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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오리는 물로 닭은 홰로

기자명 법보신문

본분대로 사는 게 순리이자 곧 행복
지도자는 우열보다 평상심 갖추어야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해졌다. 쌀쌀하기보다는 추워졌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인공으로 만든 호수가 있다. 말이 호수이지 큰 연못이라 할 정도이다. 우리나라의 땅덩이가 워낙 좁으니까 이런 정도를 두고 호수라 하지, 넓은 땅덩이라면 대굴 안의 연못에 지날 것도 없으리라.

어찌되었든 이러한 물이 있어 양회가루를 비벼다가 부어 놓은 도시 속에 갇혀 사는 처지로는 시원한 숨을 들이마시고 내어뱉기에 안성맞춤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와 같이 게으른 사람에게도 이러한 주변이 있기에 아침저녁으로 한가히 거닐어서 모자라는 운동량을 보충하게 되니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연꽃이 피어 있어 눈길을 즐겁게 하더니, 이제는 잎마저도 시들어 축 늘어진 것이 오히려 흉물스럽다. 계절 변화에 따른 미추(美醜)의 변화에 새삼 놀라면서 나의 늙어감이 바로 저런 모습이리라 짐작된다. 자연에 대한 외경심에 앞서 두려움으로 다가온다.

연꽃이 사라져 서운하다 여기며 다시 살피니, 겨울 철새들이 날아들어 그 자리를 메워 주고 있어 다시 시선의 즐거움을 누리게 되었다. 짝을 지어 무자맥질을 하는 오리를 보면서 사람살이보다 더 다정한 동물 사회가 한층 부러워지기도 한다. 거기다가 날씨 쌀쌀하다 하여 옷깃을 세우며 걷고 있는 나는 물만 보아도 추위를 느끼는데, 저들은 오히려 물에 들어 즐거워 하니 춥다 덥다의 잣대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자연 사물의 제 속성인가보다. 해가 지면 닭은 횃대에 오른다. 해가 진다는 말은 기온이 내려감을 의미한다. 낮 기온이 밤 기온으로 변하니 햇볕이 사라진 밤은 싸늘함이 당연하고, 기온의 등차는 땅에서 높이 오를수록 낮아짐이 역시 자연의 현상이다. 그런데 닭은 기온이 정상일듯 한 땅보다는 기온이 내려갈듯 한 횃대로 오른다. 땅의 습한 기운을 싫어함일까.

이와는 정반대로 뭍에서 놀던 오리는 저녁이 되면 물로 들어간다. 물이 분명 흙보다는 차가울 터인데 쌀쌀한 저녁 기온을 물에서 따뜻이 데운다는 역설이 성립되니 역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를 일러 우리는 쉽사리 자연의 섭리라 하는 것은 아닐까 쉽다. 자연 사물은 각기 주어진 본분대로 사는 것이 순리이고 행복이다. 학의 다리는 길어서 평안하고 오리의 다리는 짧아서 평안하다. 이것이 주어진 분수이다. 이 분수대로 삶이 바로 평상심이요, 이 평상심이 바로 길이요 이 길을 도라 하거나 부처라 하는 것일 것이다.

그저 내 식 네 식대로 사는 것이지 내 식이 옳고 네 식이 그릇된 것이 아니다. 윗마을 사람들은 당나귀를 타는 것이 편하다 하고, 아래 마을 사람들은 말을 타는 것이 편하다 한다. 말이 당나귀보다 크니 내가 낫다 한다면 작아서 타고 내리기에 편한 것이 당나귀라 할 것이니 우열을 가릴 수 없다. 그저 손에 익은 것이 편한 것만은 틀림이 없다.

길 가는 이들의 부딪침을 막기 위하여 만든 좌측통행이라는 보행자의 길잡이가 우측통행만 못하다는 핑계로 적잖은 연구비를 들여 연구하여 바꾸어보겠다는 소식을 들은 적이 있다. 할 일도 어지간히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쪽의 왼편이 저쪽은 오른편인데 낮고 못함이 어디 있는 것인가.

나라의 우두머리를 추대한다고 온 나라가 떠들썩하다. 옳거니 그르거니 하는 서로의 주장들이 바로 이러한 좌우의 통행으로 우열을 따지는 것 같다. 좌우 통행의 우열보다는 왼발 오른발의 발걸음을 편히 디딜 수 있는 평탄한 길을 요구한다. 이 평탄한 길을 다듬겠다는 기초적 평상심을 보이는 것이 보다 더 정직함이고, 서민대중은 이러한 정직성을 바란다.
 
동국대학교 명예교수
sosuk0508@freech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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