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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 하나 안 가져도 무소유 아니다

기자명 법보신문

12. 참회 (懺悔)

<사진설명>육조 혜능 스님이 30여 년간 법을 펼쳤던 중국 광동성 소관시 남화선사 입구에 선 고우 스님.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아 다시는 삿되고 미혹한 외도에게 귀의하지 않겠사오니,

지금 이후로는 부처님을 스승으로 삼아라. 여기 부처님도 밖에 있는 부처님으로 보지 말고 내 안에 있는 부처님으로 봐야지요. 내 안에 있는 부처님한테 귀의하여 스승으로 삼아라.

여기 삿되고 미혹한 외도는 뭐냐? ‘있다-없다’에 빠져 있으면 외도입니다. 우리도 ‘있다-없다’ 착각에 빠지면 외도입니다. 외도라고 해서 뿔이 나고 괴상하게 생긴 게 아니거든요.

‘있다-없다’에 빠진 사람들은 전부 뭔가 밖으로 구합니다. 양변에 ‘있다-없다’ 빠진 사람들은 모든 문제 해결을 힘으로 합니다. 왜 힘으로 하느냐? 내가 ‘있다-없다’에 빠져서 이기심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 사람은 부처님을 교주로 모실 게 아니라 ‘부시’를 교주로 모셔야 됩니다. 힘으로 해결하는 건 절대로 부처님 제자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은 부시나 김정일을 교주로 모셔야지요.

원컨대 자성삼보는 자비로서 증명하소서.

자성삼보(自性三寶), 자성이 뭡니까? 내 존재원리에 두 측면이 있는데 하나가 자성이라고 합니다. 한 번 더 설명드리면, (손을 들어 보이며) 이게 손이잖아요. 손인데 이렇게 하면 손바닥이지요. 이렇게 하면 손등이지요. 손은 손인데 두 가지 면이 있거든요. 이 한 면을 우리는 자성이라고 합니다. 이걸 우리는 못 보고 있어요. 이것만 보면 우리는 다 부처님이 되는데 이걸 못 보고 있기 때문에 ‘내가 있다’고 자꾸 집착합니다. 지금 눈에 보이는 것은 형상이거든요.

그런데 형상은 보는데 형상 뒤에 있는 이걸 못 봅니다. 이게 자성입니다. 『반야심경』에서 “안이비설신의가 없다”고 하지요. 여기는 안이비설신의가 없어요. 죄도 없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런데 없는 이 면 뒤에 또 있을 수 있는 요소가 뒤에 있어요. 그런데 있는 형상이 보이면 이 형상만 있는 게 아니라 또 뒷면에 이것이 실체가 아니고 공이라는 요소가 들어 있어요. 이 양면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끝없이 (손을 들어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 보여줌) 이렇게 작용하고 있어요. 지금 그렇게 하고 있어요. 지금 여기에서 강의 들으면서도 생각은 부산 갔다가 서울 갔다가 대구 갔다가 하잖아요. 또 집에 가스 생각, 또 밥통 생각, 왔다 갔다 하고 있거든요. 그러면 밥통 생각하고 가스 생각하는 사이에 그 중간에 갭이 있지요. 그게 바로 이거잖아요(손을 들어 손바닥과 손등을 번갈아 보여줌). 생각할 때는 이거고 이게 가스가 되었다가 밥통이 되었다가 집에 딸이 되었다가 아들이 되었다가 아들 생각하고 딸 생각할 때 중간에 갭이 있잖아요. 이거예요. 그렇게 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이걸 못 보거든요. 있는 줄도 몰라요. 부처님이 얘기하니까 있는가보다 하지요. 이걸 확실히 본 사례가 있지요. 달마 스님한테 혜가 스님이 찾아와서 “마음이 괴롭습니다.” 했지요? 마음이 괴로운 거 형상이잖아요. 괴로운 증상 있잖아요. 그런데, “괴로운 마음을 가져오너라” 찾아보니 없어요. 순간적으로 없다는 이걸 봐 버린 거예요. 그러면 해결이 돼요.

선지식아, 혜능이 선지식을 권해 가지고 자성 삼보에게 귀의하게 하노니

밖에 있는 부처님이 아니죠. 자성삼보(自性三寶) 이제 앞으로 이걸 믿어야 돼요. 이거 믿으면 밖에 있는 부처님도 이것과 똑같이 봐요. 밖에 있는 삼보도 밖에 있는 부처님도 이면이 있거든요. 유정 무정이 다 이면이 있어요. 그러면 이것 봐버리면 밖에 있는 부처님도 “아, 이게 있구나!” 그러니까 이 세상이 부처님 아닌 게 없어요. 다 부처님이에요. 혹, 거사님이 집에서 잘못하거나 보살님이 잘못하면 다 이해가 되는 거예요. 너 존재원리는 본래 부처님인데 ‘있다’는 착각과 이기심에 빠져 잘못한 거니까 정말로 안타깝고 안타깝다. 그러면 모진 소리도 안 합니다. 싸움도 안 해요. 연민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 다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욕하고 미워해야 되는데 “아, 내 남편이 본래 부처님이었구나!” 하고 연민하면서 이해하거든요. 그러면 그 사람이 반성하고 개선해 가는데 훨씬 효과적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한 평생 누구를 마음 속으로도 미워하고 해친 분이 아니에요.

부처란 깨달음이요, 법이란 바른 것이며, 승이란 깨끗함이다.

그래서 귀의불양족존, 귀의법이욕존, 귀의승중중존 하는 것이나 귀의각양족존, 귀의정이욕존, 귀의정중중존 하는 것은 글자만 바꾸어놓았을 뿐이지 똑같습니다.

