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⑨ 도의선사

기자명 법보신문

“일상사 모두 佛性의 작용이니 마음밖 부처는 없다”

해동에
禪 물줄기 끌어당긴
‘한국의 달마’

진리 터득하면
활활자재 하리니
정진 또 정진하라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겠다’던 중국의 유명한 백장회해(百丈懷海, 720~814) 선사는 “강서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의 스님에게 속하게 됐구나”라고 했다. 바로 신라의 도의(道義, ?~?) 선사를 두고 찬탄한 말이다. 호랑이와 외뿔소를 사로잡고 용과 뱀을 가려내는 팔팔한 선기(禪氣), 거기에 온 세상을 한 입에 삼키기도 하고 뱉기도 할 듯한 기개와 인품을 도의선사에게서 보았기 때문이다.

도의 선사는 우리나라 최초로 육조 혜능대사의 선법(禪法)으로 일컬어지는 남종선을 전한 신라의 고승이다. 비록 언제 태어나고 입적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북한군(北漢郡), 그러니까 지금의 서울에서 태어났고 어머니가 임신한지 39개월 만에 낳았다고 전한다.

그런 도의 선사가 중국으로 향한 것은 선덕왕 5년인 784년.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난 그는 오대산으로 가 공중에서 종소리를 듣는 등 문수보살의 감응을 얻었다. 그 뒤 광부 보단사에서 비구계를 받고 다시 조계산으로 향해 혜능대사를 모신 조사당을 참배했는데 이때 조사당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고 한다. 또 강서의 개원사에서는 마조도일 선사의 제자인 서당지장 선사에게 법을 물어 마침내 팔만사천번뇌를 일순간에 털어버리는 선법을 깨쳤다. 그 후 백장산의 회해 선사를 찾아가 법요 강의를 듣는 등 중국 산천을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며 수많은 이들을 선의 그윽한 세계로 이끌었다.

그가 37년이라는 긴 세월을 중국에서 보내고 신라로 돌아온 것은 헌덕왕 13년인 821년. 이 땅에서 선법을 펴고자 했으며 뜻대로 되지 않았고 이에 설악산 진전사로 들어가 40년 동안 수행하다가 제자 염거 선사에게 법을 전하고 입적했다.

1200년 한국선의 거대한 물줄기를 형성케 한 ‘한국의 달마’ 도의 선사, 그를 만났다.

▷스님이 중국에서 돌아오기 전에 신라에는 선이 전혀 알려지지 않았나요?
“원효 대사의 『금강삼매경론』에서도 선과 관련된 몇 가지 단편적인 기록들이 보인다. 그러나 선수행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나타나 있지 않았다. 또 법랑 스님은 선종의 제4조인 도신 선사로부터 선의 요체를 전수받아 신라에서 법을 펴셨다고 하지만 그리 알려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럼 당시 당나라에서 주류를 이루고 있었던 혜능대사 계통의 남종선은 스님께서 처음 전했다고 볼 수 있겠군요?
“달은 보면 그 뿐이지 누구의 손가락이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만 잇따라 구산선문이 개창되고 많은 선승들이 배출됐으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신라는 화엄사상을 비롯해 온갖 불교가 활짝 꽃피웠던 시절인데 굳이 중국에까지 가실 필요가 있었습니까? 혹 어느 학자의 얘기처럼 스님께서 육두품 출신으로 계급모순에 한계를 느꼈기 때문은 남종선을 선택한 것은 아닙니까?
“계급모순 때문이라, 허허허. 불교는 내가 부처가 되는 길이다. 그럼에도 당시 신라불교는 경전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주의와 전통적인 교학 중심의 불교에 젖어 있었다. 나는 부처의 근원적인 마음으로 되돌아가 문자화되고 개념화되기 이전의 마음에서 진실을 깨닫고 싶었을 뿐이다.”

▷37년 동안 중국에 계셨다는데 그토록 오랫동안 머물렀던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고독과 외로움을 멀리하면 진리 또한 멀어진다. 나는 그곳에서 부처와 조사라는 나룻배를 건너되 그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나는 참다운 자유인의 길을 찾으려 했다. 그곳은 내게 도에 이르는 길이었고 무명의 강을 건너는 나룻배였다.”

▷당시 중국에는 기라성 같은 선승들이 많았는데 그 중에서 서당 지장 선사를 찾아간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오대산을 거쳐 장안, 낙양 등지를 다니면서 각 종파의 장단점을 검토한 후 나와 가장 인연이 닿는다고 생각됐던 남종선, 그 중에서도 홍주종(洪州宗)의 선법을 배우기로 결심했다. 물론 지장 선사의 스승인 마조 선사, 그 분이 신라인 무상 선사의 제자라는 점도 홍주종으로 내 발걸음을 옮기도록 한 이유와 무관하지는 않다.”

▷스님께서 신라를 떠날 때와 돌아올 때 바뀐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어떤 사물을 대하고 맞이하며, 눈동자를 치켜 올리고 눈동자를 굴리며, 손을 놀리고 발을 옮기는 등 일상생활과 행동 모두 불성의 작용으로 마음 밖에 또 다른 진실이나 부처가 있을 수 없음을 알았다.”

