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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주 장편소설 - 인연 7

기자명 법보신문

제 2장 출가, 멀고도 가까운 여행

정찬주 장편소설  삽화·송영방

“좋은 일 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 부처님 제자가 되려면 인과를 믿어야 한다. 인과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좁은 오르막 산길 끝까지 오르자 어수룩한 내원암이 나타났다. 인법당의 암자는 비가 새는지 지붕 한쪽에 멍석이 덮여 있었고, 암키왓장 골마다 파한 이끼가 듬성듬성 끼어 있었다. 김사의는 외갓집 안채처럼 규모가 큰 기와집을 생각했다가 실망했다. 시큰둥한 김사의를 보고 영천이 말했다.

“옛날에 다 찌그러진 암자였다. 외갓집 돈으로 고쳐 그나마 이 정도다.”

성호가 기다리고 있다가 사립문 안쪽에서 세 사람을 맞아들였다. 등에 짐을 지고 산길을 올라오느라 김봉수가 땀을 가장 많이 흘리고 있었다. 그러나 성호는 속가 남편인 김봉수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속가 자식인 김사의 손을 잡아끌고 옹달샘으로 가 표주박으로 물을 퍼 주더니 세수를 하라고 말했다.

“물마시고 숨이나 먼저 가라앉혀라. 흙먼지를 쐰 얼굴도 씻고.”

김사의는 물을 마시기 전에 성호를 한 번 더 쳐다보았다. 햇수로 3년 만에 보는 어머니였다. 그런데 머리 깎은 어머니를 막상 만나보니 이상하고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어머니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중성으로 변해 있었다.

꿈에 그리던 젊고 예쁜 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키도 유난히 작았고, 관세음보살처럼 미인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눈 밑에 기미가 덕지덕지 끼어 있는 데다 뺨에는 잔주름까지 져 있었다. 김사의는 옹달샘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쳐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우리 어머니가 아닌가. 얼굴도 참 예쁘시고 똑 부러지게 말도 잘하신 우리 어머니는 굉장한 분이었는데.’

더구나 성호는 다리를 다쳤다가 완쾌가 덜 됐는지 걸음을 걸을 때마다 절룩거렸다. 김사의는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하고 마루로 올라가 성호에게 큰절을 했다.

“어머니, 절 받으세요.”
“많이 컸구나.”

목소리로 보아서는 어머니가 분명했다. 그래도 김사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정말 우리 어머니가 맞는가.’

달라진 외모뿐만 아니라 어딘지 차갑고 깐깐하게 돌변해 있었다. 쌀쌀한 태도는 첫날은 물론 다음날에도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도를 더했다. 김사의가 행동하는 것을 두고 사사건건 따지고 나무랐다. 어머니를 만나면 일기장을 내놓고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치겠다고 별러 왔는데, 김사의는 그런 생각을 접고 말았다. 혼구녕만 내니 도무지 일러바칠 기회를 잡을 수 없었던 것이다.

김봉수와 영천이 떠나고 나자, 성호는 김사의에게 더욱 엄하게 대했다. 덧정이 붙지 못하도록 쌀쌀맞게 해댔다. 하루는 늦게 일어난 김사의를 불러 앉혀 놓고는 아침 일찍부터 꾸짖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했으니 너는 이제 아이가 아니다. 내 스스로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 헌데 아직도 잠이 많은 것을 보니 걱정이 된다. 부지런히 공부해도 내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기 힘든데 무엇이 되려고 잠꾸러기가 되어 있느냐.”
“어머니.”
“난 너와 어머니의 인연을 끊은 지 오래됐다. 그러니 나를 어머니라고 부르지 마라.”

성호의 말은 표독스럽기조차 하여 덧정은커녕 남아 있던 정마저 떨어질 지경이었다. 김사의는 문득 5학년 때 어머니와 헤어질 때가 떠올랐다. 버스정류장에서 버스가 올 시각쯤에 오리 밖에 사는 친척 형을 데리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던 것이다. 너무도 냉랭하여 거절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쌀쌀맞기가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스님.”

김사의는 기어드는 목소리로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스님’이라고 불렀다. 그러자 성호는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여기를 보아라.”
“스님, 어디를 말입니까.”
“내 다리를 보란 말이다.”

성호가 보라는 두 발등에는 큰 상처자국이 나 있었다. 그제야 김사의는 속가 어머니인 성호가 절룩거리는 이유를 알았다.

“왜 다쳤는지 아느냐. 업보 때문이다. 선인선과(善因善果)요, 악인악과(惡因惡果)다. 좋은 일 하면 좋은 일이 생기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일이 생긴다는 말이다. 부처님 제자가 되려면 인과를 믿어야 한다. 너도 인과가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저도 부처님 제자가 되고 싶어요. 머리 깎은 스님이 되고 싶어요.”
“헌데 스님이 되고 싶다면서 어찌 수마의 노예가 되어 있느냐. 잠꾸러기가 돼 있느냔 말이다. 인과가 얼마나 무서운 것인 줄 아느냐.”

