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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흠 교수의 詩로 읽는 불교]13. 육바라밀①-김기림의 ‘나비’

기자명 법보신문

진여 찾는 나비는 바다가 두렵지 않다

<사진설명>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았을지언정 자식은 결코 부모와 같지 않다. 경험을 통해 완성되지 않은 부분들을 채우며 끝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사진은 불교사진연합회 회원 김우영 作 '난 심심해'.

아들을 키우다보니 유전자라는 것에 새삼 감탄한다. 지능지수뿐만 아니라 성격에서 버릇까지 똑같다. 별스런 것까지 유전자에 다 있어 어느 때엔 등골이 오싹하기까지 하다. 나의 체세포를 떼어내 복제인간을 만들면 그들은 똑같을까?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단언한다. 유전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상당하지만, 분명 경험을 통하여 학습하고 깨닫는 영역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재수를 하지 않았어도 겸손한 인간이 되었을까. 내가 치매를 앓는 아버지의 죽음을 맞지 않았어도 실존적 자각을 하였을까. 내가 유신에서 5공화국으로 이어지는 시절에 대학을 다니지 않았어도 사회학적 인식과 인문학적 성찰을 할 수 있었을까. 내가 대학 1년 때 일세방에서 살지 않았어도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돌아볼 수 있었을까. 답은 ‘노(No)’다.

‘미완’은 인간의 우월성

신은 완전하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부족하고 모자람 많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어쩌면 인간은 신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는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갖추고 결혼한 부부가 알뜰살뜰 살며 하나, 하나 살림을 늘려가는 가난한 부부의 행복을 어찌 경험하겠는가. 그 미완 때문에 인간이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는 빈자리가 생긴다. 부끄러운 자신을 돌아보며 참회하고 성찰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하여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데 인간 삶의 진정한 의미가 있다.

아모도 그에게 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힌 나비는 도모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靑 무우밭인가 해서 나려 갔다가는/어린 날개가 물결에 저러서/公主처럼 지쳐서 도라온다//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어서 서거푼/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승달이 시리다.//-김기림, 〈바다와 나비〉 전문

위 시는 유명한 모더니스트인 김기림의 시이다. 모더니스트답게 이미지로 연결시키고 있고 사물과 새로운 관계를 설정하여 은유와 환유를 만들고 있다. 은유는 보름달을 보고 동그랗다는 유사성을 바탕으로 ‘엄마 얼굴’로 연상하고 의미를 전이하듯, 유사성의 유추에 의해 별개의 사물과 의미를 동일화하는 것을 이른다. 환유는 ‘보름달’에서 그것과 시간적으로 인접한 ‘추석’, 공간적으로 인접한 ‘구름, 별, 동산’, ‘달맞이’ 등 보름달과 관련된 경험을 떠올리듯, 인접성을 바탕으로 유추하고 의미를 전이하는 것을 이른다. 이 시에 활용된 은유와 환유가 창조적이기에 시 텍스트에 반영된 현실이 무엇인가 찾아내기는커녕 의미를 파악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여기서 나비는 수심도 모르고 바다에 덤비고 무서워하지 않으며, 바다를 청 무밭으로 착각하여 내려가려 하였으며 어리고 꽃을 그리는 존재이다. 텍스트 안에서 나비는 공주에 비유되고 있다. 나비는 철모르고 순진무구하며 어린, 공주와 같은 존재의 은유이다.

이런 존재가 바다에 뛰어든다.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서워하여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바다는 무서운 대상이다. 바다는 청 무 밭과 파랑 색으로 유사성을 갖는다. 무 밭은 나비가 잘 날아다닌다는 경험적 인접성에 의한 환유이다. 그렇다면 바다는 청 무 밭으로 착각한 무서운 대상의 은유이다. 그러나 나비는 바다에 빠져 생을 마감한 것이 아니라 수직과 수평의 비상을 반복하고 있고 바다에 날개가 저리기는 하였지만 바다가 청 무 밭이 아님을 알고 돌아온다. 이는 바다가 꼭 부정의 의미가 아니라 경험의 바다를 뜻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초승달은 여리고 가냘픈 나비의 몸과 유사성을 갖는 은유이자 차가움의 환유이기도 하다. 초승달은 이미지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나비를 더욱 가냘프게 하고 비애를 안겨주는 차갑고 냉혹한 현실이다. 초승달은 바다, 물결과 함께 나비에게 ‘서거품’을 주는 동위소로 작용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시는 거대한 바다에 대비되는 사소하고 유한적 존재가 철모르고 순진하여 꿈(꽃)을 좌절당한 비애와 경험을 노래하고 있다. 그 좌절 속에서도 가냘픈 날개 짓을 멈추지 않고 꽃을 찾는 나비를 그리고 있다. 나비는 다시 그처럼 나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인간존재를, 바다는 인간이 살아갈 생을, 꽃은 그가 찾는 이상이나 진리를 뜻할 것이다.

