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친구의 전화
아주 오래된 친구의 전화
  • 법보신문
  • 승인 2007.08.22 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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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미시령』
고형렬 지음 / 창비시선

토요일 아침, 아주 오래된 친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오래도록 연락이 되지 않던 지인의 입원과 수술 소식은 언제나 어둔 거리에서 불심검문을 당하는 기분입니다. 낯설고 두렵습니다.

병실 입구에 붙여진 이름을 확인하고 조심스레 들어가니 아직 붓기가 빠지지 않은 반가운 얼굴이 배시시 웃으며 손을 내밉니다. 뭉텅 자궁을 들어내는 수술을 하고는 밤새 격렬한 통증을 미처 털어버리지 못한 채 지루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아주 오래된 친구 ?.

그녀는 좀 높은 침상 위에서 나는 좀 낮은 보조 의자 위에서 마주보고 앉아서 가장 가까운 주변 사람들의 안부를 묻는 일에서부터 수다를 떨기 시작하였습니다.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얘깃거리도 떨어지고 그녀도 피곤한 기색입니다.

나는 준비해간 책을 펼쳐들었고 그녀는 잠시 눈을 감았습니다. 커다란 병실 유리창 너머에는 습기를 잔뜩 안은 바람이 버드나무가지를 못 견디게 괴롭히고 병실에는 고요가 찾아들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휴대폰이 온몸을 떨었습니다.

“여보세요.”하면서 상대방의 목소리를 확인한 순간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낮고 편안한 자세로 몸을 눕히고 목소리가 달콤하게 낮아졌습니다. 스르르 두 눈을 감으면서 그녀는 전화기에 대고 속삭입니다.

“응…. 응…. 그래, 아, 이뻐, 내 강아지. … 우리 아기….”

그녀가 다소 늦은 나이에 낳은 딸의 전화였습니다. 딸은 학원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려줍니다. 낭랑한 목소리가 내 귀에도 들립니다.

그 예쁜 아기를 열 달 동안 담고 있던 집이 이제 ‘철거’되고 앙상한 빈 몸으로 병상에 누운 그녀. 아기는 자궁을 빠져 나와 세상의 바람을 거침없이 가르며 달리는 소녀가 되었고 ….

병원을 나서니 버드나무 가지를 흔들던 눅진한 바람이 내게 달려듭니다. 문득, 아침에 읽다가 책상 위에 두고 온 시집이 생각납니다. 밑줄을 그었던 그 시는 “명태여, 이 시만 남았다”였습니다.

“졸짱붕알을 달고 명태들 먼 샛바다 밖으로 휘파람 불며 빠져나간다 … 아들이랑 하늘 쳐다보며 황태 두 코다리 잡아당겨 망치로 머리 허리 꼬리 퍽퍽 두드려 울타리 밑에 짚불 놓아 연기 피우며 두 마리 불에 구워 먹던 2월 어느 날/…두 마리 돌로 두드려 혼자 뜯어 먹자니, 내 나이보다 아래가 되신 선친이 불현듯 생각나/…아버지가 되려고 아들을 불러 앉히고 그 중태를 죽죽 찢어 입에 넣어주었다 … 슬프다기보다 50년 신춘에 이렇게 건태 뜯어 먹는 버릇도 아버지를 닮았으니, 아들도 나를 닮을 것이다/명태들이 삭은 이빨로 떠나는 새달, 그렇게 머리를 두드려 구워 먹고 초록의 동북 바다로 겨울을 보내주면, … 남은 건 내 몸밖에 없으나 새 2월은 그렇게 왔다 가서 이 시만 이렇게 남았다”
 
동국역경원 역경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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