성호는 김사의를 앞에 놓고 법문을 시작했다. 어머니와 아들 사이가 아니라 스님이 어리석은 제자를 제도하듯 얘기를 하는 동안만큼은 자애롭게 말했다.

<난 전생에도 네 어머니가 아니라 이 내원암에서 중노릇을 했던 것 같다. 외갓집 돈으로 다 쓰러져가는 내원암을 고쳤고, 또 외갓집의 물건이나 살림살이를 볼 때마다 다른 절보다는 내원암으로 가져오고 싶었거든. 저 공양간에 있는 그릇도 주전자도 사발도 다 외갓집 부엌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날도 외갓집 살림살이를 대구까지 가져와 소달구지에 가득 싣고 내원암으로 오던 길이었다.>

당시 신작로는 시멘트나 아스콘으로 포장된 도로가 아니었다. 흙바닥이었으므로 큰비만 한 번 오면 크고 작은 웅덩이가 생기고 자갈이 드러나 뒹구는 신작로였다. 그래도 소달구지는 그런 울퉁불퉁한 신작로를 짐을 싣고 덜컹거리며 다녔다. 성호는 그날도 대구에서 소달구지를 이용하여 짐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마부는 짐을 묶은 끈이 소달구지가 덜컹거릴 때마다 느슨하게 풀어져 자꾸 손을 보곤 했다. 달구지를 끌던 소가 힘이 들어 눈을 크게 뜨고 침을 흘렸다. 소도 좀 쉬게 할 겸 성호는 마부에게 소를 세우게 했다. 그런 뒤였다. 성호는 소 엉덩이 뒤쪽에서 다시 느슨하게 풀어지고 있는 끈을 잡아당겼다.

그런데 그때였다. 성호가 끈을 잡아당길 때 갑자기 말벌들이 달려들었고, 말벌에 쏘여 놀란 소는 앞으로 달려 나갔다. 마부가 쫓아와 소를 세웠을 때는 이미 달구지의 바퀴가 성호의 두 발등을 짓이기고 지나간 뒤였다.

달구지의 바퀴는 요즘처럼 공기를 넣은 고무바퀴가 아니었다. 무쇠를 두른 나무바퀴였다. 성호의 두 발등에서는 붉은 피가 흘렀다. 심하게 뼈가 으스러져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성호는 곧 혼절해버렸다.

성호가 눈을 떴을 때는 대구 동산병원이었다. 스님이 된 속가의 가족들이 동산병원으로 하나 둘 문병을 왔다. 성호의 속가 아버지 추금(秋琴)과 속가 동생 법안(法眼)과 영천, 보경(寶瓊), 진우(震宇) 그리고 속가 맏딸인 응민, 속가 맏아들인 월현(月現)이 병원으로 찾아왔던 것이다. 김사의의 친가, 외가 식구들이 대부분 출가하여 스님이 돼 있을 때였다.

병원에 문병 온 스님들이 가득하자 병실은 마치 절의 큰방처럼 분위기가 바뀌었다. 가끔 염불소리와 목탁소리가 옆방의 병실까지 울려 퍼졌다. 속가 맏딸인 응민이 걱정스럽게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성호는 자신의 업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볍게 받아 넘겼다.

“스님, 불행 중 다행입니다. 얼마나 놀라셨습니까.”
“묵은 빚 갚느라고 다친 것이다. 업보는 피해갈 수 없는 것이야.”

그러면서 속가 시절에 이미 사서삼경을 독파하여 한자 실력이 출중한 성호는 자신의 심중을 염불하듯 구성지게 게송으로 읊조렸다.

가령 백천겁이라 하더라도
지은 업은 없어지지 않나니
인연이 다가와 때를 만나면
과보를 면하기 어렵다네.
假使百千劫
所作業不亡
因緣來遇時
果報難免矣

“발등을 다친 것이 업보란 말입니까.”
“그렇단다.”
“그런데 스님께서는 왜 웃고 계시는 것입니까.”
“내 눈으로 인과를 보았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느냐. 나무 관세음보살.”

성호는 침대에 누운 채 미소를 지으며 합장을 했다. 부처님 말씀으로만 듣던 인과를 직접 경험해 보았으니 신심이 굳세어지고 거듭 발심이 되는 것 같아 가슴 가득히 법열이 일어 미소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께서 지은 업보가 무엇인지 알고 싶습니다.”
“소달구지가 내 발등을 찧고 지나가는 순간 닭 울음소리가 나더구나.”
“혼절하는 순간에 말입니까.”
“닭 한 마리가 쫓기듯 퍼덕거리며 허공으로 달아나더구나. 순간, 출가 전 부엌에서 내가 던진 부지깽이에 맞아 죽은 닭이라는 생각이 들지 뭐냐.”

