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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일제시대 역경사업

기자명 법보신문

조선 독립-민족문화 보존 방편으로 추진

대표 역경사 백용성…삼장역회 조직
범어사 등 경남지역 3본사 가장 적극
총독부의 조선교육령 시행으로 중단

<사진설명>일제시대 역경사업에 헌신한 백용성 스님.

역경 사업은 어려운 한문으로 된 불경을 알기 쉬운 우리말로 번역하고, 책으로 출간하여 일반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게 하는 것으로 포교의 중요한 방법의 하나이다.

포교는 크게 포교사를 대면하여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방법과 글이나 음반 또는 영상 매체 등을 통하여 이루어지는 간접적인 방법이 있다. 직접 대면하는 이루어지는 포교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만 문서나 책을 통하는 방법은 직접 대면하는 것에 비해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덜 받는다. 불교는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기 때문에 불경은 거의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있다. 그런 까닭에 한문 경전이 쉬운 우리말로 번역되어 대중들에게 전달될 때 그 힘은 놀랄만 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역경사업은 포교의 한 방편으로 큰 의미가 있다. 한글이 창제된 이래 역경사업은 조선초기부터 있어왔다. 왕실에서 발간한『월인석보』나 『석보상절』은 그 좋은 예이다. 조선시대 역경은 왕실의 안녕과 발전을 위한 목적에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반 대중들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일반 대중들을 위한 역경은 일제시대부터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기 역경 사업은 참으로 어려운 상황에서 몇몇 선각자들에 의해 진행되었다. 역경 사업이 부진하였던 까닭은 첫째 한문과 한글에 함께 능통한 학자나 승려들이 적었다. 둘째, 번역된 불경을 책으로 발간할 수 있는 재정적인 지원이 부족하였다. 셋째, 번역되어 발간된 불경을 구입해서 읽은 수 있는 독자층이 그리 많지 않았다. 넷째, 일제시대에는 모든 출판물이 사전에 엄격한 검열을 받아야 했으므로 한글로 번역된 불경이 출판되기 어려웠다. 특히 중일전쟁 이후 1938년 3월 제3차 조선교육령이 시행되고 나서는 한글 사용이 금지되었고, 1940년 2월 창씨개명령이 시행되면서부터는 더 이상 한글 번역본은 출간될 수 없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역경 사업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그 의의가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시대 역경 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한 승려는 한용운이었다. 그는『조선불교유신론』에서 포교 방편으로 역경 사업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는 포교의 방법은 하나가 아니라고 전제하고, 혹은 연설로 포교하고, 혹은 신문·잡지를 통해 포교하고, 혹은 경을 번역하여 널리 유포시켜 포교하고, 혹은 자선 사업을 일으켜 포교하는 방법이 있다고 하였다. 지금 조선의 불교는 이런 시도가 전무하다고 하면서 포교가 부진한 현실을 개탄하고, 역경 사업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937년 6월호『불교』신 제3집에「역경의 급무」라는 논설에서 역경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지금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유포한다면 그것은 불교의 포교라는 의미를 떠나서 조선문화에 도움되는 것이 적지 아니할 것이다.

우선 현재에 있어서 조선인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한글의 선포라든지, 권선징악의 인과율적 정신문화라든지 불교의 오묘한 문학을 번역 출간한다면 미래의 조선문학에 대한 영향이라든지 모든 점으로 보아서 역경과 조선문화와는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통하여 실로 한 두 가지가 아닌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역경 사업을 불교 포교의 범위를 넘어서 조선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창달하기 위해서라도 역경을 서둘러야 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당시 그의 이러한 주장은 큰 공감을 얻지 못하였다.

일제시대 역경 사업에 매진하였던 승려는 한용운과 함께 3·1운동에 이른바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던 백용성이다. 그가 역경 사업에 투신하게 된 동기는 독립선언서에 서명을 하였다는 죄목으로 서대문 감옥에 투옥되어 옥살이를 하면서 다른 종교인들은 각자 자기가 믿는 종교의 경전을 읽으면서 기도를 하는데 그 경전이 거의 모두 한글 경전이었다는 점에 자극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불경을 한글로 번역하겠다는 원력을 세우고 1921년 3월 출옥한 이후 삼장역회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역경 사업에 착수하였다. 그 성과로 1921년 9월에 『심조만유론(心造萬有論)』과 1922년 1월에 『금강경선한문신역대장경』을 간행하였다. 이 책들이 발행될 때 백용성은 다음과 같은 심경을 토로하였다. “어찌할 수 없어 지식과 재주 없음을 생각지 아니하고 선한문으로 『심조만유론』과『금강경선한문신역대장경』을 번역하고…”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백용성의 역경 사업에 대한 열정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그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불경 번역을 위해 인적 구성과 재정상황 등 제반 여건이 무모하다고 생각되었지만 시대적 소명의식에서 역경 사업을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그의 열정을 당시 동아일보는 「불교의 민중화운동」이라고 소개하고, 찬사를 보내면서 격려하였다.

