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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불협 전법팀장 법장 이경재 기관사

"포교는 희망 나누기입니다"

1970년대 초 이경재(46) 씨는 지긋지긋한 가난이 죽기보다 싫었다. 평생 농사꾼으로 살아온 늙은 부모님들이 일년 내내 등이 휘도록 일해도 남는 것은 빚뿐, 농촌은 절망의 땅이었다. 아버지 나이 50줄에 낳은 외동아들이었기에 '너만은 가르치겠다'는 일념에 학교를 보냈지만 호랑이보다 무섭다는 가난을 어찌 피할 수 있었으랴. 어린 그는 주린 배를 움켜지고 숱한 밤들을 지새야만 했고 어쩌면 이러한 굶주림은 당시 대다수 아이들이 겪어야 했던 지극히 일상적인 고통이었는지도 모른다. 중학교를 마칠 무렵 유난히 공부를 잘했던 그에게 마침내 이곳 영주를 떠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서울 철도고등학교에 입학하면 학비는 물론 숙식까지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무난한 성적으로 합격했고 73년 초 상경했다.



철도고 재학시절 불교학생회 창립

그러나 입학 후 서울생활에 대한 동경은 곧 절망으로 바뀌었다. 비록 학비와 숙식은 해결됐지만 책이나 학용품 등을 살 기본적인 생활비조차 없었기 때문이었다. 새벽에는 신문배달을 하고 저녁으로는 호텔에서 접시를 닦았다. 또 초등학생 지도에서 책방 점원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왜 서울에 올라 왔을까' '삶은 왜 이리 고통스러운 걸까' 회의와 번민에 자살도 여러 번 꿈꿨다. 그런 가운데 그에게 한줄기 빛처럼 다가온 것이 바로 불교였다.

먼저 태어난 형 4명이 잇따라 죽자 어머니가 절에서 100일 기도를 드리고 이경재 씨를 낳은 까닭에 어릴 시절부터 절을 집처럼 여기고 자랐었다. 그러나 그 때 뿐, 불교는 단지 어린 시절의 향수로만 남아 있었다. 그런 불교가 다시 그에게 '삶의 의미'로 다가 온 것은 바로 이 무렵부터였다. 지탱하기 힘든 삶의 버거움으로 가까운 조계사를 찾기 시작했고, 그곳에서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우며 불교에 눈을 떠갔다. 그러면서 불교란 삶의 고통을 극복하고 참다운 자유와 평화를 찾는 '행복의 종교'임을 확신했고, '불교가 내 삶을 건져 주었듯이 나도 불법 홍포를 위해 평생 노력하리라'는 차돌 같은 서원을 세웠다.

이런 결심과 함께 시작한 것이 자신이 다니는 학교에 불교학생회를 꾸리는 일이었다. 선생님들을 만나 취지를 말씀드리고 같은 학생들끼리는 불교의 합리성과 좋은 점에 대해 알려나갔다. 냉담하던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점점 바뀌어갔고, 마침내 74년 여름 철도고등학교에 첫 불교학생회가 문을 열었다. 불교학생회를 이끄는 동시에 그는 인연이 있던 신대방동 장안사에도 불교학생회를 만들었다. 고교시절은 이렇게 숨가쁘게 지나갔고 76년 1월 그의 뜻대로 영주지역에서 기관사로서의 삶을 시작했다.



어린이-청소년-기관사 포교에 전력

그렇게 떠나고 싶었고 떠나서는 단 한순간도 잊을 수 없던 곳, 고향 영주. 그는 약관의 나이에 이곳에 뼈를 묻겠다는 각오로 다시 섰다. 소백산 험한 준령을 끼고 있는 영주에서 기관차를 운전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힘든 일이었다. 밤낮으로 바뀌는 출근 시간, 거기에 낙석이나 산사태를 감수해야 하는 것은 물론 큰비가 올 때면 철길이 유실되는 사고를 겪은 것도 한 두 번이 아니다. 이런 고된 생활 속에서도 그는 곧바로 영주 지역의 학생회를 결성했다.

