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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마음 분리해 보면 죽음 공포 극복돼

기자명 법보신문

제4강 초기불교의 죽음이해와 수행법
한국위빠사나 선원 원장 묘 원 법사

오늘 저에게는 두 가지 즐거움이 있습니다. 첫째는 잘 죽으려하는 여러분을 만나 즐겁고 둘째는 여러분에게 죽음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제 스승 중의 한 분이신 쉐오민 사야도 밑에서 공부를 하며 놀라운 점을 하나 배웠습니다. 그 분은 자주 “삶과 이별할 준비를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주 간결하지만 심금을 울리고 통찰의 지혜를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그래, 우리가 삶과 이별할 준비를 하지 못하고 사는 구나.’는 생각을 하며 전율과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후 한국에 와서 선원에서 수행하는 어떤 분께 “삶과 이별할 준비를 하시오.”라고 가르침을 전했는데, 그 분이 그것을 매우 심각하게 생각해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말로 받아들인 모양입니다.

당연하지만 두려운 준비

하루는 그분 딸이 제게 전화를 해서는 “우리 어머니가 ‘삶과 이별할 준비를 하라’는 말씀을 들으셨다며 곧 죽을지도 모른다고 심각한 고민에 빠지셨습니다.”고 했습니다. 저는 무척 놀라며 ‘당연히 준비해야 할 죽음을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요즘은 스승에게서 받은 그 강렬한 메시지를 잘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수행은 죽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은 잘 죽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죽을 때의 마음이 다음 생에 그대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명 때문에 나쁜 것을 나쁘게 보지 못하고 나쁜 것이 좋아 보여 그것을 선택하는데 죽을 때에도 무명에 쌓여 있으면 나쁜 것이 좋아 보이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생명이 있는 세계를 상세히 밝히셨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낮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4악도는 고통만이 존재하기에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고통과 행복이 함께 있는 세계입니다. 하지만 무색계는 고통은 없고 행복만 있어 수행을 못합니다. 수행은 인간밖에 못합니다. 그러나 지옥에 떨어져 있는 사람이라도 자신의 업이 다하면 죽게 되는데 지옥보다 더 낮은 세계로 떨어질 것이 없음에도 죽음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죽음 이후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이 무엇인지만 해결하면 두렵지 않습니다. 어떻게 태어나고 어떻게 죽고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죽음을 알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과거에서 현재가 왔고 현재의 결과가 현재의 새로운 원인이 되어서 미래의 결과로 갑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어디로 갈 것인가를 걱정할 것이 아니라 지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연기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이 여러 가지 원인이 있는데, 제가 상좌부 불교 수행을 하다보면 몸을 이야기하면서 꼭 4대가 나옵니다. 몸에 관한한 모든 생명이 사대를 갖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은 네가지 물질적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지(地), 수(水), 화(火), 풍(風)입니다. 몸에서 볼 때 지대는 땅의 요소로 단단하고 부드러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수대는 물의 요소로서 몸의 혈액과 수분 등의 요소를 말합니다. 화대는 뜨겁고 차가움의 요소입니다. 풍대는 바람의 요소로 호흡이나 진동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만약 사람이 죽었다면 이는 4가지 요소인 4대에 변화가 온 것에 불과합니다. 모든 것은 원인과 결과로 순환되고 있을 뿐입니다.

죽음은 4대의 변화

인류 역사에 낳고 죽고가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생사를 초월하는 분은 아라한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낳고 죽고 낳고 죽고를 반복합니다. 지금 이 생은 이 반복의 짧은 순간입니다. 생사를 끊은 분은 부처님, 아라한뿐입니다. 큰 깨달음을 얻어 생사를 끊지 않는 한 태어남과 죽음은 수도 없이 반복됩니다. 그러기에 죽음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을 늘 남의 일로 생각합니다. 죽음 자체에 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생각하려 합니다. 두렵기 때문입니다.

