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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운스님의 자비수관 수행법]자비수관 출발점을 삼법인 깨침에 두는 까닭

기자명 법보신문

자비수관은 이타의 보리심 일으키는 수행

Q : 자비수관의 목적은 삼법인을 깨치기 위한 초기 수행이라 하는데요, 위와 같은 경지를 깨침이 대승의 궁극 목표인 자성청정을 깨닫기 위한 목표(즉, 성불)와 그 깊이에 있어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겁니다. 왜냐면 삼법인의 진리 (혹은 사법인 포함해서)가 사실 불교의 전체이며, 궁극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초기수행이라는 삼법인을 깨치기 위한 목표에 자비수관의 출발점을 둔다는 의미에 대해서 자세한 설명을 듣고 싶습니다.

A : 좋은 질문입니다. 어떠한 수행을 하더라도 체험현상은 삼법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무상·고·무아가 깨달음의 통로이자 깨달음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삼법인을 통해 깨어있음의 정도를 즉, 그 깊이를 따진다면 그것은 얼마나, 어떻게 수행정진을 했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또한 어느 차원에서 삼법인을 체득한 것인가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자비수관은 의식을 묘하게 관찰하는 지혜로 전환시키는 영역까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선근을 많이 쌓은 분이라면 그 차원을 가볍게 넘어갈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수행자 본인의 근기와도 관계가 있을 것입니다.

자비수관은 ‘오직 마음뿐 다른 경계가 없다’는 대승의 경계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기 때문에 기초적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말나식(자아의식)과 아뢰야식까지 깊이 들어가려면 모든 것은 오직 마음뿐이라는 경계를 이해해야 하고 조금이라도 체험적으로 맛보아야 하는 차원이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는 곧 삼법인이 곧 수행자 본인의 마음임을 이해하고 체득해야 하는 것입니다. 의식의 경계를 넘어 말라식과 아뢰야식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남을 돕는 이타(利他)의 보리심(菩提心)을 일으켜야합니다. 이타의 보리심은 중생의 고통을 자각하고 중생의 고통에 큰 연민심을 일으키고 그 연민심에 의해 중생을 구제하고자하는 마음입니다. 이타의 보리심은 바로 대승으로 들어가는 발보리심입니다. 이타의 보리심에 의해 진리를 덮고 있는 미세망념을 타파해 갈 수 있는 힘이 생기고 이 힘이 밖으로 일체중생을 구제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안으로 궁극에는 법계(法界)가 하나인줄 모르는 근본무명을 타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삼법인의 체득이 이타의 보리심을 일으키게 하며 이타의 보리심에 의해 삼법인의 경계가 깊어집니다. 삼법인 중 제법무아는 즉, 의식차원의 무아는 인무아(人無我)가 되겠지만 이타의 보리심은 밖에 따로 실체나 자아가 있다는 법집(절대주의)을 타파하고 법무아(法無我)까지 체득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열반도 무여열반에서 대승의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자비수관은 이타의 보리심이 일어나도록 하는 수행입니다.

동화사 강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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