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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 서암스님 원적- 本無生死 도리로 일군 무위자적 87년

기자명 김민경

서암당 홍근 대종사 행장

탄생

스님의 성姓은 송宋씨이시며, 이름은 홍근(鴻根)이시다. 스님의 모친께서 ‘고목에서 꽃이 피고 수많은 별들이 쏟아지고 거북이 나타나는’ 태몽을 꾸시고는 살고 계시던 풍기 땅에서 친정인 안동 구송리로 옮기셨다. 거기에서 1917년 10월 8일 부친 송동식(宋東植)님과 모친 신동경(申東卿)님 사이에서 5남 1녀 중 셋째로 탄생하셨다.



유년

절개가 굳은 의인이셨던 스님의 부친께서 일제치하에서 풍기 일원의 독립운동단체의 지도자로 활약함에 따라 가족은 삶의 터전을 잃고 안동과 단양, 예천, 문경 등지를 떠돌게 되었으니, 스님께서는 추위와 굶주림의 참담한 유랑생활로 유년시절을 보내셨다.

“많이 배워라. 기상을 죽이지 마라”는 부친의 가르침과, 헌신적인 모친의 희생을 입고서 동네 서당과 단양의 대강보통학교, 예천의 대창학원 등에서 품팔이를 하시면서 한학과 신학문을 배우게 되었다.



출가

타고난 영민함과 박학, 깊은 사색을 지닌 스님께서는 인생에 대한 진지한 논쟁을 여러 사람들과 즐기셨는데 어린 나이였지만 필적할 만한 이가 없었다. 그러던 중 “책이나 선생들로부터 들은 것 말고 단 한마디라도 좋으니 너 자신의 이야기를 해보라.”는 예천 서악사의 화산(華山) 노장님의 말씀에 최초의 부끄러움을 배우고 “제 인연은 스님에게 있습니다”는 말과 함께 머슴과 같은 행자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16세(1932년)의 일이다.

고된 생활 가운데에서도 당시 대강백이셨던 화산스님께 좥초발심자경문좦,좥치문좦, 불교의식 등을 틈틈이 배우며 출가 수행인으로서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수계

은사 되실 화산스님이 3년이라는 긴 행자기간을 지내도 사미계를 주실 생각이 없자, 당시 경허스님과 교분이 있던 장진사라는 분의 간청에 의해 비로소 본사인 김룡사에서 19세(1935년)의 나이로 낙순 화상을 계사로 모시고 사미계를 받게 되었다.

21세(1937년)에 김룡사 강원생활 중 금오(金烏)스님을 모시고 보살계와 비구계를 받고, 그해 대덕법계를 품수하게 되었다.



유학과 귀국

목마른 학문의 열정을 적셔주기 위하여 결심하게 된 것이 일본 유학이었다. 그래서 강원에서 내전(內典)을 보는 동시에 유학준비를 독학으로 하여 21세(1937년)에 종비장학생의 자격으로 가난한 유학의 길을 떠나게 되었다. 선진 학문을 접하면서 드넓어지는 안목의 변화에 하루하루 가슴이 벅차올랐지만 이를 위해서는 힘든 노동과 배고픔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신도 모르게 육체는 깊은 병을 만들어 가고 있었고, 결국 당시 사형선고와 같은 폐결핵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24세(1940년)에 귀국하여, 다음해에는 ‘세상에서의 마지막 봉사’라는 생각으로 각혈을 하면서도 모교인 대창학원에서 학생들을 1년 동안 지도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한부의 인생이다’고 생각하며 남은 정열을 다 쏟아 부었으나 죽음은 쉽게 오지 않았다.



수행

죽음만을 기다리며 사는 것이 헛되다고 여기고 26세(1942년)에 스님은 김룡사 선원에서 수선안거에 들어갔다. 28세(1944년)에는 금강산 마하연과 신계사에서 여름을 정진하시며 지나니, 어느덧 몸에 있던 병마는 흔적 없이 사라졌다. 가을이 되자 다시 길을 떠나 묘향산과 백두산 등지를 거쳐 다시 남으로 내려와 문경 대승사의 천연동굴에서 성철스님과 함께 용맹정진 하셨다. 29세 때 광복이 되자 스님은 산에서 내려와 예천포교당에 머무시며 징용당하여 죽음의 땅에서 돌아오는 동포들에게 보금자리를 마련해 주는 보살행을 실천함과 동시에 불교청년운동을 전개하시기도 하셨다.