죽음에는 4가지 유형이 있습니다. 첫째는 등잔불에 기름이 떨어져서 불이 꺼진 경우, 심지가 다 타서 불이 꺼진 경우, 기름과 심지가 다 타서 꺼진 경우, 넷째 바람 불어서 등잔이 꺼진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죽음이든지 이 4가지 경우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첫째는 살고 싶지 않은 경우입니다. 살고자 하는 에너지가 없어서, 즉 자살하는 것이고 둘째는 몸이 병이 나서 죽는 경우입니다. 셋째는 천수를 살고 죽은 것입니다. 네 번째는 사고나 재해로 뜻하지 않게 죽은 경우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어떤 조건, 업의 과보에 의해 죽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비참하게 죽었다고 해서 비참한 곳으로 가지는 않습니다. 목갈라나 존자나 앙굴라마라 존자도 아라한과를 이뤘지만 맞아 죽었습니다. 아라한을 이뤘더라도 자신의 업을 피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분들은 어떤 고통이 와도 새로운 과보를 만들지 않습니다. 느낌에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지요. 업의 과보로부터 벗어난 것입니다. 아라한이나 부처가 아닌 이상 우리는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우리가 죽어서도 가지고 가는 재산은 계율입니다. 내가 선하게 살았나, 그렇지 않았나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그에 따라 합당한 과보를 받습니다.

죽음 중에는 자살도 있습니다. 하지만 불교에서는 살생을 금합니다. 그만큼 살생의 과보는 큽니다. 살생을 하면 반드시 죽인 것에 대한 과보를 받습니다. 그런데 살생에 대한 과보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합니다. 살아있는 존재가 있어야 하고, 살아있는 존재라고 알아야 하고, 살아있는 존재를 살생하려는 의도, 살아있는 존재를 살생하려는 시도, 살아있는 존재가 결과적으로 죽는 것이라는 다섯 가지 조건이 갖춰졌을 때 살생의 과보가 성립됩니다. 이런 살생의 과보가 생겼을 때 우리는 수명이 짧아지고 몸에 병이 생기고 사랑하는 사람과 빨리 헤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기 한 마리라도 함부로 살생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남의 죽음을 소중히 대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죽음을 겸허하고 소중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계율없이는 수행 없어

누가나 훌륭하게 죽기 위해서는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선하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관용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나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비록 나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도 받아들이는 것이 관용입니다. 관용은 반드시 보시를 수반합니다. 둘째는 지계입니다. 재가자는 오계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몸과 마음이 청정해집니다. 계율은 막아서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계율이 전제되지 않으면 어떤 선한 출발도 할 수가 없습니다. 셋째는 수행입니다. 실천하는 수행을 하지 않으면 공허한 메아리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반드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선했을 때 인간 또는 색계나 무색계에 태어날 수 있습니다.

수행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무엇을 할 때 하는 그 자체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수행을 한다는 것은 마음이 몸을 보거나 마음이 마음을 보는 것입니다. 몸이 아플 때 그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지 마음이 함께 아파서는 안 됩니다. 몸과 마음을 분리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죽는 연습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몸이 아팠을 때 통증을 알아차리고 마음이 아파하지 않도록 훈련하는 것이 죽음에 대한 연습입니다.

누가나 선하게 살면 좋은 곳에 태어납니다. 그러나 선한 일을 하면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행하면 출세간의 지혜가 나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그러면 더 이상 태어나지 않고 윤회가 끝나게 됩니다. 이것이 열반입니다. 우리 모구가 이 열반을 억기 위해서 살아야 하고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야 말로 궁극적으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입니다.

정리=남수연 기자 namsy@beopbo.com


묘 원 법사는


1988년 국내에 위빠사나를 처음 소개한 거해 스님으로부터 위빠사나 수행을 접한 1세대 수행자다.

1996년부터 미얀마 수행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마하시 선원과 쉐우민 선원에서 각각 4년씩 8년을 수행했다.

수행을 통해 ‘마음 보는 법’을 알게된 묘원 법사는 있는 마음을 보고, 일어난 마음을 보고, 일어나려는 마음을 보고, 그 아는 것(보고 있는 것)을 아는 마음을 보아야 한다는 4단계 마음보기를 체계화 해 전하고 있다.

현재 한국 위빠사나 선원 원장으로 도반들과 함께 수행에 정진하고 있다.


잘 죽기 위한 선한 삶의 조건

1. 모든 대상을 관용으로 대하라.
관용에는 자연스럽게 보시가 따른다.
2. 계율을 지켜 몸과 마음을 청정히 한다.
3. 몸과 마음을 분리해 알아차리는 수행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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