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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조선불교 선종(禪宗)의 창종

기자명 법보신문

청정 계율-禪 전통 지키기 위한 항일의 결기

왜색 영향 비구승 날로 감소…정재, 환속자들 생활비로 탕진
1935년 수좌대회 통해 ‘선종’ 선포…비구승 항일 의식 높아

<사진설명>1931년 선학원에서 개최된 제1회 전국수좌대회 기념사진 사진제공=민족사.

일제시대에 비구승들의 처지는 날로 악화되어 말기에는 수행 공간의 확보와 생계 유지가 어려운 지경에 처하게 된다. 사찰령이 시행되던 초기 사법에 본사 주지는 비구승들만 취임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있었다. 그런데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처자식을 거느린 대처승의 숫자는 날로 늘어났다. 1925년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교무원에서 파악한 통계에 의하면 당시 승려의 숫자는 비구가 6,324명 비구니가 864명으로 총 7,188명이었다. 이 가운데 결혼하지 않은 독신 비구는 4천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처승의 확산을 경계하는 목소리가 교계에서 일어나 1926년 백용성은 두 차례나 승려들의 대처식육(帶妻食肉)을 금지해 달라는 건백서를 총독부에 제출하지만 별 반응이 없었다. 대처승들이 늘어나게 된 까닭은 일본 유학승들이 거의 모두가 결혼하여 귀국하였고, 그 영향으로 승려들의 결혼 풍속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조선총독부는 1926년 11월 승려들에게 대처식육을 허용하고, 각 본사에 대처승도 본사 주지를 할 수 있도록 사법을 개정하도록 지시하였다. 일제 말기에 가면 비구승의 숫자는 300명 또는 600여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러한 때 비구승들을 중심으로 전통 선맥을 계승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니 1921년에 설립된 선학원이 그것이다. 선학원은 개원함과 동시에 선방(禪房)을 열고 선승들이 수행을 시작하였고, 자치 조직인 선우공제회를 창립하여 활동을 하였다. 그렇지만 선학원은 설립 초기부터 운영난에 봉착하여 어려움을 겪다가 1931년 1월에 김적음이라는 승려의 노력으로 중흥의 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송만공의 제자로서 한의학에 능하여 침술과 시약으로 많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면서 그로 인하여 생겨나는 자금을 선학원 운영에 쏟아 부었다. 그러나 병원을 개설한 것도 아니고 면허도 없이 운영하던 한 개인의 한의 시술로 선방에 기거하는 많은 선승들의 생활비를 부담하는 것은 무리였다.

비구승들은 보다 안정적인 수행풍토를 정착시키기 위하여 재단법인 결성 움직임을 보였다. 김적음은 비구승들의 의사를 결집하기 위해서 전국 수좌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1931년 3월 14일 통지문을 발송하고 동년 3월 23일 선학원에서 전국 수좌대회(首座大會)를 개최하였다. 수좌란 여러 곳을 다니며 수행하는 승려란 뜻으로 보통 참선을 하는 선객을 일컫는다. 수좌대회는 이후 34년, 35년, 39년 등 몇 차례에 걸쳐서 개최된다.

제1회 대회에서 결의된 사항은 비구승들의 처지가 너무 곤궁하므로 중앙선원을 설치해 달라는 건의서를 조선불교선교양종중앙교무원 종회에 제출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교무원 종회는 예산상의 이유로 이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김적음은 1931년 11월 8일 예전부터 인연이 있던 범어사에 경비 보조를 요청하였다. 범어사 본사 총회에서는 선학원이 요청한 매년 600엔의 경비에 대하여 경제 사정이 어려운 까닭에 매년 200엔씩을 보조하기로 결의하였다. 김적음을 중심으로 한 비구승들은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기 위하여 10년 전 선우공제회 결성시에 들어온 토지와 신도들의 성금 그리고 새로 각 사찰에서 들어온 토지 등을 모아서 1934년 초 무렵 재단법인 설립 인가를 신청하여 동년 12월 5일자로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선학원이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구원으로 개편되면서 선종이 창종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1934년 12월 23일에 개최된 제5회 선리참구원 이사회는 법인의 정관 시행세칙 제정 준비위원에게 수좌대회 준비위원을 겸할 것을 결정한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서 수좌대회 준비위원회가 구성되고 1935년 3월 7일부터 8일에 걸쳐 전국 수좌대회가 개최되고 이 대회의 결과로 조선불교 선종이 탄생하게 된다. 선종의 탄생 배경은 이러하다.

