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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보각국사 일연 스님

기자명 법보신문

“몽고에 짓밟힌 황량한 백성들의 마음밭이 내 도량”

‘역사를 믿는다는 것은 궁극적으로 사람을 믿는 것으로, 그 사람의 식견과 양심을 믿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 스님에 꼭 맞는 말이다. 해박한 지식과 통찰력으로 고대 우리 민족의 원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는 까닭이다.

일연 스님은 지금으로부터 꼭 800년 전인 1206년 경산에서 태어났다. 이 해는 칭기즈칸이 몽고족를 통일하던 해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읜 그는 어머니와 단 둘이 살다가 9세에 광주 무량사에서 출가의 길을 걷는다. 어릴 때부터 대단히 총명했던 그는 14세에 강원도 진전사로 가 그곳에서 구족계를 받고, 22세에는 최고 고시인 선불장(選佛場)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후 스님은 현풍 비슬산으로 옮겨 수행할 무렵 몽고의 침략이 시작됐다. 이에 따라 거처를 옮겨가며 부지런히 선(禪)을 닦던 스님은 32세 때 마침내 ‘삼계(三界)가 덧없는 꿈임을 알고 대지가 티끌만큼의 막힘도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럼에도 스님은 꿈속에서라도 세속에는 가지 않겠다는 각오로 20여 년간 정진을 계속했고, 44세 때 정안 거사의 요청으로 남해 정림사로 가 팔만대장경 간행에도 참여했다. 왕실의 흠모를 한 몸에 받던 스님은 72세 때 임금의 명으로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드디어 『삼국유사』를 쓰기 시작했다. 특히 78세 때 충렬왕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국사에 봉해져 임금의 곁에 머물기를 요청했으나, 95세의 노모를 모시기 위해 인각사로 내려갔다. 스님은 이곳에서 영원한 민족의 유산 『삼국유사』를 완성했으며, 1289년 7월 8일 새벽 ‘오늘은 내가 갈 것’이라고 밝히 뒤 제자들과 선문답을 나누고 앉은 채로 적멸의 세계에 들었다.

▷스님을 생각할 때 먼저 『삼국유사』함께 떠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만큼 우리 고대의 역사, 지리, 언어, 문학, 민속, 종교, 미술 등에 관한 많은 자료를 전해 주고 있고, 고대 자료의 원형을 그대로 전해주기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 선사로서, 그것도 엄청난 전란을 겪으면서도 이 글을 쓰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그 땐 참으로 힘겨운 시절이었지. 광폭한 침략자들의 칼날에 이 땅 백성들의 목숨은 가을 낙엽처럼 무수히 스러져갔다네. 또 오랜 전란은 굶주림뿐 아니라 무기력과 절망까지 몰고 왔지. 하지만 난 그것이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한 과정일 뿐 전체는 아니라는 점을 얘기하고 싶었네. 우리의 오랜 역사적 전통과 신성함을 들려줌으로써 희망과 자신감을 잃지 않기를 바랐던 거네. 내게 역사에 대한 믿음은 곧 이 땅 백성들에 대한 믿음이었다고 할 수 있지.”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그런 불멸의 역작을 남겨주신 점, 뭐라 감사의 말씀을 드려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史)’라는 말 대신 굳이 ‘유사(遺事)’라고 하신 까닭이 있으신지요?

“‘사(史)’라는 전통적인 형식과 내용이 주는 속박에서 벗어나 내가 느끼고 체험한 역사를 담고자 했던 까닭이라네. 또 이미 그 당시에는 이미 당시에는 『삼국사기』나 『해동고승전』 등 역사서와 전기가 있었기에 이를 보충한다는 의미도 있었지.”

▷『삼국유사』에는 곧바로 서방정토로 간다거나 용왕이 등장하거나 하는 쉽게 믿지 못할 부분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조선후기 실학자인 이규경은 아예 ‘황탄(荒誕)하다’고 까지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렇듯 신이(神異)한 일들이 『삼국유사』에 많이 나타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삶’은 ‘사실’을 뛰어넘는다네. 역사를 다루는데 있어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건 당연하네만 그렇다고 자기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하여 배제하는 것 또한 옳지는 않네. 신비한 전설이나 일화에는 사실이냐 아니냐를 떠나 그 시대 사람들의 의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네. ‘사실’에 집착하면 지식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이 될 수 있을지언정 삶으로 이어지는 감동과 지혜는 멀어진다는 게지.”

