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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은 생각하는 대로 일어난다

기자명 법보신문

봉사-기도-염불에
정견 갖추면 금상첨화

아무 생각 없으면
‘空’ 아닌 ‘무기공’

13. 三歸 (삼귀의)

<사진설명>고우 스님이 혜능 스님의 삭발 수계 도량인 중국 광주 광효사에서 비문을 보며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늘 말씀드리지만, 공부하는데 가장 중요한 것이 정견을 갖추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견해에 반발하는 분들도 더러 있습니다. 나는 『육조단경』, 『서장』, 『선요』를 보면서 확신하고 말하는 겁니다.

근래 큰스님들은 당신이 능력도 있고 도를 통한 분들이니까 정견을 갖추라는 말을 안 했지만, 지금은 선지식이 가고 없는 세상에 우리는 바른 믿음으로 정견을 갖추고 공부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참선을 하든지, 봉사, 염불, 기도 등 이왕에 하던 거 그냥 하면서 거기에 정견을 하나 더 보태면 정말로 효과적으로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100보가 견성이라면 50보를 가고 30보를 갈지라도 간 것만큼 내 생활이 자유로워지고 마음도 평화로워져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수행 풍토는 병을 약으로 고치려 하지 않고 병을 병으로 치료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정견을 갖추고 발심하여 공부를 해야지 유무(有無)를 편견으로 맹목적인 발심으로 공부하는 것은 병을 병으로 치료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바른 믿음으로 공부를 하자. 우리가 바른 견해를 세워 공부를 해야 한다. 지금 세상은 이것이 더 강조되어야 합니다.

선지식아, 각자 스스로 관찰하여 마음을 그릇되게 쓰지 말라.
이게 뭡니까? 정견을 갖추고 바로 공부하라는 말이죠.

경 가운데 ‘오직 스스로의 부처님께 귀의한다’하고 다른 부처에게 귀의한다고 말하지 않았으니, 자성에 귀의하지 아니하면 귀의할 바가 없느니라.

자성에 귀의하지 않으면 돌아갈 곳이 없어요. 그러면 말만 귀의했다 하지 그것은 괜히 헛말 하고 앉아 있는 거예요. 진짜 귀의하려면 자성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자성(自性)이 뭡니까? 앞서 우리가 못 보고 있는 존재원리의 본질, 그 자리입니다. 보이는 것은 다 보잖아요. 형상은 다 보고 있잖아요. 다 보는데 부처님이 보고 있는 그 자리를 우리는 못 보고 있거든요.

그게 뭐냐? 바로 자성입니다.

그래서 혜가 스님이 “마음이 괴롭습니다” 하니까, 달마대사가 “괴로운 마음을 가지고 오너라” 하자 바로 그 자리에서 자성을 보고 깨달은 거예요. 이 선(禪)은 바로 그 자리에서 깨달으라고 질문하는 것이지 의심하라고 질문한 것이 아닙니다.

14. 性空 (성품이 빔)

성품이 공한 자리가 ‘너다-나다’ ‘좋다-나쁘다’ 등 모든 것을 초월해요. ‘부처다-중생이다’, ‘반야다-미망이다’도 초월하는 자리입니다.

실제 ‘부처’라는 말도 표현할 방법이 없어 할 수 없이 ‘부처다-중생이다’ 이름을 붙이는 것이지 성품이 빈 그 자리에 가면 이 이름은 다 거짓말입니다.

이제 이미 스스로 삼보에게 귀의하여 모두 지극한 마음들일 것이니 선지식들에게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설하리라.

앞에서 참회도 했고 자기 삼보에게 귀의도 했으니 모든 사람이 지극한 마음이 되었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법이란, 마하(摩訶)는 크다, 반야는 지혜라는 뜻이죠. 양변을 여읜 그 자리가 마하 반야입니다. 그래서 마하 반야, 큰 지혜로서 저 언덕에 건너가는 법을 설해 주십니다.

저 언덕이라 하니 굉장히 멀리 있는 것 같지만 우리가 보고 듣고 하는데 다 저 언덕에서 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자기 안에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그 자리를 보면 한 발자국도 안 떼고 바로 저 언덕에 가는 겁니다. 강을 수고스럽게 건널 필요도 없고 발을 내디딜 필요도 없고 달려갈 필요도 없습니다. 일체 우주 만물이 바로 실체가 없고 공이라는 것을 알면 손 하나 까닥 안 하고 그 자리에 도착합니다. 이렇게 가까이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못 보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비유를 하나 들자면, 자기가 자기 눈동자를 보려면 거울을 봐야 합니다. 우리는 거울을 봐야 내 눈동자가 충혈 되었구나, 어떻구나 하듯이 거울 없이 자기 눈동자를 볼 수가 없어요. 왜냐? 너무 가까이 있어서 안 보여요.

이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눈에 눈동자가 붙어 있는 것과 똑같아요. 우리가 자기 눈동자를 못 본다고 눈동자가 없는 게 아니거든요. 있어요. 그렇다면 바로 보십시요.

선지식아, 비록 마하반야바라밀법을 생각은 하지만, 잘 알지 못하니 혜능이 설명하여 주리라.