성호는 3년 전의 그 닭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김사의의 할아버지가 집에 들러 점심상을 차리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때 닭 한 마리가 부엌 안으로 들어와 떨어진 알곡을 주워 먹으려고 날카로운 부리로 이리저리 헤집고 있었다. 닭이 좁은 부엌에서 날갯죽지를 퍼덕이니 먼지가 일었다. 정성스럽게 점심상을 보던 성호는 닭털 하나가 점심상에 날아와 앉자, 옆에 있던 부지깽이를 들어 닭을 내쫓는 시늉을 했다.

그래도 닭이 나가지 않고 부엌 안을 빙빙 돌자, 성호는 부지깽이를 휙 던졌고 닭은 두 다리를 세게 맞아 주저앉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두 다리를 쓰지 못하게 된 닭은 얼마 후 시름시름 앓다 죽고 말았다.

“죽은 닭이 저 소가 되어 내 다리를 다치게 한 것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느냐. 닭을 죽게 한 내 업보인 것을.”
“과보를 면하기 어렵다는 스님의 말씀을 이제야 알겠습니다.”

응민은 누워 있는 성호에게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합장했다. 인연이 다가와 때를 만난다(因緣來遇時)는 성호가 읊조린 게송의 한 구절이 확연하게 깨달아졌다. 힘센 마부가 소달구지의 끈을 조이곤 했으나 그때는 성호가 나서 달구지 앞으로 나가 끈을 잡아당겼던 것이다. 닭을 해친 과보를 받기 위해 마부 대신 끈을 잡아당긴 셈이었다. 그때 갑자기 말벌이 나타난 것은 인연이 다가와 과보를 받게 되는 때를 알림이었다.

“나무관세음보살.”

성호는 미소를 잃지 않고 있으나 응민은 가슴이 먹먹하여 견딜 수 없었다. 응민은 인과응보가 분명하다는 것을 속가의 어머니인 성호에게서 확인하고서는 끝내 눈물을 흘렸다.

“스님은 다리를 다치신 게 아니라 복을 받으셨습니다.”

성호는 대답을 않고 다시 미소를 지었다. 성호가 중상을 입고도 속가 가족이었던 스님들 앞에서 미소를 잃지 않았던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하나는 과보를 빨리 받아 그때의 죄업을 일찍 씻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인과를 스스로 경험하고는 수행자로서 신심과 발심이 솟구쳐나서였다.

아무튼 성호는 큰 상처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달 만에 퇴원했다. 으스러진 발 뼈가 잘 맞추어지고 붙어서 스스로 병원을 걸어 나갔다. 유능한 의사를 만난 운도 따랐지만 사고의 원인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업보로 돌려 마음을 편안하게 한 결과였다.

김사의는 성호의 법문을 듣다가 그만 참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았다. 그러다가 그는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성호가 졸고 있는 김사의의 어깨를 죽비를 들어 후려쳤던 것이다.

“쯧쯧. 세상에서 눈꺼풀이 가장 무거운 것이라고 하더니 바로 너를 두고 하는 말이었구나.”
“스님, 다시는 졸지 않겠습니다.”
“부처님 말씀에 눈은 잠을 먹이로 삼고, 귀는 소리를 먹이로 삼고, 코는 향기를 먹이로 삼고, 혀는 맛을 먹이로 삼고, 몸은 촉감을 먹이로 삼는다고 했거늘... 쯧쯧. 스님이 되려면 잠과 소리와 향기와 맛과 촉감을 조복시키지 않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조복은커녕 그것에 잡아먹히고서 어찌 스님이라 할 수 있겠느냐.”
“스님, 조복(調伏)이 무엇입니까.”
“수행을 잘하여 항복을 받는다는 말이다.”

김사의는 눈을 크게 뜨고 법문을 마저 들었다. 성호는 법문이 끝나자 다시 냉랭하게 말했다.

“지게를 지고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해오너라. 절집에 있으려면 밥값은 해야 한다. 공짜 밥을 먹었다가는 죽어 아귀가 된다. 목구멍이 바늘구멍만한 아귀가 되지 않으려면 공짜 밥을 먹어서는 안 된다.”

성호가 어린 김사의에게 나무를 해오라고 시킨 것은 모자의 정이 되살아날까봐 가능하면 함께 있지 않으려고 그랬다. 성호는 며칠 후 김사의를 중학교에 입학시키기 위해 통도사로 보내려고 작정하고 있었지만 그 사이에도 덧정이 생길까봐 찬바람이 일 정도로 모질게 대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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