▷『삼국유사』는 제목과는 달리 신라의 얘기가 주로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혹자는 ‘신라유사’가 아니냐고 비판을 하기도 합니다.

“『삼국유사』를 쓰겠다는 생각은 20대부터 했네. 그래서 여기에 인연 따라 이곳저곳 절을 옮길 때마다 많은 곳을 답사해 그곳의 유적과 유물을 살펴보고 사람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네. 허나 내가 살았던 때는 이미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한지 60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라 자료도 그리 많지 않았을 뿐더러 옛 고구려와 백제 땅에도 그리 갈 일이 많지 않았었네. 아쉬운 일이지.”

▷스님께서 20대에 『삼국유사』를 쓸 계획을 세우고 80대에 마무리했다면 수많은 곳을 다녔을 텐데 가장 인상적인 곳을 꼽는다면 어디일까요?

“옛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 어딘들 중요하지 않겠는가. 허나 굳이 꼽는다면 황룡사라 할 수 있겠지. 젊었을 때 처음 갔던 황룡사에서 나는 이 땅이 바로 부처님께서 나툰 불국토라는 생각을 했네. 하지만 훗날 갔을 때는 몽고병사들에 의해 절과 탑이 모두 잿더미가 되었다네. 그 무엇인들 무상(無常)하지 않겠는가만 그 때 내가 느낀 안타까움과 슬픔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삼국유사』에는 많은 고승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유독 원효 스님에게만 ‘성사(聖師)’라고 쓰신 이유가 있으신지요? 행여 고향이 같기 때문은 아니겠지요?

“어허 그럴 리가. 성사께서는 제왕의 불교를 평민의 불교로, 내생의 불교를 현세의 불교로, 산림의 불교를 세간의 불교로, 출가의 불교를 재가의 불교로 전진시키셨네. 생활불교, 우리의 불교에 관심이 있다면 원효 성사를 어찌 사표로 삼지 않을 수 있겠나. 그러나 원효 성사의 뛰어난 점만 수록하려 했던 것은 아니네. 오어사의 전설에서 원효 성사는 혜공 스님의 도력에 미치지 못하고 의상 법사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했지만 성사께서는 친견하지 못했다는 설화도 실고 있다네. 법을 논하는데 어찌 사사로운 감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삼국유사』에는 먹을 게 없는 상황에서 노모 봉양을 위해 아이를 묻으려고 하거나, 짚신을 엮어 살아가는 사람, 한 겨울에 길거리에 나앉은 모자 등 가난한 사람들의 얘기가 많이 나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목한 이유가 있습니까?

“나는 단순히 빈민의 고단한 삶 자체를 묘사하려 하지 않았네. 거기에서 나는 감동을 교훈을 보았기 때문이었네. 그건 바로 신심과 효였지. 행복은 호위호식에 있는 게 아니라 ‘인간다움’을 잃지 않음에 있다고 믿네.”

▷스님께서는 78세에 국존(국사)으로 책봉되셨음에도 고향의 어머니를 모시겠다며 낙향하셨습니다. 출가자의 신분으로 세속에 너무 연연하신 것은 아닌지요?

“내 어머니께서는 열아홉에 날 낳으신 후 77년을 홀로 사셨지. 아홉 살 때 어머니 손에 손을 잡고 출가한 후 어찌 한 순간이나마 그 분을 잊을 수 있었겠나. 그러나 나는 출가자였기에 가까이 모시기가 쉽지 않았네. 불효자였던 게지. 그래서 마지막이나마 구순이 넘으신 어머니를 맘껏 모시려고 했고, 그 때가 내 생애 가장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네. 효심과 불심은 둘이 아니라네.”

▷스님께서는 도의국사의 법통을 이은 가지산문 스님이신데 조동선의 맥을 잇는 『중편조동오위』를 쓰셨습니다. 언뜻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틀로써 법을 가두지 말게. 불도에 이르는 길은 무수하다네.”

