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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권위 타파해야 禪이다”

기자명 법보신문
  • 선정
  • 입력 2007.06.02 10:01
  • 댓글 0

고우 스님 한·중 선 불교를 말하다

<사진설명>고우 스님은 “정견을 갖춰야 간화선 수행을 바르게 할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난해 봉화 문수산에 작은 암자를 마련, 승속을 불문하고 찾아오는 모든 이들에게 중도정견을 갖추는 지혜를 나누고 있는 고우 스님. 스님은 「법보신문」이 중국선종사찰순례기 연재를 시작한 후, 중국선종사찰 순례길에 나서는 불자들에게 꼭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5월 23일, 시골길을 한참이나 달려 찾아간 경북 봉화군 산골 마을 금봉암(金鳳庵)에는 부처님오신날을 하루 앞두고 있었음에도 연등하나 보이지 않았다. 연유를 물으니, “귀찮아서”라며 빙긋 웃던 스님은 “연등도 불공도 모두 형식일 뿐”이라고 짧게 말을 이었다. 이것이 “내면의 가치부터 알고 밖의 조건을 추구해야 한다”고 했던 스님의 가르침일까. “차나 한 잔 하자”는 스님을 따라 자리에 앉으면서 중국 선종사찰 이야기부터 물었다.

몇 차례나 중국선종사찰을 다녀오셨나요.
지난 3월 중앙신도회 불교인재개발원 순례단과 함께 다녀온 것이 여섯 번째가 되네요. 지금은 힘들어서 못하지만 그 전에는 아는 스님과 한 달씩 배낭여행을 하기도 했어요.

중국 초기 선종사는 수난사

그렇게 여러 차례 같은 곳을 다녀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배운 어록들이 전부 중국 선사들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그분들이 강의하고 법문 했던 장소, 살았던 행적이라든가 자취를 찾아가면서 현장학습을 하는 것이지요.

옛 선사들의 자취나 당시를 연상할 수 있는 모습이 있었습니까.
사실 상당히 많은 차이가 납니다. 우리도 실제 옛 선사 스님들에 대해서 배우지만 현재의 모습이 그때와 같은 게 얼마나 있나요. 시대상황이나 생활모습 그리고 환경이 달라지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지요. 그렇다고 해도 정신만큼은 달라지지 않고 계승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점이 안타까울 뿐이지요.

한국 선종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중국 선종의 특징이 뭡니까.
한마디로 형식과 권위, 허례허식을 타파하고 본래 모습대로 불교를 생활 속에서 완성시키는 것이 선종의 목표입니다. 중국은 달마 스님이 오기 500년 전에 불교가 들어왔는데, 목적보다는 과정을 중시하면서 손가락을 가르쳤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수도였던 낙양 영녕사(永寧寺)에 벼락을 맞고 나서 타는 데만 1년이나 걸린 거대한 목탑이 있었습니다. 달마 스님이 그 탑을 보고 ‘나무! 나무!’한 이유는 형상과 본질을 함께 보지 못하고, 형상에만 치우쳐 있던 당시 중국불교에 대한 탄식이기도 합니다. 초기 선종은 그 형상의 타파를 시도하면서 수난을 겪지요.

선종사가 수난사라는 말인가요.
그렇지요. 달마 스님은 많은 절을 짓고, 탑을 쌓고, 경전을 번역했는데 어떤 공덕이 있느냐고 묻는 양 무제에게 ‘아무 공덕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는 형식주의, 즉 형상에 치우친 당시의 중국불교 현상에 대한 질책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오랜 형식주의가 권위주의로 발전하고 권위에 의해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들이 많은 중국불교에 달마가 ‘깽판’을 놓은 격이지요. 벽암록에 달마 스님에게 독약을 보낸 사람이 보리유지삼장과 관통율사로 나오는 것을 볼 때 이것이 바로 기득권에 의한 선종 수난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달마 스님 이후는 어떻습니까.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자면서 평범한 생활을 통해 완성해 나가는 것이 선인데, 선종의 이런 가르침이 기득권을 위협했던 것이지요. 혜가 스님은 불교가 세속의 일상생활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다 타살 당하고, 승찬 스님은 입은 다물고 손을 놀리는 것으로 신심명 하나를 내 놓았는데 그것마저 인정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리고 도신 스님은 의술을 펴서 황제의 병을 낫게 했는데, 그 일로 국가의 보호를 받으면서 선종이 정착할 수 있게 됐지요. 도신의 의술은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중국 선종 초기 선사들의 안심법문에도 중도가 있습니까.
안심법문(安心法門)은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회광반조는 적적성성인데, 우리의 의식이 본래 적적성성(寂寂惺惺) 아니면 성성적적(惺惺寂寂)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체용이라고도 하고 명암 혹은 정혜라고도 합니다. 여기서 정(定)은 적적이고 혜(慧)는 성성입니다. 초조부터 이어지는 회광반조는 적적성성 공부이고, 6조부터는 성성적적 공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적적성성된 사람은 성성적적할 수 있고, 성성적적된 사람은 적적성성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성격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적적과 성성은 어느 한쪽만 유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삶의 형상이기도 합니다. 적적이나 성성만을 는 극단이 아니니 중도이지요.

