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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세기경 화장묘 줄어…산골 유행했을 가능성

기자명 법보신문
  • 교학
  • 입력 2007.02.07 13:09
  • 댓글 0

경주대 석병철 씨 ‘신라 화장묘’서 주장

최근 신라시대 경주지역 화장묘의 변화형태를 추적한 논문이 발표돼, 초기 화장묘 형태를 살펴볼 수 있는 단서를 제시하고 있다. 경주대 석병철 씨는 1월 27일 서강대에서 열린 신라사학회 정기발표회에서 ‘경주지역 신라 화장묘에 대하여’를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석 씨는 경주지역에 발견된 7∼9세기의 화장묘를 3단계로 분류했다.

1단계는 화장묘의 도입기인 7세기초에서 8세기초로, 땅을 파고 그대로 뼈단지를 묻는 형태와 땅을 판 데에다 돌로 방을 만든 다음 뼈단지를 묻는 형태 두가지가 나타난다. 이때 사용된 뼈단지는 토기였다.

2단계인 8세기초에서 8세기말까지는 다양한 형태의 화장묘가 나타난다. 이때부터 뼈단지를 보호하는 돌로 만든 함이 등장한다. 또 뼈단지 전용 용기로 사방으로 네군데 연결고리를 부착하는 연결고리유개호가 등장했다. 또 토기 위주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담삼채나 선유호 등 고급 용기가 사용돼고 있다.

3단계인 9세기초부터 9세기 중엽까지는 화장묘의 수가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또 뼈단지의 몸체에 비해 뚜껑의 비율이 줄어들었다. 용기로는 중국제 청자도 사용됐다. 석병철 씨는 “9세기에는 화장묘를 비롯한 무덤이 거의 확인되지 않으며, 승탑의 조영도 많지 않아 장골이 아닌 산골(散骨)이 많이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고 설명했다. 

탁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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