깨달음

이듬해, 스님은 훌쩍 계룡산 골짜기에 있는 ‘나한굴’이라는 천연동굴로 들어가셨다. 목숨을 건 정진으로 머리는 풀어 헤쳐지고 뼈만 앙상하게 남아갔으나, 스님의 의식은 오히려 맑아졌다. 나중에는 잠도 잊고 먹는 것도 잊은 채 선정삼매(禪定三昧)의 날들을 보내시다가, 한순간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本無生死라!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한갓 공허한 그림자처럼 사라진 것이다. 30세(1946년) 때의 일이었다.



계속되는 정진

계룡산에서 내려온 스님은 수행의 고삐를 늦추지 않으셨다. 만공스님 회상의 정혜사와 한암스님 회상의 상원사, 그리고 해인사, 망월사, 속리산 복천암, 계룡산 정진굴, 대승사 묘적암 등지에서 정진을 계속 하셨다.

32세(1948년)부터 34세(1950년)까지의 금오스님과의 인연은 각별했다. 지리산 칠불암과 광양 상백운암, 보길도 남은암, 계룡산 사자암에서 금오스님을 계속 모시고 정진을 하게 되었는데, 특히 칠불암에서의 죽기살기식의 정진은 지금까지도 유명한 일화로 남아 있다.



원적사 이후

36세(1952년) 이후부터는 문경군 농암면에 있는 원적사에 주로 주석하시게 되었다. 스님의 맹렬한 정진력과 깊은 지혜, 통쾌한 변재와 절도 있는 생활은 여러 수좌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런 까닭에 스님의 주변에는 늘 스님의 도를 흠모하는 수좌들이 함께했다. 낮에는 대중들과 함께 정진하시고, 밤이 되면 혼자 산으로 올라가서 새벽예불 시간이 되어서야 내려오셨다. 그렇게 원적사에서도 스님의 정진은 칼날 같았다.



봉암사 이후

54세(1970년)에 스님은 봉암사 조실로 추대됐으나 사양하시고 선덕(禪德) 소임을 자청하여 원적사를 오고 가셨다. 당시 봉암사 대중들이 선방벽에 붙어있는 용상방에 스님의 법호를 조실자리에 붙이면 스님께서 떼어내고, 다시 대중들이 붙이면 스님이 다시 떼어내곤 하셨다.

59세(1975년)에는 제10대 조계종 총무원장을 맡아 어려운 종단사태를 수습하고 2개월 만에 사퇴하셨다. 63세(1979년) 이후부터는 자연스럽게 봉암사 조실로 계시면서, 해이해진 승풍을 바로 잡고 낙후된 가람을 새롭게 중창하셨다.

한편 수행환경을 위해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산문을 일반인에게 통제하여, 조계종 종립선원으로 지정되게 하는 등 오늘날 ‘모든 수좌들의 고향’으로서의 봉암사를 있게끔 하셨다. 75세(1991년)에는 조계종 원로회의 의장을 맡아 성철스님을 종정으로 재추대하여 종단의 중심을 잡은 후에 미련 없이 산으로 돌아오셨다. 77세(1993년)에는 제8대 조계종 종정으로 추대되셨다.

그러나 스님은 이듬해에 종정직과 함께 봉암사 조실까지 사임하시고, 거제도와 삼천포, 팔공산 등지를 거쳐 태백산 자락에 가건물을 지어 ‘무위정사(無爲精舍)’라 이름하고 무위자적 하셨다. 85세(2001년)에 봉암사 대중들의 간청에 의하여 8년 만에 봉암사 염화실로 돌아와 한거(閑居)하시다가, 산철 결제의 죽비 내려 놓던 날인 2003년 3월 29일 오전 7시 40분 십여 명의 시봉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열반에 드셨다.


문경= 글/김민경, 사진/김형섭
mkkim@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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