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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2

기자명 법보신문

제 1장 지족암 가는 길

글·정찬주  삽화·송영방

“김사의는 세상이 허망했다.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태어난 후 처음으로 느꼈다”

그때 사내는 절에서 기도하겠다는 어머니를 모시고 해인사를 들렀는데, 해인사 구광루에서는 전국불교학생회 회장단 140여 명과 재가 신도들이 일타스님의 법문을 듣고 있었다. 사내도 어머니 옆에 앉아 스님의 법문을 듣고자 했으나 성능이 나쁜 스피커의 음질 때문에 앞뒤의 법문이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고, 옆 자리에서 웅성거리는 경상도 아주머니 신도들의 잡담이 귀에 거슬려 집중하는 데 애를 먹지 않을 수 없었다.

“친가 외가 할 것 없이 마흔 몇 분이 출가한 집안이라카니 부처님 은혜가 얼마나 크겠노. 그러니 일타시님 같이 큰시님이 나올 수밖에 없는기라.”

“저기 보그래이. 당신 손가락을 태워 주먹손이 된기라. 바늘만 쬐끔 찔러도 아플낀데 우째 손가락을 모다 태웠을꼬.”

스님은 법상에서 내려와 주먹손으로 분필을 쥐고서 당신 집안의 가계도를 그리고 있었다. 스님은 집안사람들이 부처님과 인연을 맺은 이야기를 하려는 듯했다. 스님의 법문을 잘 들을 수는 없었지만 법당에 앉아 있는 것은 참을 만했다. 구광루 화단에는 옥잠화가 만발한 한여름이었고, 은모래가 깔린 경내는 한 발짝만 떼어도 땀이 삐질삐질 나올 만큼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은 특별한 냉방 시설이 없어도 가람의 높은 천정과 마룻바닥 사이에 냉기가 감돌았다. 천정을 떠받들고 있는 둥근 기둥은 얼음처럼 차가움이 느껴질 정도였다. 사내는 어깨에 얹히는 서늘한 냉기의 감촉이 좋았으므로 아주머니들의 시시콜콜한 잡담에도 불구하고 법당 밖으로 나가지 않고 버티었다.

가람의 검은 토기와에 난반사하는 불볕 햇살 때문만은 아니었다. 스님의 법문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구광루 법당 안은 빈자리 없이 꽉 들어찼다. 미처 들어오지 못한 신도들은 문밖에서 울긋불긋한 양산을 쓰고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아주머니 신도들의 웅성거림도 어느새 잦아들어 스님의 또렷한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재가 신도들과 학생 불자들은 스님의 법향(法香)에 젖어 합장한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불연(佛緣)이 없던 사내도 스님이 당신의 아버지를 얘기하는 대목에서 가슴이 뭉클해졌다.

〈우리 아버지 김봉수(金鳳秀)는 한 마디로 쑥떡이라. 봄바람 같이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양반이라 마을에서 부르는 별명이 ‘부처’라고 했어요. 할아버지가 재산을 나눠줄 때도 욕심이 없어 고라실 골짜기 논 스무 마지기만 달라고 해 어머니에게 핀잔을 받았다고 해요. 욕심이 없을뿐더러 노래도 참 잘하셨어요. 춘향가도 잘하고 심청가도 잘 부르셨어요. 이런 아버지가 나를 가지려고 생남불공(生男佛供)을 드리러 마곡사 대성암을 다녔지요.〉

생남불공이란 아들을 낳아달라고 드리는 불공을 말했다. 생남기도라고도 하는데, 스님의 아버지 법진 거사는 생남불공을 드리러 공주읍내 집에서 마곡사 대성암까지 80리 길을 지게에다 곡물을 지고 다녔던 것이다. 대개 할머니나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러 다니는 것이 신도들의 풍습인데 아버지가 다녔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아주 특이한 풍경이었다.

그날도 법진 거사는 지난해 논에서 수확한 쌀을 읍내의 물레방앗간에서 막 정미하여 지게에 지고 80리 길을 쉬엄쉬엄 걸어가는 중이었다. 그냥 가는 것이 아니라 ‘관세음보살’을 중얼거리면서 걷고 있었다. 그런데 마곡사를 10여 리를 남겨두고 언덕길을 오르던 중 개울을 만나 징검다리를 건너다가 그만 방귀를 뀌고 말았다. 법진 거사는 얼굴이 노래졌다. 방귀냄새가 불공쌀에 닿았으니 대성암 부처님께 올린다 해도 불경스럽게 돼버린 탓이었다. 그렇다고 집으로 돌아가자니 산굽이를 몇 십 군데나 돈 70리 길이 아찔하게 느껴졌다.

법진 거사는 지게를 내려놓고 한참을 망설였다. 그러자, 자나 깨나 ‘대광불화엄경’ 하고 외는 아내 김상남(金上男)의 사나운 얼굴이 떠올랐다. 사실 생남불공도 아내가 등을 떠밀어 다니고 있는 중이었다. 아내는 틀림없이 불공쌀을 다시 장만하여 대성암을 다녀오라고 할 터였다.