동해, 제천, 김천, 대구 등 밤새도록 철야운전을 하고도 퇴근 후에는 이 마을 저 마을 돌며 청소년들을 모았다. '내가 아니면 불교는 망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뛰어든 일이었다. 이렇게 학생회를 이끌어 가면서 그는 어느새 영주지역의 '기관사 법사'로 불리기 시작했고, '어린이를 외면하면 불교의 미래는 없다'는 평소 생각으로 영주지역에서는 처음으로 어린이법회도 시작했다.

법회 운영비를 위해 일일찻집, 복조리 판매 등은 물론 월급을 쏟아 붓는 것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것보다 더 힘든 것은 주변의 따가운 시선이었다. 특히 애써 절을 찾은 아이들을 시끄럽다는 이유로 내쫓는 스님들을 보면 저절로 눈물이 흘렀고 한없이 절망해야 했다. 그러나 중간에 그만 둘 수는 없었다. 오히려 아이들과 청소년에 포교에 온힘을 기울이면서 동시에 거사회도 만들었고 같은 직장 동료들인 기관사들을 설득해 직장불자회도 만들었다. 특히 83년 창립한 영주기관차승무사무소불자회에서는 매월 회보를 만들어 회원들에게 교리를 소개하는 동시에 전두환 군부독재에 의해 자행된 80년 10·27 법란 등에 대해서도 비판의 목소리도 높였다. 이로 인해 때로는 경계의 눈초리를, 때로는 질시의 눈초리를 감내해야 했고 결국 85년 이 모임은 99년말 재창립 때까지 긴 공백기간을 거쳐야 했다.



불우이웃 돕기 10년째-전쟁 영가 천도재도

그는 절망은 해도 포기는 하지 않는다. 92년 직장 동료들과 '사랑 나누기회'를 만들어 매달 9가구에 10만원씩을 돕고 있으며, 현충일이면 전쟁에 희생된 수많은 외로운 영혼들을 위해 천도재를 지내는 일도 벌써 10년째 해오고 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불교는 단순한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고 삶 그 자체여야 한다"는 그의 지론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특히 지난 2000년 초 철도청불교단체협의회 창립 때 수석부의장을 맡아 철도청 불자들을 하나로 묶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지금은 철도청불교단체협의회의 전법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기관사 생활 27년. 부처님의 가피 덕분인지 소백산 험한 준령을 별다른 사고 한 번 없이 70만km나 달렸다. 기차가 국가의 대동맥으로 마을과 마을, 사람과 사람,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듯, 그는 자신의 전법행위가 부처님과 중생들을 이어주고 고해의 바다에서 피안으로 이어주는 거룩한 일임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그에게 불교는 '희망나누기'였던 것이다.



이경재 씨의 말·말·말 - "佛法 안다면 포교해야죠"



"부처님의 가르침을 알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리는 것이 불자로서의 당연한 의무입니다. 내가 포교할 때 불교가 융성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이경재 씨는 불교에 관심이 있되 아직 초심자인 동료들에게는 딱딱한 교리보다는 불교문화와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도록 유도하기를 권한다.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영주기관차승무사무소불자회 법회 때 특정 사찰을 정해 놓지 않고 주변의 산사를 차례로 방문해 그곳에서 큰스님들의 법문을 듣도록 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특히 회원들 뿐 아니라 가족들이 함께 참여해 가족 간의 화합을 다지도록 하는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는다. 불교로 인해 가정에서 불화가 일어나고 화합하지 못한다면 이 또한 제대로 된 불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씨는 포교가 다른 사람을 변화시키는 일인만큼 먼저 자기가 변화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선 무엇보다 수행이 필수. 단체일에만 매달리다보면 자기 발전은 적고 결국 나중에는 회의만 늘게 된다는 것. 김 씨가 10년 전부터 매일 금강경을 일곱 번씩 독송하려 노력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수행하는 장소도 일정치 않다. 때로는 집이 때로는 한 평 남짓한 기관실이 도량이다.

"바쁘다고 미루면 평생 못합니다. 오늘부터 당장 자신에게 맞는 수행을 하십시오. 그럴때 내가 변하고 가족이 변하고 직장이 변합니다."



영주=이재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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