일본 불교의 영향으로 많은 승려들이 ‘중도 사람이다’라는 구호를 앞세워 육식음주(肉食飮酒)하며 결혼을 하고 있다. 이렇게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대처승들이 마치 이러한 행동이 대승불교의 수도상(修道相)이며 전도행(傳道行)인 것처람 선전함으로써 교단의 엄숙청정하던 전통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승려이기를 포기하고 세속으로 돌아간 무리들이 승려인양 자처하기 때문에 신성한 수도장인 사원은 가정화·요정화함으로 말미암아 사찰의 정재(淨財)는 환속자들의 생활비로 낭비되고 각처의 수도기관은 폐지되어가고 있다. 이에 비구승들은 청정한 계율을 지키고, 참선 수행을 중시하는 전통불교의 선맥을 계승하여 고통받는 중생을 제도하고 정법을 부흥시키기 위해서 선종을 창종한다고 밝히고 있다.

<사진설명>전통선맥 계승을 내세우며 1935년 창종된 조선불교선종의 탄생 과정을 기록한 조선불교선종수좌대회회록.

조선불교 선종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날은 삼귀의례를 시작으로 송만공의 개회사가 있었고, 회원들의 출석 현황을 점검하였는데 참석자는 전부 75명이었고, 이 가운데 비구니가 6명 참석하였다. 임시집행부 선거에서 기석호가 의장으로 피선되었고 그가 선서문을 봉독하였다. 선서문의 요지는 ‘여래의 정법이 그 목숨이 실끝 같은 금일의 위기를 당한 것은 제자들의 잘못이다. 이제 그 죄상은 뼈를 부시고, 골수를 내어 바치더라도 오히려 다하지 못하니 이제 참회 대회를 열어 지난 날의 허물을 반성하고 다시 죄를 짓지 않을 것을 맹서한다’라고 되어있다. 이어서 김적음은 경과보고를 하였는데 1921년 선학원의 발기부터 선우공제회 창립과 수좌대회의 개최, 재단법인의 성립과정과 수좌대회 준비 과정을 보고하였다. 둘째 날은 재단확장기성회 조직의 건과 중앙에 모범선원설치에 관한 문제, 의제(衣製) 및 의식에 관한 문제와 임원선거 그리고 기타사항을 토의하고 폐회하였다.

수좌대회에서는 조선불교선종종규(朝鮮佛敎禪宗宗規)에서 규정한 각종 법안을 제정하였다. 조선불교선종종규는 종명·종지·본존·의식·선원·승려 및 신도·선회(禪會)·종무원·종정·선의원회(禪議員會)·재정·보칙 등 12장 29조로 구성되어있다. 종명은 “본종은 선종이라고 칭함”이라고 나타나 있다. 종명을 선종이라고 칭한 것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사찰령 체제 하에서 30본사 주지들의 회합체인 30본산주지회의원에서 채택한 종명은 조선불교선교양종이기 때문이다. 본산 주지들은 제대로 된 종명을 채택하지 못하였는데 수좌대회에서 선종이라고 종명을 표방한 것은 우리 불교의 연원이 선종에 있음을 밝힌 것이다. 이러한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비구승들은 총독부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는 31본산 주지들과 차별성을 가지는 재야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구승 가운데는 본사 주지들의 친일적인 성향과는 달리 항일의식을 가진 승려들이 많았다. 8개조로 구성된 중앙선원청규(中央禪院淸規) 제5조는 본 선원은 음주·식육·흡연·가요 등 일체 혼란을 금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대처승들의 대처식육하는 혼탁한 생활과는 다른 청정한 계율을 지키면서 정법을 전파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으로 선종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조항이다. 이 수좌대회에서는 종정을 비롯한 임원들을 선출하였는데 종정은 인원수와 임기를 정하지 않은 종정회를 구성하였다. 종정회는 종무원 임원 즉 이사 및 원장·부원장과 이와 같은 수의 선회전형원(禪會銓衡員)으로 구성된 협의체에서 전형하여 선회의 동의를 받을 것을 명시하였다. 이 때 선출된 종정은 신혜월·송만공·방한암 등이며, 원장은 오성월이 선출되었다.

1935년 조선불교 선종이 비구승들 가운데서도 참선 수행을 하던 수좌들의 총의를 결집한 전국수좌대회의 결정체로 탄생하였다는 것은 한국 불교사에서 대단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비구승들이 청정 계율 수호를 천명한 것은 일본 불교 풍습에 동화되지 않고 우리의 전통을 수호하겠다는 것으로 이것은 항일의지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선학원은 일제 말기까지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지 않고 견디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김순석(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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