할 수 없이 법진 거사는 다시 집으로 돌아와 불공쌀을 준비하여 다음날 지게에 얹었다. 또 다시 공주 집에서 80리 길을 걸어 마곡사 대성암으로 가 불단에 쌀을 놓고 불공을 드렸다. 그날 밤 아내는 대성암 뒤에서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를 안고 오는 꿈을 꾸었다. 사내아이가 들어설 태몽이었다.

법진 거사의 불공과 어머니의 태몽을 인연으로 결국 스님은 공주군 우성면 동대리 182번지에서 태어났다. 스님의 사주(四柱)로서 태어난 해는 1929년 기사년(己巳年)이고, 달은 음력 8월이고, 날은 초하루, 때는 오시(午時)가 되었다.

〈선경 노스님의 말에 의하면 스님의 가까운 전생은 마곡사 강사스님이라고 해요. 선경 노스님이 불공드리러 다니는 우리 아버지를 자주 보았다고 하는데, 내가 꼭 그 강사스님을 닮았다고 해요. 그러니까 내가 마곡사의 그 강사스님의 후신이라는 것이지요. 그건 선경 노스님의 얘기고 나도 내가 전생에 중이었다고 느껴요.〉

스님의 속가 이름은 김사의(金思義)였다. 김사의가 5살 무렵이었다. 스님의 속가는 마을에서 ‘중여관집’이라고 불렸다. 탁발하는 스님들이 날이 저물면 으레 스님의 속가에서 자고 갔기 때문이었다. 스님의 어머니 김상남은 탁발하는 스님들을 살뜰하게 대접했다. 초가을부터 불을 들여 구들을 늘 따뜻하게 했고, 차가워진 국물은 반드시 끓여 탁발승들에게 올렸다. 마을 사람들은 동네에 탁발승이 오면 아예 김사의 집으로 먼저 안내했다.

어린 김사의는 집에 자주 탁발 오는 노스님을 ‘중아저씨’라고 불렀다. 노스님은 탁발 와서 염불하는데 반드시 천수경을 외웠다. 다른 집에서 탁발할 때도 천수경을 외웠다. 어느 날 어린 김사의는 노스님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면서 천수경 염불을 흉내도 내고 흥에 겨워 어깨춤을 추었다.

원왕생 원왕생(願往生 願往生)
원생화장연화계(願生華藏蓮華界)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극락왕생 하소서 극락왕생 하소서
연꽃으로 장엄한 극락에 태어나
우리 모두 함께 불도를 이루세.

어린 김사의는 한 번 더 노스님을 따라다니더니 천수경을 외워버렸다. 그래서인지 훗날 김사의는 출가를 해서 천수경을 따로 끙끙대며 외울 필요가 없었다. 전생에 외워둔 습이 있어 탁발승이 외는 천수경을 쉽게 외웠던 것이다.

〈글자를 한 자도 모를 때 외워버렸으니까 전생에 중이었던 것이 틀림없어요. 아무튼 내가 8살 때까지 해마다 중아저씨가 우리 집에 왔어요. 그러면 나는 사랑방으로 가서 밤새 얘기를 들었어요. 지옥 얘기, 천당 얘기, 극락 얘기, 인과 얘기를 들었어요. 그런데 나는 혼자만 알고 있는 것이 근질근질했어요. 외갓집 머슴들이 산에 나무하러 가면 따라가서 중아저씨한테 들은 얘기를 들려주었지요. 얘기한 뒤 다리 아프다고 칭얼거리면 머슴은 얘기 값으로 창꽃 진달래꽃을 꺾어주었고 나는 지게 위에 올라타고 앉아 그것을 뜯어먹으며 집에 왔지요. 8살에 국민학교에 들어갔는데 그 전에 중아저씨한테 들은 법문이 또 하나 있어요. ‘모든 것은 마음이 짓는다’라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법문이지요. 〉

국민학교를 들어가기 전 어린 김사의는 달리기를 하다가 무릎이 깨져 피가 철철 흐른 적이 있었다. 눈물이 핑 돌 만큼 아팠지만 어린 김사의는 일체유심조를 외며 통증을 견뎠다. 무릎을 두 손으로 움켜잡고서 ‘일체유심조인데 뭐가 아프냐’ 하고 애늙은이처럼 몸의 통증을 마음으로 다스리려 했던 것이다.

스님의 법문이 조금은 지루해질 무렵, 갑자기 마이크가 고장이 나 잠시 법문이 중단되고 예정에 없던 휴식이 주어졌다. 학생들은 좌우로 몸을 흔들며 긴장감을 풀었고, 재가 신도들은 다시 잡담을 하기 시작했다.

“출가한 시님 집안사람들 얘기는 언제 나오노.”
“시님이 손가락을 연비한 오대산 얘기는 아직 멀었나.”

마이크가 바로 교체되어 휴식 시간은 5분도 넘지 못했다. 스님의 법문은 바로 시작되었다. 물 한 컵으로 목을 축인 스님의 목소리는 다시 생기가 넘쳤다. 그런데 뜻밖의 반전이 나타났다. 지루해 하던 분위기는 금세 사라지고 법당 여기저기서 눈물을 닦고 코를 푸는 소리가 났다.

