 말하기를, “신주(神呪)받기를 나는 한 번이었는데 너는 세 번이었으니, 멀리서 찾아와 부지런히 수행한 응보가 이와 같이 나타났다”고 하였다.

이로 인하여 터득한 바, 오묘한 이치를 편차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분발하여 붓을 들고『대승장(大乘章)』10권을 편집해서 스승에게 그 잘못을 지적해 줄 것을 청했다. 지엄이 말하기를, “뜻은 매우 아름답지만, 문사가 오히려 옹색하다”고 하였다. 이에 물러나서 번거롭지 않게 하고 두루 통하게 한 다음『입의숭현(立義崇玄)』이라 이름 하였으니, 대개 그의 스승이 지은 수현분제(搜玄分齊)의 뜻을 숭상하기 위함이었다.

지엄이 의상과 함께 불전에 나아가 원을 맺고 이를 태우면서 말하였다. “말이 성지(聖旨)에 맞는다면, 원컨대 타지마소서.” 타고 남은 210자를 의상으로 하여금 주워 거두게 하여 간절히 서원하면서 다시금 맹렬한 불길 속에 던져 넣었으나 끝내 타지 않았다. 지엄이 눈물을 머금으며 찬탄하고, 그것을 엮어서 게송을 짓게 하였다.

의상이 며칠 동안 방문을 닫고서 30구를 이루어 삼관(三觀)의 깊은 뜻을 갖추었고, 십현(十玄)의 아름다움을 들어내었다.


이 기록에서 일차로 주목되는 것은 의상의 『법계도』가 스승 지엄의 지도와 승인 하에 집필되고 있었던 사실입니다. 지엄은 의상에게 터득한 바를 저술하도록 명했습니다. 의상은 처음『대승장』10권을 편찬했지만, 더욱 압축할 것을 지적받고서 다시『입의숭현』을 지었고, 이를 다시 요약하여 7언 30구 210자의 법성게로 완성했습니다. 이에 지엄이 눈물을 머금으며 찬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상의 법계도가 지엄의 엄격한 지도 아래 완성되고 있음과 마지막으로 지엄이 승인하며 찬탄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법융기(法融記)에 의하면, 지엄은 73개의 별인(別印)을 만든 바 있는데, 의상은 스승의 뜻을 깊이 이해한 까닭에 하나의 총상인(總相印)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의상은 스승 지엄이 만들었던 73개의 별인을 참고하여 하나의 인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법계도』의 저술이 많은 분량의 초고로부터 여러 차례 압축하고 요약하여 7언 30구에 이를 때까지 껍데기는 버리고 불태워, 끝내 불에도 타지 않는 사리와도 같은 핵심적인 알맹이만을 골라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에서도 타지 않는 글자 210자는 불후의 명저라는 의미도 있지만, 여기에는 지엄과 의상의 특별한 뜻이 스며 있기도 한 것입니다. 지엄은 입적 직전까지도 제자들에게 많은 말이 필요하지 않다고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다음의 기록이 그것입니다.

지엄법사가 돌아가시기 10일 전에 학도들이 나아가 물었다. 이에 법사가 대중들에게 묻기를 “경전 중의 일미진중함시방세계(一微塵中含十方世界)와 무량겁즉일념(無量劫卽一念)이라고 한 문구 등을 너희들은 어떻게 보느냐”라고 했다.

대중이 아뢰어 “연기법에는 자성이 없으니, 작은 것은 작은 것에 머물지 않고, 큰 것은 큰 것에 머물지 않으며, 짧은 것은 짧은 것에 머물지 않고 긴 것은 긴 것에 머물지 않는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다.

법사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그러나 아직 설익었구나” “무슨 뜻입니까?”라고 아뢰자, 스님은 말씀하셨다. “반드시 많은 말을 하지 마라. 다만 하나만 말하면 되니라.”


이처럼 지엄은 제자들에게 하나만 말해도 된다고 일깨워주었던 것입니다. 지엄의 이와 같은 견해와 의상의 『법계도』는 서로 잘 부합하고, 동시에 의상이 지엄의 교학을 잘 계승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일연은 『법계도』가 천년의 귀감이 될 만한 것이기에 사람들은 서로 다투어 소중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법계도』는 의상의 제자들에 의해 꾸준히 연구되고, 유통되었습니다. 표훈과 진정 등 10여 제자들은 스승 의상으로부터 『법계도』를 배웠습니다.

균여의 『화엄교분기원통초』에 의하면, 의상은 지통의 그릇이 완성된 것을 알고서 『법계도』를 주었다고도 합니다. 지통이 태백산 미리암굴에서 화엄관(華嚴觀)을 닦고 있는데, 하루는 갑자기 큰 돼지가 굴의 입구를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지통은 평상시와 같이 목각존상(木刻尊像)에게 정성을 다하여 예하였더니 그 상이 말하기를, “굴 앞을 지나간 돼지는 네 과거의 몸이고, 나는 곧 미래 과보로서의 불(佛)이다”라고 했습니다. 지통은 이 말을 듣고 곧 삼세(三世)가 일제(一際)라는 법문(法門)을 깨닫고, 후에 의상스님을 찾아 이를 이야기했는데, 의상은 그 그릇이 이미 완성되었음을 알고 마침내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표훈은 황복사에서 『법계도』를 강의하기도 했으며, 양원은 『법계도』에 관한 주기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신라하대에는 『법계도』에 관한 주석서로『법융기(法融記)』,『진수기(眞秀記)』,『대기(大記)』 등이 씌어졌습니다.

신림의 제자 법융(法融)은 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했습니다. 대기는 9세기 중엽이후 신라하대의 저술입니다. 이들은 고려시대에 이르러『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으로 집대성되기도 했습니다.

정리=탁효정 기자 takhj@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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