육조 스님 당시에도 이 양변을 여읜 자리를 아는 게 어려웠나 봐요. 우리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양변을 여읜 그 자리를 『반야심경』에서는 실체가 없으니 공이다. 그렇게 말했는데 이것을 이해하기가 쉽지는 않아요. 그래서 육조 스님께서 알지 못하니 설명해주겠다고 하십니다.

각각 잘 들어라.

마하반야바라밀이란 인도의 범어이다. 당나라 말로는 ‘큰 지혜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뜻이다.

범어는 인도의 고대 언어의 하나인 산스크리트어입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해석한다면 ‘대지혜로서 저 언덕에 이른다’는 말입니다. 이 ‘대지혜’가 바로 ‘너다-나다’ ‘선-악’ 거기에서 그것을 초월한데서 나온 지혜입니다.

이 법은 모름지기 행하는 것이고 입으로 외우는데 있지 않으니, 입으로 외우고 행하지 않으면 꼭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나,

우리는 매일 『반야심경』을 외우잖아요. 그런데 마음으로 실천하지는 않아요. 왜? 공을 모르니 실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공을 알면 행하지요. 그렇게 보고 사고합니다.

우리가 입으로는 외우는데 실천하지 못함은 어찌 보면 당연해요. 이것을 행하려면 공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해 못하는 상태에서는 입으로 매일 외워도 마음으로 할 수가 없어요. 이해해야 나옵니다.

그래서 중도 연기를 이해해서 정견을 갖춰야 합니다. 불교에서 믿음의 대상을 막연히 부처님이라 하지 말고 부처님이란 어떤 상태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바로 알지 못하면 바로 갈 수가 없습니다.

닦고 행하는 이는 법신과 부처와 같다.
그것을 이해해서 닦고 행하는 이는 법신과 부처님과 전부 같다. 둘이 아니다.

무엇을 마하라고 하는가?

마하는 큰 것이다. 마음이 한량없이 넓고 커서 마치 허공과 같으나 빈 마음(空心)으로 앉아 있지 말아라. 곧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진다.

허공과 같다고 아무 것도 없는 마음인가 해서 마음을 비우고만 앉아 있으면, 무기공에 떨어집니다. 대혜 스님이 비난한 적적(寂寂)에만 빠져 있는 삿된 수행자, 그런 사람이 바로 무기공에 떨어져 있습니다. 불교 공부는 반드시 적적(寂寂)만 해서 안되고 성성(惺惺)이 같이 붙어 적적성성(寂寂惺惺)해야 합니다.

부처님도 성불하기 전에 이 적적 공부를 많이 했어요. 그런데 적적 삼매에 들어가면 굉장히 편안하다가 현실로 돌아와서 이해관계에 얽힌다든지 눈으로 좋고 나쁜 것을 보면 또 마음이 불안했어요. 그래서 부처님도 그 공부를 그만두고 나중에 독자적으로 공부하셔서 존재원리를 깨달았습니다.

여기에서도 마음이 허공과 같다고 하니까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는 것이 허공과 같은 것이라 오해하지 말아라. 그렇게 오해하면 무기공에 떨어진다고 하셨습니다.
그럼, 부처님이 허공과 같다는 것은 어떤 것이냐?

허공은 능히 일월성신과 산하대지와 일체 초목과 악한 사람과 착한 사람과 악한 법과 착한 법과 천당과 지옥을 모두 그 안에 담고 있다. 세상 사람의 성품이 공한 것도 이와 같다.

우리 성품에서 악을 생각한다고 그 성품이 어디 흠집이 나고, 또 착한 것을 생각한다고 좋게 되고, 또 천당-지옥을 생각한다고 그 성품이 변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 몸 밖에 해와 달ㆍ별, 산하대지, 일체 초목이 다 허공에 포함되어 있어도 거기에 흠집을 주거나 예쁘게 만들어 주는 그런 것과 상관없이 그것을 다 포함해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성품도 착한 마음 - 악한 마음 어떤 마음을 갖더라도 그 성품 속에 다 포함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다 포용하고 포함해 있어도 그것이 실체가 없고 공입니다. 일체가 연기현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그것과 잘 조화해서 어디에도 걸리지 않고 자유자재할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공한 줄 모르고 악한 생각을 일으키면 악행을 합니다. 선한 생각을 일으키면 또 선행을 합니다. 생각 생각 일으키는 대로 행동이 나오는데 그것은 성격은 다 포용하고 있어요. 그것이 모두가 연기현상이고 실체가 없고 공입니다. 이것을 알아야 악한 것도 선한 것으로 변하고, 이 선한 것도 상대 선에서 절대 선으로 변하고, 이렇게 우리가 정말로 매일 매일 좋은 날이 되는 그런 마음 상태를 만들어갑니다.

그런데 그 만들어 가는 것이 본래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본래 되어 있는 것과 만드는 것이 서로 계합(契合), 상응(相應)합니다. 그러면 자유자재하고 부처님과 똑같은 생활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요즈음 주관 객관이 버려진 상태에서 알음알이로 견성했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관 객관이 하나가 되어서 본래 그 자리에 계합하고 상응할 때만이 참된 돈오견성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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