사내의 어머니도 손수건을 꺼내 두 눈을 찍고 있었다. 어린 김사의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어머니 김상남과 헤어지는 장면에서였다. 김상남은 출가를 하기 위해 어린 김사의를 속이고있었다. 아들을 속이고 출가하려는 김상남의 매서운 신심보다는 하루아침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 함께 살아갈 어린 김사의가 불쌍해 법당 안 곳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아들 김사의에게 새 운동화를 사준 지 며칠이 지나서였다. 김상남은 아들에게 절에 잠깐 갔다 오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김사의는 그것도 모르고 고리짝을 머리에 인 김상남을 따라 버스정류장으로 따라 나갔다. 그런데 김상남은 아들과 정을 떼려고 작정했다. 실수하면 아들이 함께 버스에 오를지도 몰랐다.

“종섭이 형 좀 데려오너라. 차 떠날 시간인데 아직 보이지 않는구나.”

원래는 집에서 기숙하다가 하숙을 정해 나간 친척형인 종섭이었다. 종섭의 하숙집까지는 오리나 되었다. 버스가 시동을 걸고 있는데도 김상남은 아들에게 그런 심부름을 시켰다. 물론 거짓말이었고, 어린 김사의는 새 운동화를 신고 달렸다.

그러나 종섭은 자전거를 타고 어디론가 가고 없었다. 김사의는 다시 죽기 살기로 뛰어 정류장을 달려왔다. 그러나 이미 버스는 떠나고 정류장은 텅 비어 있었다.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고 있었다. 김사의는 세상이 허망했다. 어머니가 없으니 세상이 허망하다는 것을 태어난 후 처음으로 느꼈다. 그래도 어린 김사의는 어머니가 떠났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어린 김사의는 어머니가 흘리고 간 그림자라도 잡고 싶었다. 그래서 어머니가 앉았던 정류장 자리에 앉아도 보고, 고리짝을 놔둔 데 서보기도 하고 만져보기도 했다. 가슴이 뻥 뚫린 기분은 여전했다. 발을 동동 굴려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어머니에 속아 종섭이 형 집으로 달려간 자신이 바보 같았다. 화가 났다. 자신이 바보 같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어린 김사의는 집으로 오면서 엉엉 울었다. 그날 밤에는 어머니 김상남이 부탁해 두었는지 세 들어 사는 아주머니가 밥을 차려주었다. 한동안은 김사의가 벗어놓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빨래도 해주었다.

아버지 김봉수와 남게 된 김사의는 6학년 때까지 어머니 없는 외로움을 이겨냈다. 어머니는 동생을 데리고 절에서 한 철만 살고 온다더니 어쩌다 편지를 보낼 뿐 문경 대승사 윤필암으로 출가한 것이 분명했다.

김상남이 보낸 편지의 내용은 아버지도 절로 갈 것이니 너도 학교를 졸업하고 절로 오라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사사로운 편지라기보다는 ‘세상은 허망한 것이다. 부처님 되는 것이 최고의 출세이니 출가하라’는 법문에 가까운 내용이었다.

그러나 마음이 모질지 못한 김사의는 외로움을 탔다. 새 일기장을 사서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들 이름을 다 적고 나서 우리 엄마한테 일러줄 거라고 쓰기도 했다. 김사의에게는 낮보다는 밤이 더 괴롭고 길었다. 아버지 김봉수는 벽을 보고 참선한다고 앉아 있다가 한쪽에서 숙제를 하는 김사의에게 불쑥 ‘니 에미 있는 데가 어디라고’라고 밑도 끝도 없는 말을 던지곤 했다. ‘윤필암이요, 윤필암’ 하고 말하면 또 ‘니 에미 편지 온 게 언제지’ 하고 혼잣말로 중얼거리곤 했다.

포교국장 스님이 저녁예불을 마치고 들어왔다. 사내는 스님이 가사를 벗어 옷걸이에 걸기를 기다렸다가 자신의 명함을 내밀면서 이름을 밝혔다.

“미국에서 조그만 사업을 하는 고명인(高明仁)이라고 합니다.”
“저도 명함을 드리지요. 혜각(慧覺)이라 합니다.”
“저는 날빛이 처마 밑으로 파고드는 이 시각을 가장 좋아합니다. 경내를 한 번 돌아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고명인은 혜각스님의 권유로 사운당을 나와 경내를 걸었다. 벌써 밤안개 같은 것이 스멀거리는지 축축한 기운이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저기 저 암자가 지족암입니다. 지족암에서 머무시겠습니까, 아니면 사운당 내 방에서 머무시겠습니까.”
“허락하신다면 사운당에서 하룻밤 자겠습니다.”

고명인은 인터넷으로 해인사관광호텔의 방을 하나 예약해두었지만 노모의 혼이 깃든 것 같은 구광루가 보이는 사운당에서 자고 싶었다. 일타스님이 머물었던 지족암에서 자기에는 왠지 송구스러운 마음이 들어 거절했다. 지족암은 벌써 산그늘이 드리워져 깃을 접고 둥지를 찾아든 현학(玄鶴)처럼 그윽하게 보이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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