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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몽요결』

기자명 박동춘
사람은 살아 가면서 평생을 죄우할 인연을 만나게 되다. 그 인연의 실체가 현자와 불초한 자이든, 아니면 유정, 무정물이든간에 그 소이는 업의 소산이라고 이해했었다. 그러나 그 인연이 사람에게 진솔한 감동으로 다가 올 수 있는 것은 자아의 인식 그 깊이와 폭, 시간을 통한 익숙함에서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런 감동은 심적인 변화 중에 혹은 개탄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또 늘 간과했던 대상에 대해 새로운 인식으로 다가와 용맹한 정진과 용기를 줄 수 있는 자심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필자가 율곡 이이(1536~1584)의 『격몽요결』을 본 것은 20대 후반이었다. 한참 구학문에 재미를 가지고 있었던 시기에 정말 주마간산격으로 읽었던 책이었다. 그저 기초교본으로 율곡선생의 글이니까하는 단순한 호기심 정도뿐이었다.

한참 세월이 흐른 후 인사동 골목 모퉁이에 자리한 고서점엘 가게 되었다. 간간히 옛 책을 사서 소장하는 것이 좋았고, 옛 활자가 주는 시원함, 책의 냄새가 편안한 안도감을 주어서 좋았다. 그날도 습관대로 책을 뒤적거리다가 유난히 어둡고 구석진 곳에 표지가 낡아 책이름조차 희미해진 고서 한권이 눈에 띄었다. 호기심에 꺼내보니 표지 가득 먼지를 뒤집어 쓴 아주 볼품없는 한적이었다.

먼지를 털어내고 자세히 보니 겉표지에 歲在丁巳(세재정사) 擊蒙要訣(격몽요결)이 아닌가! 한 동안 율곡의 사상을 공부하며 율곡선생에 대한 흠모가 깊었을 때이니 그 반가움이란 말로 형언할 수 없었다. 세재정사는 옛 책주인이 이 책을 새로 맨 날일 수도 있겠고, 혹은 정사년에 이 책을 처음 공부하게 되었다는 표시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책의 옛 주인이 이 책을 얼마나 소중히 아꼈는지 금방 느낄 수 있었다. 책 끝에 실끈을 꼬아 매어 언제나 걸어 놓고 볼수 있게 했고 단정한 표지의 글씨를 보아 옛 주인의 심성을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애지중지하던 주인의 손을 떠나 몇 백년의 세월을 유전하면서 세월의 성쇠를 어떻게 견디어 왔을까 생각하니 애틋한 정이 들었다. 불혹을 지나 知天命이라는 년배의 초입에 들어 있던 내가 이 한 점의 한적에서 깊은 감회를 느끼는 것은 세월의 무상함을 조금씩 알게 된 나이 탓도 있었으리라. 책방 주인은 평소부터 면식이 있어서 쉽게 얼마간의 돈을 지불하고 내가 이 책의 새 주인이 되었다. 집으로 돌아와 찬찬히 해진 책을 보수하고 종이의 재질과 활자를 조사해 보니 丁巳는 아마 1857년경일 듯하다. 거의 150여년후에 비로소 안착하여 새주인과 있게 된 것이다.

이 『격몽요결』은 율곡의 나이 42세인 1577년에 쓰여진 것으로 고상면 석담에서 계실 때 자신을 따르던 몇몇 학동을 위해 쓰셨다고 한다. 이 시기는 선생의 학문이 완숙기로 늘 병환에 시달리며 학문의 성취가 미흡함을 애석히 여겼던 선생이 자신을 경책하는 마음도 이 책에 담긴 뜻이리라. 서문과 총 10장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첫장 立志章은 처음 뜻을 세우는 자에게 간절한 말로 입지의 뜻을 말하였다. 늘 한국인의 정서가 담긴 글의 진솔함을 맛보고 싶었던 나는 이 책에서 왠지모를 따뜻한 인간애를 행간 속에서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율곡선생은 입지장에서 사람의 용모나 힘·체구의 크고 작음 등 외형적인 품수는 고칠수 없으나 오직 마음만은 품수 받은 것에 구애되지 않고, 어리석은 자도 현명하게 할 수 있다고하는 구절에서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질 수 있게 해 주었다. 확고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고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무엇이 두렵고, 의혹이 있겠는가!

겉모습이나 물질적인 부귀와 빈천에 구애 받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立志의 확고함에 있는 것이다. 우연히 얻게 된 이 한권의 고서는 내 인식을 변화시킬 것이다. 그리고 지금도 내 책상 위에는 낡고 보잘것 없어 보이는 『격몽요결』 한 권이 가장 상단에 자리하고 있다.



박동춘(동아시아 차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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