▷그렇더라도 『삼국유사』에 도의국사 등 구산선문을 열었던 선사 등에 대한 언급이 극히 적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조사 스님들의 업적이야 두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당시 선(禪)은 민중들 속에 깊이 자리 잡지 못했다고 보았고 그 때문에 싣지 않았지. 하지만 범일 국사가 정취보살을 만난 얘기는 민중들 속에서 많이 회자됐던 만큼 이는 『삼국유사』에 실었다네. 나는 선맥(禪脈)에 대한 것은 다른 저술을 통해 남기려 했네.”

▷팔만대장경 간행사업에도 참여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계기로 참여하게 되셨나요?

“대장경 간행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백성의 마음을 모으는 일이었지. 때마침 신심 돈독한 정안 거사께서 남해 정림사로 올 것을 간곡히 부탁하기에 갔고, 그곳 분사도감에서 대장경 제작에 참여했지. 정안 거사께서는 개인재산을 들여 간행사업을 도왔는데 판각 경비의 절반을 댈 정도로  신심이 장하신 분이셨다네.”

▷스님이 없으셨다면 우리 역사의 상당부분을 송두리째 잃었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올해 스님의 탄생 800주년을 기리는 행사들이 곳곳에서 열리고 오랜 세월 수난 당했던 비(碑)도 복원된 것같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니 나도 고마우이. 내게는 몽고병이 짓밟고 간 황량한 백성들의 마음 밭이 도량이었다네. 이는 세월이 흐른다고 바뀔 듯싶지 않네. 힘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마음이 우리가 깨달음을 이뤄나갈 도량이라는 점을 잊지 말게나.”
 
이재형 기자 mitra@beopbo.com

참고자료

일연 스님 『삼국유사』·『중편조동오위』, 김상현 『일연』, 고운기 『일연』, 민영규 「일연과 진존숙」·「일연중편조동오위」, 조동일 「삼국유사 기본 특징 비교 고찰」, 하일식 「삼국유사의 빈민 관련 자료에 대하여」 등


일연 스님 어록

“풀뿌리와 약초로 배를 채웠고 입은 옷은 베 아닌 나뭇잎이다. 솔바람 쏴쏴 불고 돌길은 험한데 해 저문 숲길로 나무해 돌아온다. 밤 깊고 달은 밝아 그 아래 앉았으며 상반신은 시원스레 바람 따라 나는 듯. 떨어진 자리에 가로 누워 자더라도 꿈길에도 세속에는 가지 않으련다. 구름 따라 놀던 풍류는 가고 두 암자만 묵었는데 산 사슴만 오르내릴 뿐 인적 드물구나.” (『삼국유사』 중)

“뒷날 돌아오면 다시 여러분과 더불어 거듭 한바탕 흥겹게 놀리라.”
 (‘보각국사 일연 비’ 중에서)

찬탄과 공경

“스님은 사람됨이 말에 농담이 없고 성품은 꾸미지 않았으며 진정으로 사물을 대했다. 무리 가운데 있으면서도 홀로 있는 듯하고, 존귀함과 비천함을 같이 생각했다. 이미 도에 들어 알차게 훑어 나가되 거침이 없이 분별해내었고, 옛사람이 말한 중요한 구절에 이르러 뿌리가 서리고 마디가 어긋지며 소용돌이치고 물결이 험한 곳이라도 분명히 갈라주었으니, 넓디넓은 모습이여, 거기서 헤엄치고 칼로 자르며 남음이 있도다.”
 (일연 스님 비문을 쓴 고려 민지)

“근세의 비구로 불조(佛祖)의 도를 밝혀 후학에게 열어준 이는 보각국사로 그 문도가 수천 명에 달한다.”
 (고려 이제현)

“일연이 왕실에서 주는 호사를 마다하고 평생의 도량으로 삼은 곳이란 화전민의 세계였다. 지식인으로서의 양심과 출가인으로서의 진정한 자각이 이 때 이 분의 마음을 어떻게 불사르고 있었던가, 나는 그것을 여기서 발견한다.”
 (고 민영규 연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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