백용성 역경 사업의 백미는 한글『화엄경』의 발간이었다. 그는 1926년 음력 4월 17일에 양산 내원암에서 만일참선결사를 시작하면서 『화엄경』의 번역에 착수하여 1927년 11월 13일에 끝을 마쳤다고 한다. 『화엄경』첫 권은 7월 20일에 인쇄를 시작하여 11월에 간행되었고, 12권 완간은 1928년 3월 28일에 이루어졌다. 당시 불교계의 잡지인 『불교』지는 한글 화엄경의 간행을 「백용성 선사의 후반생 필사적 노력의 결정체」라는 제하에 이 뜻 깊은 사업을 다음과 같이 찬미하였다. “중국에서 조선에 불교가 수입된 이래 한글로 화엄경을 번역한 것은 처음인 만큼 장래 조선불교계에 있어서 더없이 소중한 보물을 일반인이 함께 기뻐하게 되었다.” 그는 삼장학회라는 번역 단체를 설립하여 불경의 번역을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시행하였다. 그리고 이 번역서들을 시중에 판매용으로 유통시킴으로써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불경 번역 사업에 재투자 할 수 있는 자원으로 활용하였다. 그가 일생 동안 번역한 불경은 무려 30여종이나 된다고 하니 그의 역경 사업에 대한 집념과 열정이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찰에서 시행된 역경 사업으로는 31본산 가운데서 경남 3본산에서 시행한 번역·출간 사업을 들 수 있다.

해인사·통도사·범어사를 지칭하는 경남 3본산은 1934년에 종무협의회를 구성하고 해동역경원을 발족시켰다. 운영 자금은 3본산이 공동으로 부담하였고, 원장은 통도사 주지였던 김구하가 맡았다. 운영의 책임을 맡은 도감(都監)은 김구하·김경산·김설암·이고경·임환경·백경하·오성월·차운호 등 9명이었으며 주임 역경사는 범어사의 허영호였다. 허영호는 일본 유학을 다녀왔으며 중앙불전의 교수를 지냈고, 범어사·다솔사 강원의 강사를 지낸 신·구학문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는 해동역경원에서 역경 사업을 주도하면서 포교 총서를 간행하였다. 제1집으로 『불타의 의의』와 제2집 『사종(四種)의 원리』을 발간하고, 한글 번역본으로 『불교성전』을 간행하였다. 그러나 해동역경원은 중일전쟁 이후인 1938년 9월에 3본산종무협의회에서 당분간 역경사업을 중단한다는 결의에 따라 활동을 중지하였다. 이렇게 된 배경은 앞서 말한 제3차 조선교육령의 시행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사진설명>백용성 스님이 3·1운동에 연루돼 감옥살이를 하고 출옥한 이후인 1922년 1월 최초로 번역해 간행한 『신역대장경』(사진제공=민족사)

이 밖에도 역경 사업과 관련하여 언급해야 할 승려로는 안진호와 김태흡을 들 수 있다. 안진호는 경북 예천 출신으로 용문사로 출가하여 김용사·대승사의 강원에서 강사로 활약하다가 1929년에 상경하여 서대문에 만상회(卍商會)를 설립하고 여러 가지 불구(佛具)들을 판매하기도 하고 저술 및 역경 사업을 하였다.

만상회에서 발간한 그의 저작들은 불교계 신문이었던 불교시보사에서 판매하기도 하였다. 그는 『천수심경』과 같은 경은 한글로 번역하기도 하였지만 주로 한문에 토를 단 현토 해석을 주로 하였다. 김태흡은 불교시보를 발행하면서 논설을 통해 역경사업의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김대은 또는 석대은 스님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법주사 강원을 졸업하고 일본 유학을 다녀 온 엘리트 승려였다. 그가 역경 사업의 중요성을 밝힌 점에서는 선구적인 인식을 가졌지만 1930년대 후반에 심전개발운동에 참여하여 전국 순회강연에 나서면서 적극적인 친일 행각을 벌이는 오점을 남겼다.

일제시대 역경 사업은 인력난에 재정난 그리고 독자층 문제 그리고 모든 출판물들이 사전에 검열을 거쳐야 하는 지극히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 혜안을 가진 승려들에 의해서 역경 사업이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근대 불교사에 있어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역경 사업은 일제가 중국 침략을 감행하고 전시체제로 돌입하면서 한글 사용을 금지시킴으로써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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