정견을 갖추라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요.
정견을 갖추라고 하는 것은 여행에 비유하면 이렇습니다. 아무 준비 없이 가는 사람도 있고, 안내자와 함께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한번도 가보지 않은 미답의 길을 혼자 가려면 여러 가지 준비가 필요하지요. 수행에 있어서 그 준비과정이 바로 정견을 갖추는 것입니다. 지금 선지식이 많지 않으니 정견을 먼저 갖추고 수행을 하라는 것입니다. 선지식이 있어도 길을 오도하는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정견을 갖추는 것은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적적과 성성은 같이 가는 것

간화선, 어떻게 공부해야 합니까.
결국은 가치관입니다. 가치관을 바꾸지 않은 상태에서 공부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은 돈, 명예 등 그 어떤 것이 되었든 내 밖의 조건을 가치로 추구하는 것입니다. 밖의 조건이 행복을 만들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에서 점점 멀어지게 됩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육체와 정신의 본질을 내면의 가치라고 하는데, 내면의 가치를 깨달으면 도인이 되는 것이고 깨닫지 못하더라도 이해만 할 수 있으면 삶의 방향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중도연기입니다.

내면의 가치를 알면 어떻게 바뀌는 것입니까.
내면의 가치를 알면 인격이 따라오고, 내면의 가치를 알아 가치관이 바뀌면 사심이 없어집니다. 사심이 없어지는 것은 자기희생이 아닙니다. 사심 없이 모든 것을 전체로 보면 전체 입장에서 사고하고 그 속에 자기가 들어가 있기 때문에 자기가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면 무한경쟁이 아니라 ‘무한향상’이 되는 것입니다.
선종사찰을 찾는 불자들에게 당부하실 말씀은요.
어떤 시각으로 무엇을 보고 올 것인가 하는 것이 중요 합니다. 형식주의와 권위주의를 타파하는 선종의 목적을 제대로 알고 봐야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습니다. 껍데기만 보고 오면 안되고, 형상보다 내면의 가치를 보게되면 옛 조사 스님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야 돌아오면서 ‘나도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결론이 나오게 되겠지요.

내면 가치 알고 조건 구해야

조사들에게도 간화가 있었습니까.
선종사찰을 찾는 그 밑바닥 정서에는 선의 입장이 있습니다. 육조 스님 이후 어록에 간화와 유사한 방법으로 제자들을 가르쳤던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450여 년을 이어오다가 대혜 스님 때 정착시키게 된 것입니다. 선사들의 문답에서 화두가 만들어졌는데, 선사들이 질문할 때는 의심을 요구한 것이 아니라 대답을 요구한 것입니다. 의심은 즉석에서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하는 것이니, 처음부터 알고자 하는 의지 없이 의심하는 것과는 천지 차이지요. 알고자 하는 의지 없이 의심부터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간화선 수행자들이 분명히 알아야 할 일입니다.

깨달음은 무엇입니까.
주관과 객관이 하나가 되어 자기본래 자리에 계합하고 상응할 때 비로소 깨달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벌어진 상태에서 깨달음이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물었을 때 대상화되어서 대답한 것과 하나가 되어서 대답한 것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주관과 객관이 벌어진 상태에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속지 마세요. 깨달았다고 큰소리치는 데서 바로 이기심이 나옵니다. 그리고 수행 좀 했다고 차별과 이기심을 안으로 숨긴 채 밖으로 깨달았다고 하는 자기 자신에게도 속지 마세요.
 
봉화=심정섭 기자 sjs88@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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