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⑥ 지장(김교각) 법사

기자명 법보신문

육신 썩지 않음은 보살의 삶 살라는 당부

누구나 지옥 짊어지고
고통-절망하는 게
사바세계 중생의 삶


개 ‘선청’은 내 도반
지옥 비우지 않고서
성불하지 않으리라


아미산, 보타산, 오대산과 더불어 중국 4대 불교 성지로 손꼽히는 중국 구화산. 매년 수십만명의 불자들이 찾는 이곳 구화산을 지장보살의 성지로 만든 분이 바로 지장법사 김교각(地藏, 696~794) 스님이다.

신라의 왕족으로 태어난 스님은 어려서부터 영민하고 힘이 남달리 세어 장사였으며 지혜와 위엄이 있었다. 유한한 현실적 가치보다 무한한 가치를 추구했던 그는 24세 출가해 법호를 지장이라 했으며 얼마 후 개 ‘선청’을 데리고 당나라로 구법과 교화의 길에 올랐다. 그곳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수행력으로 75년간 머물며 수많은 이들을 교화했다.

지장법사가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추앙 받은 것은 그가 99세로 원적하면서부터다. 제자들이 고탑 안 돌 항아리에 그의 육신을 모시고 3년 후 열어보니 그 때까지 살아계신 듯 생생했던 것이다. ‘중생을 모두 제도한 후에야 보리를 이룰지니 지옥을 비우지 않고서야 성불하지 않으리’라고 했던 지장법사의 서원과 삶이 경전의 지장보살과 너무나도 일치했기 때문이었다. 살아서 보살이 된 유일한 인물 지장 법사, 그를 만났다.

▷신라의 왕족이라는데 왜 한국에서 수행과 교화를 하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가셨나요?
“헤게모니를 둘러싼 왕자들 간의 피비린내 나는 쟁투가 싫었다. 왕족이라는 특권은 자의건 타의건 정치에 휘말리기 쉽고, 가사와 발우 하나로 살아가야 하는 수행자와는 동떨어진 삶이었다. 모든 걸 훌훌 털어버리고 정진만할 수 있는 곳, 그곳을 당나라라고 판단했다.”

▷지장보살하면 죽은 조상을 천도하고 그로 인해 현세에서 복을 받고자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은데요.
“지장보살님은 무불(無佛)시대에 적멸의 편안함을 마다하시고 우리들 중생과 더불어 같이 고뇌하는 독특한 부처님의 화신이다. 그 분께서는 중생들의 고통에 피눈물을 흘리시며 한 사람의 중생이라도 더 제도하기 위해 오탁악세 어디든 몸을 나투시어 대신 짐을 짊어지고 희망을 전하고 계시다. 도심(道心)을 품은 자라면 마땅히 모델로 삼을만 하지 않은가.”

▷그렇다해도 왜 하필 지옥중생을 다 구제하겠다는 서원을 세우셨습니까?
“땅속 지옥만 지옥이 아니다. 사바의 중생들은 누구나 지옥을 짊어지고 다니며 절망하고 괴로워하지 않는가. 이 땅, 그대의 현재 마음이 지옥세계와 다르지 않다.”

▷법사님 당시에도 지장신앙이 많이 알려졌는가 보죠?
“4세기 초 중국에서 번역된 지장경은 5세기에 한반도에 알려졌다. 그 무렵 백제는 지상보살상을 조성해 일본에 보낼 정도로 번성했다. 또 삼국통일 후 보천과 효명 두 태자는 오대산 남대에서 8대 보살을 위시한 일만지장보살의 진신을 첨례했다고 들었다. 그리고 원효대사께서도 『금강삼매경론』에서 ‘지장보살은 수승공덕으로 일체의 선근을 생장케 하는 모든 법의 어머니로서 모든 보살의 밝고 청정한 안목이며, 일체 중생을 다 제도한 뒤에 스스로 성불하겠다는 숭고한 정신을 실천하는 대자비심의 원행보살’이라고 일컬을 정도였다.”

▷기록에 보면 구화산은 원래 개인 민공(閔公)의 소유지였고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다던데요.
“내가 마을에 내려갔을 때 독실한 불자였던 그 분이 뭔가 도울 일이 없는가를 물었다. 그래서 가사가 덮일 만큼의 땅을 시주해달라고 했다. 그 분은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고 내가 가사를 펼치자 구화산 99개 봉우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덮였다. 이에 그 분께서 구화산을 시주하게 됐다.”

▷요즘이나 옛날이나 땅에 대한 욕심은 다 같을 듯싶은데 스님께서 그런 신통력을 보이셔서 그 분께서 좀 아까워하지 않았을까요? 한번 내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나의 신통력으로 가사가 구화산 전체를 덮었다고 보는가? 민공께서 보시하겠다는 마음이 1평이었으면 내 가사는 1평을 덮었을 것이고 10평이었다면 10평을 덮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사가 구화산 전체를 덮은 건 그 분의 무주상보시의 마음이 이미 구화산을 덮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으로 가실 때 볍씨와 차 그리고 선청이라는 흰 삽살개를 데리고 가셨다는데요. 볍씨야 가난한 사람들의 굶주림을 해결하고 차로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니까 이해되지만 왜 개까지 데리고 가셨나요?
“개와 사람을 구별하는 것은 나와 너를 구분 짓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생심의 산물일 따름이다. 선청은 뜻 맞는 좋은 친구였고, 함께 도를 구하는 도반이었으며, 나의 수행을 돕는 신장이었다. ”

▷구화산에서는 어떻게 수행하셨나요?
“처음에는 구화산 동쪽 골짜기에서 머무르며 정토경전을 공부했고 절 한 번 올리고 경전 한 글자 읽어가는 방식으로 화엄경을 공부하기도 했다. 또 나중에는 제자들과 함께 물길을 만들고 논밭을 개간했다. 하얀 흙과 쌀을 섞어 밥을 지어먹었는데 먹거리가 부족한 이유도 없지 않았지만 무소유와 고행의 정신을 몸에 익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아무리 수행자라도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생활하시다보면 고향생각도 날 듯싶은데요?
“경전에 보면 성도하신 부처님께서도 고향 카필라에 대한 생각이 애틋하신데 하물며 나라고 그러지 않았겠는가. 수많은 신라인들이 나를 찾아올 때면 고향땅 서라벌이 떠오르고 부모님 생각이 저절로 들곤 했다.”