이 시를 작가의 의도와 달리 불교적으로 해석하면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나비는 진여 불법을 찾는 인간 존재이다. 그는 꽃(진여 불법)을 찾아 길을 가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나비가 망망대해를 건너는 일만큼이나 험난한 길이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꽃만을 보고 날개 짓을 하기에 그 바다가 두렵지 않다. 그가 마주치는 경험과 그에서 겪는 고통은 그 깊이가 얼마인지 가늠할 수조차 없다. 그것이 혹 진여불법이 아닌가 하고 찾아 달려가다가는, 푸른 바다를 청 무 밭으로 착각하여 내려갔다가 시린 바닷물에 날개를 적시는 나비의 형세가 된다. 그에게 찾아오는 것은 깊은 좌절이다. 그러나 그는 꽃을 찾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다.

좌절해도 날갯짓 멈추지 않아

나비는 젖은 날개를 쉴 나뭇잎조차 만나지 못하였지만 꽃을 향한 비상을 멈추지 않는다. 수평과 수직의 날개 짓을 반복한다. 도를 찾는 인간 존재 또한 마찬가지이다. 매양 달려가 보지만 늘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도, 용맹정진을 할수록 좌절이 더 깊어짐을 알고도 정진을 멈추지 않는다. 그가 마주치는 현실은 냉혹하고 냉정하다. 삼월달의 차가운 바다, 아직 불법의 꽃이 피기엔 멀었고 밤은 또 일찍 와서 새파란 초승달이 더욱 시리고 서러운 현실을 드러낸다. 하지만 나비는 날개 짓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 방일(放逸)하지 말며 정진을 할 일이다. 석가모니의 마지막 말씀이 이것이 아니던가. 정녕 기다리는 것은 오지 않고 소망하는 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누구도 자신이 생각한 이상이나 진리에 이르지 못한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고통을 하고 갈등을 하다가 생을 마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소망을 꿈에서나마 대리만족하라고 꿈이 있을 터인데 그런 예는 오히려 드물다. 꿈에서조차 갈망하던 여인에게 뺨을 맞고 빚쟁이에게 쫓겨 다니고 꼴찌를 한 성적표를 받는 것이 인간의 실존적 상황이다.

하지만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처럼, 인간은 오지 않을 줄을 알면서도 기다린다. 시지프처럼, 또 굴러 떨어질 줄 알면서도 온 힘을 다하여 바위를 산꼭대기로 밀어 올린다. 이것이 인간 본연의 실존이다. 그런 존재가 무엇인가를 좇아 자신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고독하고 외로우며 쓸쓸한 길이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으며 누구도 갈채를 보내지 않으며 어느 사람도 함께 하기를 꺼리며, 자신조차 숱한 호의에 빠지는 것이 진리를 찾는 길이다. 망망대해를 나는 나비처럼 연약하고 위험하며 안쓰러운 길이 바로 이 길이다.

붓다의 마지막 당부도 ‘정진’

신경림시인이 ‘길’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들은/자기들이 길을 만든 줄 알지만/길은 순순히 사람들의 뜻을 좇지는 않는다/사람을 끌고 가다가 문득/벼랑 앞에 세워 낭패시키는가 하면 큰물에 우정 제 허리를 동강내어/사람이 부득이 저를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

길을 가던 사람이 벼랑을 만났을 때 필요한 것이 인욕과 정진의 의지와 실천이다. 인욕이란 나를 비난하고 욕하는 이들을 용서하고 참는 것이며 남이 나의 행위를 인정해 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다. 대개 나보다 어려운 자를 도우면 다른 저의가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요, 그 뜻을 높이 여기기는커녕 빨갱이니 쇼니 하면서 회색 눈을 뜨는 것이 세상 사람들의 습관이다. 더구나 내가 보시를 베푸는 사람들조차 고맙게 생각하기보다 나를 오해하고 의심한다면 참으로 참기 어려울 것이다. 이 모든 것을 참고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인욕이라면 주변 환경이 어떻든, 부조리한 세계가 어떻게 헤살을 놓든 꾸준히 나의 길을 가는 것이, 그 길을 향해 걷는 것이, 큰물에 우정 허리가 잘려 길이 사라졌어도 그 길을 찾아 걷는 것이 정진이다. 그 길에 설사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하더라도, 가야 할 의미가 있다면, 목적지를 향하여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 정진이리라.
 이도흠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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