▷부처와 경전의 권위를 부정하는 선이 신라 불교계에는 상당히 충격적이었을 듯싶은데요.
“예상치 못했던 것은 아니었으나 반응은 역시 냉담했다. 경전을 읽고 연구하는 등 교학불교의 전통에 익숙해 있는 이들은 내가 말하는 선법을 ‘마구니의 말(魔語)’이라고 비난하며 배척했다. 나는 그 옛날 달마대사가 처음 중국에 들어왔을 때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달마께서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알고 숭산의 소림사로 향했듯이 나도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깨닫고 설악산에 은거하게 됐다.”

▷그런데 고려시대 때 천책 스님이 쓴 『선문보장록』에 보면 실제로 스님께서는 교학이나 문자에 대해 극단적으로 무시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약이 필요하다. 그러나 좋은 약이라고 하여 끝까지 붙들고 있으면 새로운 병이 생기는 법이다. 불법은 대장경이나 법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마음과 불성의 작용에 있다. 경전을 무시하고 있는 게 아니라 부처의 설법이라는 견고한 상(相)과 문자의 개념에 사로잡혀 만법의 근원인 자기의 본성과 불법의 근본정신을 망각하지 않토록 하려 한 것이다.”

▷스님을 일컬을 때 흔히 ‘국사(國師)’라고 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에서 국사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은 고려 광종 때부터인데 신라시대에 사셨던 스님에게 붙이는 정확한 칭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실제 고려 이후에 스님을 국사라고 칭했던 기록이 있기도 하고요.
“선가에서는 부처님까지도 똥 묻은 마른 막대기로 보는데 나를 뭐라 부른들 상관있겠는가. 다만 나에 대한 존경 여부를 떠나 선이 대중에 뿌리내리고 많은 이들이 일체 번뇌와 시비를 여의고 본래진면목을 찾을 수 있게 됐다는 점이 고마울 따름이다.”

▷최치원 선생의 찬탄을 비롯해 스님의 손상좌로 신라에 선을 활짝 꽃 피웠던 체징 선사는 ‘달마 대사는 중국선종의 제1조가 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도의 대사를 제1조로 삼는다’고 했습니다. 또 해동선문을 활짝 열어젖힌 초조로서 오늘날까지 스님을 여전히 추앙하고 있는데도 어찌 그리 스님에 대한 자료와 법문이 없는지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하늘을 나는 새는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수행을 하면서도 수행의 흔적과 자취를 남기지 않고 깨달음을 증득하면서도 깨달음에 안주하거나 자취를 남기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나는 평생 한 마디도 설하지 않았다’고 하셨다듯이 그렇다면 내 삶도 그런대로 괜찮았음이 아닌가.”

▷얼마 전 스님이 주석했던 양양 진전사가 복원되고 매년 다례재도 봉행되고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에게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신지요?
“도에 이르는 데는 지름길이 없다. 그 자리는 외롭고 힘들며, 보고 들을 수도 없으며, 말이나 생각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진리를 터득하면 활활자재하며 일만의 성인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다. 그러니 부디 정진하고 정진하여라.”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도의 선사 어록

“조종(祖宗)에서의 시법(示法)은 부처와 중생이 얻을 수 없으며 오직 도와 본성을 곧바로 구현할 뿐이다.”『선문보장록』
“부처의 형상을 나툰 까닭은 조사의 바른 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방편으로 몸을 가차한 것이다. 비록 여러 해 경전을 읽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으로 조사의 심인법(心印法)을 증득하고자 한다면 한 겁이 지난다 해도 얻기 어려울 것이다.”『선문보장록』

찬탄과 공경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이런 사람에게 전하지 않고 그 누구에게 전하랴.”
 (서당 지장)
“(도의 선사로 인해) 강서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의 스님에게 속하게 됐구나.”
 (백장 회해)
“수행을 닦지만 닦음에 머무르지 않고 깨달음은 증득했지만 증득함에 머무르지 않았다. 그 고요함은 산이 서 있는 것 같았고, 그 움직임은 골짜기가 울리는 듯했다. 조작함이 없는 무위의 법이 유익하여 다투지 않고도 뛰어났다. 이에 동방인들이 마음을 비우게 해 주니 능히 고요한 이익으로써 해외를 이롭게 하니 그 이롭게 함을 자랑하지 않으니 참으로 위대하다.” (고운 최치원)
“종지(宗旨)를 투득(透得)하여 정법의 안목이 훤출히 열리시니 진실로 법을 전해야만 할 큰 그릇이 되어 서당지장의 뒤를 이으시고 강서의 선법(禪法)을 모두 동국으로 옮겨 왔도다.” (조계종 종정 법전 스님)
“도의 국사께서 우리 조계종문에 끼친 은혜가 저 설악산보다 높고 동해보다 깊다.” 
 (조계종 전 총무원장 법장 스님)


참고자료
성본 스님 「도의선사의 생애와 선사상」, 차차석 「남종선의 초전자 도의선사의 사상과 그 연원 탐구」, 현각 스님 「신라선의 역사적 의의」, 김상영 「나말여초 선문의 형성과 조계종의 기원」, 고영섭 「신라말 선문화의 형태와 발전」 등

저작권자 © 불교언론 법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광고문의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하단영역

매체정보

  •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19 르메이에르 종로타운 A동 1501호
  • 대표전화 : 02-725-7010
  • 팩스 : 02-725-7017
  • 법인명 : ㈜법보신문사
  • 제호 : 불교언론 법보신문
  • 등록번호 : 서울 다 07229
  • 등록일 : 2005-11-29
  • 발행일 : 2005-11-29
  • 발행인 : 이재형
  • 편집인 : 남수연
  • 청소년보호책임자 : 이재형
불교언론 법보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