▷법사님의 어머니께서 구화산까지 찾아오셨다고 들었는데 사실인가요?
“신라에서 내가 돌아올 것을 바라고 두 분의 숙부님을 보내셨다. 하지만 그 분들은 돌아가지 않고 이곳에 남아 수행하겠다며 출가하셨다. 그리고 얼마 후 내 어머니가 천리 바닷길을 건너 신라로 돌아가자고 하셨다. 하지만 아무리 어머니의 청이라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어머니께서 슬퍼 사흘 밤낮을 울며 보내시더니 앞이 보이지 않았다. 내가 날마다 물을 길어 눈을 씻어주니 다행히 다시 볼 수 있게 되셨다.”

▷그래도 불효 아닌가요?
“나를 믿고 정진하는 수백수천의 수행자들과 신도들이 있었다. 인정 때문에 어찌 법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불교에서 효는 무조건 부모의 뜻을 따르기보다 부모를 성불로 이끌도록 하는 것이다.”

▷법사께서는 입적 후 몸이 썩지 않는 육신보살로 공경 받고 있습니다. 구화산 주민들이 태양만 나오면 이불들을 내다 말릴 정도로 기후가 습한 곳인데 어떻게 썩지 않을 수 있는지 의아합니다.
“영국의 어느 서양철학자의 말했다는 것처럼 풀 한포기 이상의 기적은 없다. 샘솟는 옹달샘도 사과나무 한 그루도 연기의 관점에서 보면 온 우주가 정성을 기울인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하더라도 육신이 썩지 않는 것은 놀랄만한 일인 것만은 분명합니다. 왜 육신을 지수화풍 4대로 돌리지 않고 계속 보전하시는 건가요? 그것도 집착 아닌가요?
“집착이 아니라 방편이다. 부처나 보살의 세계는 인간의 소망이요, 영원히 채워지지 못한 저 먼 곳을 그리워하는 것이 아니다. 이 땅에서 이 몸으로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져야 하는 인류의 서원이다. 나는 90평생 그러한 보살의 길을 걷고자 했고 내가 걸었던 길을 뒷사람들에게 온몸으로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뒤늦게나마 한국에서도 스님을 기리는 기념관이 생기고 추모 행사도 열리고 있습니다. 또 많은 관련 책들이 나오고 매년 수만명이 넘는 분들이 구화산을 찾습니다. 거기에다 한중수교 15주년을 기념해 한국과 중국에서 동시 방영하는 ‘대한국인 김교각’이라는 드라마도 추진 중이라고 합니다. 감회가 새로우실 것 같은데요?
“나로 인해 한국과 중국이 서로 이해하는 계기가 된다니 고맙다. 그러나 나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존재가 되려 하라. 그것이 곧 ‘중생을 모두 제도한 후에야 보리를 이룰지니, 지옥을 비우지 않고서야 성불하지 않으리.(衆生度盡 方證菩提 地獄未空 誓不成佛)’라고 서원했던 지장보살의 길이요, 내가 걷고자 했던 길이다.”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사진설명>구화산에 모셔진 지장법사와 선청.

지장법사 어록

‘불문이 쓸쓸하여 집 생각 하더니/ 정든 절 떠나 구화산을 떠나는구나/ 난간에 기대어 죽마 타던 어린시절 그리워하던 너/ 금 같은 불도의 땅도 그대를 붙잡지 못하는구나/ 첨병곡의 달구경도 마지막이며/ 자명구의 꽃놀이도 끝이 났구나/ 서운해 눈물 흘리지 말고 부디 잘 가거라/ 노승은 안개와 노을을 벗하리라.’ 『全唐詩』 권808

‘비단옷 포의로 갈아 입고/ 불도를 닦으러 구화산 찾아온 몸/ 나 본디는 신라의 왕자/ 수행의 길에서 오용지 만났음이여/ 가르침 바라는 것만도 황송한데/ 오늘은 이렇듯 쌀까지 보내왔거니/ 기름끼 도는 밥 먹건만/ 지난날의 굶주림 잊을 수 없어라.’ 『靑陽縣誌』 『藝文志』


후세의 찬탄

“석가모니 입멸하니 일월이 부서져 내리는데 부처님의 지혜와 광명 의 큰 힘 내려주셨네. 보살님 대자대비의 힘 끝없는 고해에서 구해줄 수 있나니. 홀로 오래고 오랜 겁을 지내며 고해를 소통시켜 중생을 구해주는데 이 모든 것은 지장보살의 덕성이어라.” (唐 이백)

“험한 물결, 거센 바람, 대자대비한 일생, 세상 사람들을 위해 살으셨도다.” (中 홍일대사)

“지장 법사 교각 스님이야말로 경전이 예언한 지장보살의 화신이자 한국의 석가모니이시다.”
(中 구화산 방장)

“지장보살이 신라에서 태어나 중국으로 건너가서 교화하셨다는 것은 당시 당나라 천하가 지장보살의 구제의 손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태혁 동국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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