자기의 마음이 깨달음에 귀의하여 삿되고 미혹한 것이 나지 않으며,

우리가 자기 부처에 귀의하면 삿되고 미혹한 것이 나지 않는다. 그러면 삿되고 미혹한 게 뭐냐? ‘있다-없다’에 집착하는 거예요. 우리가 ‘있다-없다’에 집착하는 것이 삿되고 미혹한 것입니다.

그러면 일상에서‘있다-없다’를 초월해서 사고하는 분이 얼마나 있습니까? 대부분 ‘나다-너다’ 양변에 빠져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삿되고 미혹하게 살고 있는 거예요. 남의 얘기하는 게 아닙니다. 지금 우리 얘기하는 거예요. 우리가 평소 삿되고 미혹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하면서 화내고 욕심내고 미워하고 좋아하며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배워서 자성 부처님을 믿고 그것을 체험하는 건 놔두고 이해라도 하면 삿되고 미혹한 데서 조금은 비껴갈 수 있습니다. 완전히 비껴가려면 체험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반 걸음이라도 이쪽으로 비껴나 있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럼 세상 살아가는데 훨씬 편해요. 또 이것이 지혜가 되어 가지고 이 세상 살아가는데 굉장히 도움이 되는 지혜가 나옵니다.

예를 들면 지금 하늘에 해는 항상 있지 않습니까? 구름이 많이 끼면 컴컴하거든요. 구름이 얇게 끼어 있으면 해는 못 보지만 밝잖아요. 해 보면 체험한 것이고, 우리는 점점 두꺼운 구름이 옅게 만들어 가는 과정이니까 옅게만 만들어도 굉장히 밝습니다. 우리가 해는 못 보더라도 밝으면 더 잘 보잖아요. 내가 뭘 잘못하고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되고 문제를 어떻게 풀어야 되겠다는 것이 환하게 보여요. 미련하게 부시 같이 돈 들여서 사람을 수 없이 죽여도 소용없어요. 끝이 없어요. 그 악순환은 부시가 아니라 부시 고손자한테 가도 계속 악순환 됩니다. 그건 끝이 없습니다. 이런 험악한 세상을 종식시키고 마음 편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면 저는 스님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대안은 불교 밖에 없습니다.

적은 욕심으로 만족한 줄 알아(少欲知足) 재산도 여의고 색도 여의는 것을 양족존이라 이름한다.

‘적은 욕심으로 만족한다(少欲知足)’ 했는데 사실은 이 ‘소(少)’자를 ‘무(無)’자로 봐야 됩니다. 자성 자리를 깨닫게 되면 욕심이 없어집니다. 욕심이 없어진다고 가진 것을 다 버리는 게 아니에요. 앞에서 ‘상에서 상을 여의고, 염에서 염을 여읜다.’ 그랬듯이 산더미 같이 보물을 쌓아 놓더라도 무소유한 사람이 있고요. 조그마한 것 가지고도 유소유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있고 없고 하는 게 문제가 아니고 그것을 가지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수달타 장자의 예에서 보듯이 부처님께서는 수달타가 그렇게 부자라도 “너는 더 가져라.” 했습니다. 많이 가지더라도 무소유한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도 안 가지고 다 내버린다고 무소유가 절대 아니에요.

인도 자이나교 같은 수행은 그렇게 하고 있지요. 하나도 안 가져야 무소유라 해서 옷도 하나도 안 걸치고 벌거벗고 다니잖아요. 그게 무소유가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만약 마음속으로 물질에 대한 욕망, 이성에 대한 욕망, 명예에 대한 욕망이 있다면 아무리 벌거벗고 다녀도 그 사람은 무소유가 아니에요. 좋은 옷을 입고 여러 가지를 갖고 있더라도 마음으로 그런 것을 떠난 사람은 무소유입니다. 무소유하려면 마음에서 양변을 여의어야 됩니다.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그렇게 되거든요. 그런 사람은 옷을 잘 입든 못 입든 상관이 없어요.

그래서 여기에 ‘소욕지족(少欲知足)’을 ‘무욕지족(無少欲知足)’이라고 해석하면 좋겠어요.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무소유에 대해서 오해하는 분들이 참 많아요. 아무 것도 안 가져야 된다. 그래서 ‘스님들이 아무 것도 안 가져야 되는데 왜 가지느냐?’ 이렇게 얘기하는데 스님들도 옷이 있어야 입고 쌀이 있어야 밥을 먹잖아요. 그런데 불필요한 것은 가질 필요가 없지요.

부처님께서도 불필요한 것은 갖지 말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집 짓는 것도 불필요한 것은 절대 지어서 안 되고 사치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정말로 수행하는데 필요한 것만 가지고 아주 검소하게 살아라 그랬습니다. 경전에 보면 출가하기 전에 왕자였던 어느 스님이 집을 근사하게 지었다가 부처님한테 혼이 난 얘기도 나옵니다.

그런데 갖고 있어도 무욕할 수 있는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게 뭐냐?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이라고 보면 아무리 가지고 있어도 그것은 인연에 의해서 자기한테 오면 보관 잘 하면서 정말로 너도 좋고 나도 좋은 더불어서 함께 살면서 서로 좋은 방향으로 쓰면 됩니다.

우리가 ‘있다-없다’를 초월하면 자연히 그렇게 됩니다. 형상이 문제가 아니고 실제 우리 마음 상태가 무소유, 유소유로 갈라진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것을 양족존(兩足尊)이라고 했는데, 양족존은 다른 데서는 부처님이 복(福)과 혜(慧)를 가졌다고 양족존이라 하는데, 여기에서는 재물과 색을 여의고 소욕으로서 만족함을 아는 것을 양족존이라 했습니다. 이렇게 같은 해석으로 보면 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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